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한 시적 언어의 멜로디 속에 흩뿌려진
지극히 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삶의 파편
흑인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작가인 토니 모리슨의 소설 『술라』가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토니 모리슨의 두번째 소설인 『술라』는 1973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르며 호평을 이끌어낸,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술라』에서 토니 모리슨은 192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오하이오 주 메달리언 보텀 흑인들의 삶을 단짝 친구인 술라와 넬, 두 여성의 삶과 사랑, 우정을 중심으로 그려냈다. 토니 모리슨만의 유려한 시적 언어가 자아내는 리드미컬한 선율 위로, 신화적 상상력 위에 세워진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뉴욕 타임스>는 “엄청나게 아름답다. 대단히,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하다”라고 호평했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는 “토니 모리슨은 그저 중요한 현대 소설가가 아니라 미국 문학의 권위자”라고 치켜세웠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
가장 작은 것들의 죽음에 흘리는 눈물
그들이 사는 언덕배기 땅의 이름은 ‘보텀Bottom’이다. 노예 시절, 백인인 그들의 주인들은 어려운 일을 끝내면 자유와 저지대bottom 땅 한 뙈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땅을 주기가 아까웠던 백인들은 교묘한 술수를 부렸다. 미안한데 골짜기 땅을 주어야겠다고 말한 것이다. 놀란 노예들은 골짜기가 저지대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아이고, 아니야! 저 언덕 보이지? 저기가 저지대야.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지.”
“하지만 저기는 언덕 위인데요.” 노예가 말했다.
“우리한테야 높은 곳이지.” 주인이 대꾸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려다보실 때는 저기가 바닥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보텀이라고 부르는 거야. 천국의 바닥이란 뜻이지. 그러니까 최고 좋은 땅이다 이 말이야.” _본문 16쪽
주인의 설명에 노예들은 언덕배기 땅 ‘보텀’을 달라고 졸랐고, 백인들은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위에 있는 보텀 땅을 주고 아래쪽의 비옥한 골짜기 땅을 지킨 것이다. 도입부의 이 흥미로운 역전逆轉은 좋은good 것과 나쁜evil 것이 사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애초에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술라』의 한 주제 의식이 잉태되는 지점이다.
그곳 보텀에서, 흙이 흘러내리고 씨앗이 씻겨나가고 겨울에는 내내 바람이 몰아치는 ‘천국의 바닥’에서, 흑인들은 백인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에 겨우 위안을 삼으며 살아나갔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살아지는 인생. 보텀에는 그런 인생들이 있었다. 전쟁의 기억을 떨치지 못해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퇴역군인 섀드랙은 ‘전국 자살일’을 만들고 매해 1월 셋째 날 동네방네 종을 울리며 다녔다. 남편이 떠나버려 살 길이 막막했던 에바는 다리 하나를 자른 값으로 세 아이를 키워냈다. 더이상 노예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발에 걷어차이고도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구차한 미소를 지어야 했고, 팔이 가느다란 백인 소년에게 일자리를 빼앗겨야 했다. 보텀에는 제 자식의 몸에 불을 붙여야만 했던 사람이 있었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오로지 섹스로 공허를 달래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유와 방종, 윤리와 비윤리의 모호한 경계에서
팽팽하게 힘을 겨루는 너와 나, 나와 나
그리고 그곳 보텀에는 두 소녀 술라와 넬이 있었다. 꿈속에서 이미 만난 사이인 것처럼 처음부터 친밀함을 느낀 그녀들은 서로를 통해 성장했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랐지만, 오히려 그래서,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겼다. 전혀 다르면서도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철저히 외로웠던 두 소녀는 서로에게 거의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동네 아이 치킨 리틀을 죽게 한 사고 이후 조금씩, 그리고 넬이 결혼을 하고 술라는 도시로 떠나면서부터는 더더욱, 둘의 삶은 각기 다른 궤도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10년 후 술라가 울새떼와 함께 보텀에 돌아왔다. 영화배우처럼 당돌하게 차려입고 나타난 그녀는 보텀에 어울리지 않았다. 술라는 할머니 에바를 양로원에 보내고 마을의 여러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등,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보텀 사람들은 술라가 악마라는 확신에 차서 그들끼리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술라를 향한 증오는 지난한 그들 삶에 묘한 활력소가 되었다. 술라의 한쪽 눈꺼풀 위 모반, 한때 장미 모양으로 보이던 그것은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어느 날 넬은 술라가 자기 남편 주드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단짝이었던 친구에게 자기 삶의 뿌리와도 같은 대상인 남편을 빼앗긴 넬. 그녀가 누군가를 보조하는 존재로 살던 자기 인생의 참 실상을 마주하게 되는 건 그로부터도 아주 긴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오, 사람들은 날 사랑해줄 거야.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를 사랑해줄 거라고.”
자칫 술라와 넬의 이야기를 권선징악의 이분법적 알레고리로 읽기 십상이지만, 사실 토니 모리슨은 『술라』 속 그 어떤 인물도 도덕적 잣대로 평가할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오히려 선과 악, 자유와 방종, 윤리와 비윤리의 경계의 모호함에 대해 역설한다. 넬에게 던지는 에바의 말, “완전히 똑같아. 너희 둘 다. 너희 둘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었어”(본문 242쪽)가 그 방증이다. 책에 수록된 ‘작가의 말’ 또한 그렇게 읽힌다.
흑인 작가들의 가치는 자신들의 인종 또는 등장인물의 인종 탓에 ‘정치적으로만’ 분석당하는 운명에 처했다. 필리스 휘틀리가 “하늘은 파랗다”고 쓰면, ‘흑인 노예 여성에게 파란 하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비평적 질문이 나온다. (…) 1970년 『술라』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내 처녀작 『가장 푸른 눈』에 대해 흑백 양쪽의 비평가들이 쓴 글을 읽고 울적해지는 경험을 했다. (…) 그 소설이 좋다면 그것은 어떤 유의 정치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나쁘다면 그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판단은 ‘흑인들은 이렇다—혹은 이렇지 않다’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나 역시 그에 똑같이 대응하여, 그런 관점들의 천박함은 무시해버리고,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더렵혀진 풍경에 이야기의 뿌리를 내렸다. (…) 등장인물이 얼마나 ‘도덕적’인가로 가치를 따지는 이들에 의해 밀려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의 유일한 선택은 나 자신의 감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었다. 나 자신의 관심사, 질문, 도전 들을 더 멀리까지 탐구하는 것이었다. (본문 252∼253쪽)
백인 남성 작가 위주의 문학계에서 토니 모리슨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작품들이 철저히 ‘정치적으로’ 평가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 백인에 대해서는 언제 쓸 예정이냐는 질문 역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계속해서 흑인들의 삶에 대해 쓴다는 것은 부담스러울 법한 일이기도 했건만 그녀는 기꺼이, 오히려 더 자유롭고 당당하게 흑인과 흑인 여성에 대해 썼다. 죽어가는 술라가 남긴 말 “오, 사람들은 날 사랑해줄 거야.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를 사랑해줄 거라고.”(208∼209쪽)는 어쩌면 토니 모리슨 본인의 말일지도 모른다.
‘정치적’ 작가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토니 모리슨이 누군가의 대변자로서 무엇에 대해 항변하거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옳거나 그른 것 중 어느 하나를 택해서 쓰고 그 이야기를 자신의 무기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자신이 읽고 싶은 것에 대해 썼다. 그것이 그녀의 이야기들이 그저 허망한 분노의 표출, 과거에 사로잡힌 진부한 기록에 머물지 않고 오랜 세월 빛나는 이유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화려하고 아름답다. 대단히,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하다. 사랑과 격정의 아우성이 가혹하고 격렬할 뿐 아니라 쾌활하고 익살스럽다. _뉴욕 타임스
단연 훌륭하다! 죽음, 성, 우정, 결핍의 비밀, 그 정수를 탁월하게 그려냈다. _뉴스위크
황홀하다. 강렬하다. _시카고 데일리 뉴스
토니 모리슨은 어머니이자 전사, 마녀이자 이야기꾼으로서 궁핍하고 소외된 교외의 흑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여성적 자질의 신화적 힘에 천착한다. _타임스
어디에서든 애서가들이 돌려가며 읽어야 할 소설. _로스앤젤레스 프리 프레스
흑인 영가처럼 애절하고 꽉 쥔 주먹처럼 분노에 차 있다. 더없이 맑고 울림 있는 언어로 당신을 아프게 할 것이다. _플레이보이
■ 책 속에서
“이게 나야.” 넬은 속삭였다. “나.”
넬은 자기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전혀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게 나야. 난 그들의 딸이 아니야. 나는 넬이 아니야. 나는 나야. 나.”_본문 47쪽
어떤 감정들은 견뎌내야만 했으니까. 그들은 하고픈 말이 넘쳤고 말해야 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했다. 슬픔 혹은 황홀함이 넘치는 개울을 흔들어야 했기 때문에 몸을 흔들었다. 그 모든 삶과 죽음이 저 작은 관 속에 갇혔다는 생각에 춤을 추고 고함을 질렀다. 신의 뜻에 반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신의 손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 닿는 것뿐이라는 자기들의 신념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_본문 99쪽
“이봐, 여자들이 원하는 건 자기들의 불행뿐이야. 너를 위해 죽어달라고 구슬려봐. 그러면 평생 네 것이 될 거야.” _본문 123쪽
사람들은 의사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렇게 해준 적이 없었다. 죽음이 우연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삶은 우연일 수 있어도 죽음은 고의적이었다. 자연이 삐딱하다고도 믿지 않았다. 단지 불편할 따름이었다. 역병과 가뭄은 봄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유가 응고될 수 있다면, 울새들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신은 아신다. 악의 목적은 그것을 견디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홍수, 백인들, 홍역, 기근과 무지를 견디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분노는 잘 알았지만 절망은 몰랐다. 자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죄인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들이 할 법한 일이 아니었다. _본문 130∼131쪽
“지옥의 진짜 끔찍한 점은 그것이 영원하다는 점이야.” 술라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어떤 것이든 언제까지나 영원히 해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했다. _본문 155쪽
남자들은 떠나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죽는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행조차 지속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불행마저 그녀를 떠나갈 것이다. 바닥에 몸을 둥글게 말고 몸부림치게 만들고 그녀를 후려치는 이 지극한 슬픔도 사라질 것이다. 그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_본문 156쪽
폭풍처럼 거칠게 휘몰아치는 그 모든 환희의 한가운데에 슬픔의 눈이 있었다. 그 침묵의 한가운데에는 영원이 아니라 시간의 죽음이 있었고, 너무나 심오해 단어 자체가 그 의미를 잃는 고독이 있었다. 고독은 다른 사람의 부재를 가정하는 것인데, 그 절망적인 영역에서 그녀가 발견한 고독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을 인정한 적이 없었던 터였다. 그때 그녀는 울었다. 가장 작은 것들의 죽음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_본문 178쪽
“ (…) 얘, 내 마음은 내가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도. 무슨 말이냐면, 나는 내 거야.”
“외롭잖아, 그렇지 않니?”
“그렇지. 하지만 내 외로움도 내 것이야. 지금 네 외로움은 누군가 딴사람 거고. 딴사람이 만들어서 너에게 건네준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니? 중고 외로움이지.” _본문 205쪽
“(…) 누군가에게 잘해준다는 건 누군가에게 비열하게 구는 거랑 똑같아. 위험하지. 그래봤자 아무것도 얻지 못해.” _본문 207쪽
◈ 발행일: 2015년 9월 25일
◈ 쪽수: 268쪽
◈ 판형: 128*188(양장) | 두께 20mm
◈ 가격: 13,000원
◈ ISBN: 978-89-546-3762-6 03840
◈ 담당: 해외문학4팀 홍유진 belovedkong@munhak.com 031-955-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