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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김창활
문학동네
2002년 11월 2일 발행
392쪽 |
89-8281-587-2
장편소설
정상
12,000원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삶의 고독과 공허를 응시하는 차가운 시선, 그 상반된 울림이 주는 감동!

『늦어도 11월에는』으로 우리는 또하나의 세계적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 - 로스앤젤레스 헤럴드 이그재미너



한스 에리히 노삭 (Hans Erich Nossack, 1901∼1977)
사르트르로부터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 작가이며 세계적인 소설가"라는 극찬을 받은 노삭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삼 년간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다가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노동자와 회사원으로 전전했다. 1933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한때 독일공산당(KPD)에서 활동했던 것을 이유로 그의 작품은 나치 치하에서 출판금지를 당한다. 1943년에는 함부르크 공습으로 인해 일기와 원고를 모두 잃었다. 1955년 발표한 대표작 『늦어도 11월에는(Sp testens im November)』으로 독일 최고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독일산업협회 문화상과 빌헬름 라베 상 등을 수상했다. 전 세계에 번역 소개된 『늦어도 11월에는』에서 노삭은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 자기 상실의 아픔을 겪는 여인 마리안네를 중심으로, 기존의 모든 사회적 질서와 독선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 실현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뜨거운 정열로 옹호하고 있다.

옮긴이 김창활
극작가. 번역 문학가.
한국외대 독일어과 졸업. 1964년 조선일보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로 입선. 1967년 한국일보 장막희곡 모집에 「마술사의 제자」로 당선. 희곡 「송별연」 「알라망」 「탈」 「원색조명」 「도끼와 사슬」 외에 다수의 방송극을 썼으며,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 『왼손잡이』, 막스 프리시의 『만리장성』 등 100여 권의 현대독일문학 작품을 번역했다.
불륜으로 시작하는 지난한 자아 탐색의 길
제2차세계대전 후 독일의 한 공업도시.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5월의 어느 날 밤, 상공인협회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문학상 시상식이 시내의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 상의 수상자로 결정된 서른네 살의 작가 베르톨트 묀켄.

이 시상식장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발장난을 하며 수상연설을 하고 있는 예민한 얼굴의 작가를 유심히 쳐다보는 스물여덟의 유부녀 마리안네.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문학상을 주관하는 헬데겐 사의 사장 막스의 아내인 그녀는 사업에 바빠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남편을 대신해 억지로 나와 앉아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다. 정치와 사업에 의해 인간관계가 유지되는 삭막하고 갑갑한 공업도시. 시상식 이후의 축하파티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 부만이 중요한, 위선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장에 다름아니다. 파티가 지루해 어쩔 줄 모르던 베르톨트와 마리안네 두 사람은 서로에 관한 짧고 강렬한 탐색의 시간을 통해 서로를 운명적으로 알아본다. "그 일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마련되어 있던" 일이었다고 말하는 마리안네. 이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의 시작은, 멋진 저택과 건실하고 부유한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상하게 말라가던 스물여덟 살의 귀부인 마리안네에게 던진 베르톨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길로 마리안네는 막대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편과 어린 아들, 유일하게 호감과 애정을 느끼는 시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난다.

낯선 도시 D시, 베르톨트의 친구 부부 집에 머물며 이 주일을 보낸 이들은, 라인 강을 넘어 외진 국경마을인 루드비히스호프에 도착해서 얼마간을 보내다가 다시 낯선 도시로 떠나 헤어지기 전까지 함께 지낸다.

자신의 작품조차도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기존의 사회적 통념과 질서에 대해 냉혹한 비판을 가하는 묀켄은 11월에 무대에 올려질 연극의 희곡을 쓰는 일에 집중한다. 도피생활이 불안한 이들은, 무슨 일이든 "늦어도 11월에는" 해결되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11월에 이들을 찾아오는 것은 비극적인 결말뿐이다.

여성의 심리를 극적으로 보여준 열정의 서술
"아니지. 차근차근 얘기해나가야 한다. 차근차근……"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화자 마리안네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노삭은 마리안네가 죽은 후에 사건의 전모를 말하게 하는 특이한 서술방식을 택함으로써, 주인공이 살아온 세계와 모든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도록 했다. 이런 서술 시점의 선택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진행형인 사건으로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어, 서술의 극적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유유히 집을 나가는 마리안네. 따뜻하고 행복하고 후회 없는 사랑을 기대했던 그녀의 희망은 무너져버린다. 마리안네는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가출할 정도로 과감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과거 속에 갇혀 있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결혼 전에 사귄 아르님은 그녀에게 절대적인 존재나 다름없다. 깨어진 첫사랑이 상처로 남아 "마지막엔 언제나 아르님을 생각하게 되는" 나약한 여자인 것이다.

묀켄과 정열적인 키스 한 번 없이 서먹서먹한 채, 외진 국경마을의 낡은 집에 앉아 지도를 펴놓고 도망가 살 수 있는 곳의 지명을 중얼거리는 마리안네. 자신의 행동이 옳았던 것인지, 죄책감에 시달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리안네는 그들이 떠난 지 이십여 일 후에 찾아온 시아버지의 방문에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 묀켄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 모든 과거의 사건을 기억해내는 마리안네의 복잡한 심리가 뛰어난 연상과 반전에 속도감을 더해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강렬하고 사무치는 결말
11월이면 묀켄이 쓴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고, 돈을 받으면 낡은 폭스바겐을 하나 사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자고 했던 두 사람은, 마리안네가 떠나면서 헤어진 채 몇 개월을 보낸다. 마리안네는 아무런 질책 없이 자신을 받아준 남편에게 전과 다름없이 대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러나 11월이 오고, 저녁 무렵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마리안네는 다시 방황하기 시작한다. 묀켄이 쓴 작품의 개막공연이 마리안네가 사는 도시에서 올려지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묀켄이 반드시 자신을 다시 찾아오리라 확신하며 일분일초 초조하게 묀켄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공연되는 날, 마리안네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진 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묀켄과 함께 집을 떠났던 5월의 그 밤처럼 다시 한번 불가능한 사랑을 향해 몸을 던진다. 자신들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묀켄은 유유히 집으로 찾아오고, 마리안네는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다시 남편과 가족을 버리고 묀켄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중고 폭스바겐을 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묀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빗길을 달려 오래된 철도 건널목에 다다른다. 건널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해골 그림과 함께 "죽음은 영원하다"는 글씨가 씌어진 사고다발지역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마리안네가 가르쳐준 자장가를 휘파람으로 나직하게 부는 묀켄…… 두 사람이 탄 차는 굉장한 속도로 달리다 철로 교각에 부딪힌다. 우박이 섞인 비가 내리는 11월의 어느 날 밤에 일어난 일이다.

산업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인간의 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변호하는 노삭의 역작
『늦어도 11월에는』에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발달한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업적 위주의 삶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인간의 위기와, 여성의 잠재의식 속에 숨은 영원한 해방의 의지를 문제 삼고 있다. 마리안네의 남편 막스는 산업사회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사업에만 몰두하는 소심한 사람이기는 하나 마리안네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마리안네 또한 남편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배신할 정도로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리안네의 마음속에 깃들인 공허와 상실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절대적인 상황에 이르고, 충만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던 묀켄을 만나지만 그 시도 역시 좌절되고 만다. 결국, 완벽한 사랑, 혹은 자유의지로 이루어지는 인생을 갈망하던 젊은 마리안네는 영원한 고뇌의 종지부를 죽음으로 찍게 되며,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 속으로 당당히 걸어들어간다.

『늦어도 11월에는』이 1955년에 발표된 전후문학에 속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동적인 것은, 인간을 속박하는 사회적 질서가 여전히 존재하고, 21세기가 되면서 더욱더 개선하기 어려운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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