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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모비딕 - (예술, 존재, 하이데거)
김동규
문학동네
2013년 2월 28일 발행
228쪽 | 148*205 | 신국판 변형 | 무선
978-89-546-2065-9
교양,철학/심리/종교,위대한 순간
정상
12,000원

하이데거는 서양철학 전체를 담아낼 만큼 웅대한 사유를 펼친 철학자다. 그의 삶과 철학은 서양 문명의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각인된 사건이 되었고,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이 출간된 1927년은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을 가르는 기점이 되었다.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리쾨르, 푸코, 데리다, 레비나스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은 이 책을 출발점 삼아 현대적 사유를 펼쳐나갔다. 또한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아렌트의 정치철학, 실존철학과 현상학, 가다머의 해석학, 철학적 인간학, 언어철학, 과학철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의 거의 모든 지적 흐름의 원천에는 하이데거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 전체를 회고하며 비판을 수행했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세계대전, 모든 것이 돈으로 교환 가능한 자본주의 체제, 과학기술문명의 폐해를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닌 서양철학의 뿌리에서 성장한 열매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지금과 다른 존재이해, 망각된 과거의 존재이해를 다시 불러오지 못한다면 현 시대의 난관은 돌파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존재이해를 비판의 준거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햄릿처럼 과거의 유령에 사로잡힌 자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근원인 아버지의 아버지, 근원 아버지의 유령에 귀를 기울인 철학자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유럽 현대 철학과 미학이 주요 전공분야이다. 현재는 멜랑콜리 담론사 연구,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Metabiologia, Zoopoetics)에 몰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멜랑콜리아―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 미학―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철학의 모비딕―예술, 존재,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이 있고, 옮긴 책으로 크리스토프 멘케의 『미학적 힘―미학적 인간학의 근본개념』,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도런스 켈리의 『모든 것은 빛난다―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티모시 클라크의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이 있다.

프롤로그: 현대철학의 위대한 순간

1장. 『존재와 시간』의 예술철학적 단초

2장. 시와 죽음

3장. 예술가와 양심

4장. 죽음의 눈

5장. 하이데거의 미학적 기여

에필로그: 철학의 모비딕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 예술

신화와 이성은 원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플라톤 이후 둘은 대립관계에 놓였고, 서양철학은 로고스의 역사로 이행했다. 신화를 지워낸 공백에 써내려간 이 역사는 어쩌면 말소의 역사요 왜곡의 역사다. 그러나 예술의 토양이 신화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예술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신화적 흔적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흔적이 오히려 지금까지 역사를 가능하게 한 근원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심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유를 전회하며 또다른 시원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심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은 바로 이 심연 속에서 찾아야 했다. 신화의 흔적, 예술은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왜곡된 존재이해를 극복하는 수련장이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는 신성한 학문이었으며, 따라서 진리가 드러나는 지상의 신전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한 자유의 현기증

하이데거에게 실체화된 ‘나’는 없다. 하이데거의 ‘나’는 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스스로 변형되면서 자신을 창작할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에 가깝다. 그런데 이 자유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흰 캔버스나 글이 쓰이지 않은 백지, 커서만 깜박이는 빈 문서파일처럼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텅 빈 자유다.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한 현기증 나는 자유다. 또한 그 자유는 죽음을 각오하고 기존의 강고한 ‘나’를 깨트려야만, 자기 인생 전부를 걸고 모험해야만 가까스로 열리는 자유다. 그리고 이런 현존재의 자유에서 비로소 존재의 풍요롭고 진실한 모습이 드러난다.
  하이데거식 미래는 끝이 존재하는 유한한 미래, 불가능성 앞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미래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닐 수 있는’ 미래이고 ‘없을 수 있는’ 미래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님’으로 침윤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 결국 그것은 텅 빈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다. 미래를 선취한다는 것은 예측불허의 시간을 회복하는 것, 불가피한 존재론적 불안을 경험하는 것, 그 불안의 동요 속에서 자신을 창조적으로 형성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 그럼으로써 결국 존재를 포용하는 시간적인 존재로서 텅 빈 자신이 되는 것을 뜻한다.

삶의 철학, 지상의 철학, 유한성의 철학

하이데거는 근대적 존재이해의 절대성을 상대화하고 역사화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이해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파생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삶의 세계, 생활세계, 지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하이데거는 절대적 진리로 공언되는 과학적 인식을 다시 지상의 삶으로 호출해 그 허구성과 편파성을 폭로하면서 유한성의 철학을 천명했고, ‘세계-내-존재’의 의미 속에 삶으로의 귀향을 새겨넣었다.
  하이데거는 평생 ‘존재’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적했다. 특히 예술 속에서 ‘존재’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았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을 가리켜 “진정한 의미의 얼굴”이 없는 괴물이라고 했다. “주름투성이 이마가 넓은 하늘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이름의 얼굴 없는 거대한 괴물에 맞서 초인적인 힘으로 사투를 벌인 에이해브 선장을 닮았다. 그것은 서양 문명, 그리고 이미 그 문명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우리 자신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싸움의 승패는 이기고 지는 결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투의 과정을 통해 성장판을 얼마만큼 열어내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울 때에는 괴물과 닮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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