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신』은 지금 가장 주목받는 일본 영화의 차세대 기수 니시카와 미와의 소설집으로, 벽지의 의료를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묶었다. <유레루> <우리 의사 선생님> 등의 작품을 통해 일본 영화계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국내에도 잘 알려진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곳을 짚어내는 섬세한 시선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특유의 연출력에 더해 심연을 들여다보는 빈틈없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실제로 니시카와 미와는 성공이 보장된 기존의 책이나 만화, 드라마의 리메이크가 주를 이루는 여타 일본 영화와 달리 매번 직접 집필한 독창적인 시나리오로 작품을 찍어왔다. 나쓰메 소세키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영상화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녀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 소설의 영역에서도 빼어난 필력을 선보였다. 그 결과 <유레루>를 직접 각색한 동명의 소설로 제20회 미시마 유키오 상 후보에 오른 데 이어, 『그날 도쿄역 다섯시 이십오분발』 『영원한 변명』 『명작은 언제나 애매해』 등의 소설과 에세이를 꾸준히 발표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소설집의 출발점은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이다. 한 시골 의사의 비밀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역시 직접 각본을 집필해 최우수 각본상을 비롯 일본 아카데미상 10개 부문 및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고, 키네마 준포가 선정한 그해의 일본영화 1위에 오르며 평단과 관객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 내에 표현해야 하는 영화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만들어낸 세계 중 빙산의 일각”임에 아쉬움을 느낀 니시카와 미와는 미처 소개하지 못한 여러 에피소드와 삶의 면면을 어떻게든 살려내고자 했고, 그것들을 다섯 편의 단편소설로 엮어낸 것이 이 책이다. 영화와는 또다른, 새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이 소설집은 제141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라 아사다 지로, 미야베 미유키 등 심사위원들의 호평 속에 소설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미지수를 잃고 삶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존재들
그 아픔과 상처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다섯 편의 이야기
그저 그런 앞날만이 기다리는 작은 마을에서 숨막혀하는 사춘기 소녀, 사회적 성공을 거둔 남편에 대한 긍지를 내건 채 남몰래 그를 경멸하는 전직 간호사, 환자를 대하는 일에 어떤 감동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의사…… 적게든 많게든 ‘의사’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다섯 편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어느 한순간 이제껏 동경하던 것이 눈앞에서 빛바래는 경험을 한 이들이다. 이제 그들은 별다른 희망이 없는 일상의 밑바닥에서 숨죽이며 살아가지만, 잔잔한 수면 아래서는 들키고 싶지 않은 소망과 진심, 쉽사리 잡히지 않는 미묘한 감정들이 가만히 끓어오른다. 그들의 고요한 일상에 귀기울이고 미세한 결을 포착해내는 작가의 시선은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유머러스하지만 시종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그 연민 어린 시선을 통해 푸르디푸른 논밭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나둘 선명하게 드러나는 마음 풍경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애틋함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신과 같았던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아픔과 상처와 함께 그럼에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 누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 전부를 넉넉히 감싸는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는 삶의 비의를 끌어안고서도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다정한 처방이 되어줄 것이다.
각 작품의 내용
「1983년의 반디」
작은 시골의 빤한 삶을 벗어나고 싶은 리쓰코. 시내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대뿐인 버스를 타고 입시학원에 다닌다. 막차를 타고 홀로 귀가하던 어느 밤, 늘 무뚝뚝하던 버스 기사가 불쑥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개미의 행렬」
학회 참석차 시내로 나가는 노의사를 대신해 ‘나’는 외딴섬의 하나뿐인 진료소를 찾는다. 낯선 말씨와 주민들의 데면데면한 태도에 잔뜩 움츠러든 첫날, 몸이 아프니 와달라는 한밤중의 전화에 서둘러 노파의 집을 찾았다가 생각지도 못한 부탁을 받게 되는데……
「벼룩의 애정」
노기 게이치로는 흠잡을 데 없이 명망 높은 소아심장외과 의사다. 하지만 부인 아케미가 보기에는 그저 체면을 중시하는 한심한 남자일 뿐. 응급실 간호사를 그만두고 집안일과 남편 내조에만 전념하는 아케미에게,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살아 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난다.
「디어 닥터」
급작스레 아버지가 쓰러진 오늘, 병원에서 형을 기다리며 신야는 생각에 잠긴다. 동경하는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영업사원으로 병원 주변을 맴돌 뿐인 형. 하지만 밤늦게 도착한 형은 병상의 아버지를 보고도 의연한 모습이다. 형은 벌써 아버지를 졸업한 것일까.
「보름달 대변자」
‘나’는 시내 병원으로의 전근을 앞두고 있다. 작은 항구마을의 진료소에서 보낸 사 년은 의사로서 이상을 펼치기는커녕 주민들의 즉각적인 요구에만 따르는 매너리즘에 빠진 시간이었다. 인수인계를 위해 후임과 마지막 왕진을 돌던 중 좋아지리라는 기약도 없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는 손녀에게 충동적으로 작은 거짓말을 하고 만다.
▶ 일본 독자들의 찬사
_문장이 매우 시각적이라 인물과 정경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느낌이다. 많은 사람의 ‘보통의 삶’을 살피고, 그 소중함을 전하는 책.
_완급 조절이든, 묘사와 생략의 묘이든 단편소설의 표본과도 같은 작품집. 영화와 관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작품집 자체로 충분히 완결되어 있다.
▶ 옮긴이 유은정
성신여대 일문과 졸업. 잡지사 기자, 라디오 방송국 작가를 거쳐 현재 자유기고가 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달의 연인』 『까마귀의 엄지』 『바다 동물은 왜 느림보가 되었을까?』 『평온한 죽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