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 저자
- 이현진
- 출판사
- 글항아리
- 발행일
- 2015-07-01
- 사양
- 372쪽 | 168*230 | 양장
- ISBN
- 9788967352233
- 분야
- 역사
- 도서상태
-
절판
- 정가
- 25,000원
-
도서소개
정조가 죽기 직전부터 시작해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어 상장례를 마칠 때까지 3년 동안 진행된 모든 과정을 정리한 책이다. 조선의 여러 국왕 가운데 특히 정조의 죽음은 독살설이 제기되는 등 학계에서도 그를 둘러싼 논란이 없지 않다. 이 책은 국가 의례라는 공적인 절차를 통해 그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조선시대 피라미드식 신분관계에서 최고 정점에 위치한 국왕은 해와 달로 비유될 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의 장례를 치르는 데 들어가는 인력과 물력의 투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고, 이는 곧 그것을 기록한 문헌 또한 다른 의례에 비해 적잖은 분량이었음을 뜻했다.
조선의 국가 의례 중 국왕의 죽음과 관련된 의례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다른 의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책의 특징은 국왕의 국장이라는 일반적인 패턴에 정조라는 인물을 대입시켜 날짜별로 진행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이다. 국왕이라는 존재는 한 사람의 자연인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공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은 죽기 직전부터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이 책을 통해 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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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 과정을 이수했다. 서울대, 동덕여대, 건국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공저로 『종묘와 사직』, 『왕의 행차: 조선후기 국왕의 융릉·건릉 행행行幸과 의례』, 『궁방양안宮房量案』, 『영·정조대 문예 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조선의 국가 제사』, 『조선 국왕의 일생』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 「조선시대 奉常寺의 설치와 기능, 그 위상」, 「고종대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別看役의 성격」, 「영조대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예장禮葬과 그 성격」, 「대한제국의 선포와 종묘 제도의 변화: 七廟의 구성과 황제 추존, 신주 改題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종묘의 부묘 의례와 성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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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005
제1부 조선 왕실의 국장 형성과 국장 관련 문헌
제1장 국장에 들어가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신분에 따라 "죽음"과 "장례"를 다르게 일컫다 | 돌아가신 국왕은 어떻게 부를까
제2장 국왕의 장례는 왜 중요한가
가장 까다롭고 규모가 방대했던 흉례 | 『논어』가 말하는 효와 상장례 | 전왕과 천자국 중국이 정통성을 부여하다
제3장 조선 왕실의 국장 절차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중국 황실의 국장 | 고려 왕실의 국장 | 조선 왕실의 국장
제4장 정조의 국장은 어떤 문헌을 근거로 했는가
『세종실록오례』, 서례와 의주를 묶어서 다루다 | 『국조오례의』, 제후국에 걸맞은 국가 전례서 | 『국조속오례의』, 양 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다
『국조상례보편』, 왕실의 상장례를 재정비하다
제5장 정조의 국장은 누가 담당해서 진행했는가
도감은 어떤 기관인가 | 국장도감, 국장의 모든 것을 총괄하다 | 빈전·혼전도감, 왕의 시신과 신주를 담당하다 | 산릉도감, 왕릉을 조성하다 | 부묘도감,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다
제2부 정조의 국장 절차
제1장 승하에서 발인 전까지 국장 절차는 어떠했나
제2장 발인에서 장례까지 그 절차는 어떻게 이뤄졌는가
제3장 건릉은 어떻게 조성되었을까
제4장 장례를 치른 뒤 담제까지 국장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제5장 신주는 종묘에 어떻게 부묘되었는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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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삶의 가장 마지막에 치러지는 장엄하고도 성대한 의식!
국가 전체를 슬픔으로 몰아넣는
‘왕의 죽음’을 맞아 치러지는 3년의 의례, 국장
그 과정을 하나하나 쫓으며 세밀화로 복원해내다
· 방대한 국장 관련 문헌들을 정리하다
· 정조의 국장 의궤를 온전하게 재현하다
· 장례의 과정을 빈틈없이 되살려내다
정조가 죽기 직전부터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어 상장례를 마칠 때까지 3년 동안 진행된 모든 세밀한 과정이 이 책에 담겼다. 조선의 국가 의례 가운데 특히 국왕의 죽음과 관련된 것은 다른 의례와 견줄 수 없을 만큼 엄숙하고도 장엄했다. 특히 정조의 경우 그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설이 제기되는 등 학계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이 책은 국가 의례라는 공적인 절차를 그의 죽음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국왕은 한 사람의 자연인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공적인 성격을 띤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은 죽기 직전부터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조선시대의 피라미드식 신분관계에서 최고 정점에 위치한 국왕은 해와 달로 비유될 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의 장례를 치르는 데 들어가는 인력과 물력은 헤아릴 수 없이 막대했고, 따라서 이를 기록한 문헌 또한 다른 의례에 비해 적잖은 분량이었다. 이 책은 국왕의 장례를 정조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날짜별로 구체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또한 이제는 쓰이지 않는 생소한 국장 관련 용어를 일일이 풀이해 독자들이 알기 쉽게 전달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책을 통해 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도 신분이 있다
1부에서는 ‘조선 왕실의 국장 형성과 국장 관련 문헌’을 폭넓게 다룬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이지만, ‘누구’의 죽음인가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나 그 처리가 달라지기도 한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기에 신분에 따라 ‘죽었다’는 표현부터 달리했다. 『예기』 「곡례」편에 따르면,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사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칭했다. 뿐만 아니라 국왕이나 왕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세자빈·후궁·대원군·공주 등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 했다. 오늘날에도 국가 차원의 장례를 ‘국장’ ‘국민장’이라 부르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장례가 ‘국장’,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국민장’으로 치러져 이 용어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국왕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왕 역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이를 직접 칭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묘호를 칭하거나 시호, 국왕이 거처하던 궁이나 혼전명 등으로 불렀으며, 그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는 ‘대행大行’(큰 덕행이 있기에 큰 이름을 받는다)이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태정태세문단세……’ 하고 외우는 게 바로 묘호다. 조선시대에 칭호는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특히 국왕에게 자신이 어떻게 불리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조선의 국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은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 순으로 오례 체제를 갖추었다. 이 가운데 사망한 국왕이나 왕후를 애도하는 상례인 ‘흉례’는 가장 까다로울 뿐 아니라 규모도 방대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대에는 여러 국가 전례서를 편찬하고 집대성했는데, 국왕과 왕후의 국장 절차에 더해 세자와 세자빈의 예장 절차까지 기록하는 등 왕실의 상장 의례를 확대·재정비했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경과를 그림과 함께 기록한 일종의 보고서다. 특히 흉례 관련 의궤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곧 국왕의 장례식에 상당한 물량이 투입되고 엄숙한 의식이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장례가 그토록 엄중하게 치러진 것일까?
유교문화권의 삼강오륜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효’와 ‘충’이다. 공자의 유교 경전 『논어』에서는 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살아 계시면 예로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 장사지내며, 예로 제사지낸다.” 이렇듯 살아생전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효를 다하는 것이 상례와 제례다. 그러나 지나친 슬픔을 막기 위해 상례 기간은 3년으로 제한했으며, 왕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부모의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그리하여 왕위 승계는 대개 국상 중에 이뤄졌다. 국왕의 병환이 위독해지면 국왕이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다는 ‘전위유교’를 작성했고, 이러한 절차를 통해 공식적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당시 조선은 천자국인 중국 황제로부터 국왕으로 인정받는 절차 또한 거쳐야 했다.
그렇다면 중국 황실의 국장은 어땠을까? 『진서』 「예지」에서 최초로 볼 수 있는 오례에 대한 기록은 이후 국가 의례의 모델이 되는 『개원례』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참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 황실의 기록 중 주목할 만한 점은 당나라 이후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국장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흉한 일은 신하들이 입에 올리면 안 된다고 여겨 기록 자체를 없앴던 것이며, 따라서 구체적인 국장 절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고려는 국가 장례인 ‘국휼’에 대한 의식을 제정하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나라에 큰 변고가 있으면 모두 임시로 고전을 참고하고 전례를 인용해 일을 치렀으며, 일이 끝난 뒤에는 꺼리고 전하지 않아 역사에 나타난 것은 다만 대체적인 것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고려 역시 국장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부묘’를 거행했다는 점, 또 공후 이하 문무 관리들의 상사에서 소상, 대상, 담제를 지내고 혼당이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 왕실의 삼년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가묘가 없는 까닭에 사당에 신주를 봉안하는 절차는 실행하지 못했던 듯하다. 이후 조선 왕실은 고려에서 이어진 불교 의례를 조금씩 떨치고 국장에서 유교적 예제를 실천해나갔다. 그리고 정조의 국장이 행해졌던 19세기 초에는 유교적 예제에 따라 상을 치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정조의 국장은 어떤 문헌을 근거로 치러졌는가
조선에서 오례가 처음으로 정리된 최초의 국가 전례서 『세종실록오례』부터 1800년 정조 국장의 근거가 된 국가 전례서까지 살펴보면 조선시대 국장의 변화 과정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세종실록오례』는 길·가·빈·군·흉(례)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 내용은 크게 서례와 의식으로 나뉘는데, 서례는 각 절차를 행할 때 갖추어야 할 제도나 규례, 참고 사항 등을 기록한 것이며, 의식은 행사의 구체적인 절차를 시간 순서에 따라 설명한 것으로 ‘의주’를 말한다. 이렇듯 『세종실록오례』는 오례의 서례와 의식을 분리시키지 않고 묶어서 기술했다. 그중 흉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흉례서례는 상복喪服, 명기明器, 복완服玩, 거여車輿, 길장吉仗, 흉장凶仗, 집사관執事官 등의 항목에 대한 설명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1474년, 『세종실록오례』를 바탕으로 『국조오례의』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는 고려의 유습을 떨쳐내고 제후국에 걸맞은 국가 전례서로 자리잡았다. 『국조오례의』에서는 서례와 의주를 묶지 않고 분리시켜 편집했다. 각 항목은 『세종실록오례』보다 더 세밀해졌고, 내용 역시 훨씬 다양했다. 염빈도설과 신주도설 이하의 항목들이 추가되기도 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국가 전례서인 만큼 ‘의주’에는 유교적 예제만 적혀 있었는데, 기록만 그러했을 뿐 실제로는 불교적 의례를 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은 중종대에 이르러 완전히 타파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조선 사회가 임병양란에 휘말리면서 수정·보완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영조는 1744년 새롭게 제정된 국가 전례를 모두 담아 『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바뀌거나 추가된 것을 정리한 속편으로, 기존 책을 보완하는 성격이 강했다. 이렇듯 계속해서 추가되고 수정된 국가 전례서들은 주로 국왕과 관련된 의주만 다뤘으며, 왕후에 관한 내용은 간략하게 주석으로만 들어갔다. 한편 영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로지 흉례만을 위한 별도의 국가 전례서를 편찬했다.
1751년, 영조는 세자빈과 세손의 상을 계기로 세자빈과 세손의 흉례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여 『국조상례보편』(1752년본)을 새롭게 편찬했다. 이 책은 조목마다 조목명, 의주, 필요한 도구, 도설 등을 차례로 실어 각 조목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몇 년 뒤 다시 총 6권6책으로 새롭게 선보인 1758년본 『국조상례보편』이 나왔다. 이로써 비로소 국왕과 왕후, 세자와 세자빈의 상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정조의 국장 역시 이 1758년본을 바탕으로 하여 이전의 등록과 의궤를 참조해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3년이나 지속되었으며 이처럼 큰 국가적 행사인 국장은 어느 기관에서 누가 담당해 진행했을까? 국상이 발생하면 임시 기구인 ‘도감’을 먼저 설치했다. 국장도감은 국장에 대한 모든 일을 담당했다. 『정조국장도감의궤』에는 정조가 승하한 뒤 신주를 봉안하기까지의 국장에 관한 온갖 일이 다 기록되어 있다. 국장도감 담당자는 크게 제조, 도청, 낭청, 감조관으로 구성되었고, 국장도감의 하부 기관으로는 도청, 우주소, 지석소, 별공작 등을 두었다. 다음으로 산릉도감은 왕릉 조성과 관련된 모든 일을 맡은 임시 기관이며, 부묘도감은 혼전에 봉안되어 있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는 일을 담당한 기관이다. 두 기관 모두 많은 의궤가 전해진다.
이어지는 제2부에서는 ‘정조의 국장 절차’를 세세히 날짜별로 살펴본다. 반차도도 함께 실려 있어 이를 통해 당시 국장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정조가 죽기 직전부터 시작해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어 상장례를 마칠 때까지 3년 동안 진행된 모든 과정을 정리한 책이다. 조선의 여러 국왕 가운데 특히 정조의 죽음은 독살설이 제기되는 등 학계에서도 그를 둘러싼 논란이 없지 않다. 이 책은 국가 의례라는 공적인 절차를 통해 그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조선시대 피라미드식 신분관계에서 최고 정점에 위치한 국왕은 해와 달로 비유될 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의 장례를 치르는 데 들어가는 인력과 물력의 투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고, 이는 곧 그것을 기록한 문헌 또한 다른 의례에 비해 적잖은 분량이었음을 뜻했다.
조선의 국가 의례 중 국왕의 죽음과 관련된 의례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다른 의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책의 특징은 국왕의 국장이라는 일반적인 패턴에 정조라는 인물을 대입시켜 날짜별로 진행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이다. 국왕이라는 존재는 한 사람의 자연인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공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은 죽기 직전부터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이 책을 통해 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