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와 그 호흡을 같이해온 우리 시대의 민중판화가 이철수. “동양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정신의 언어”(시인·미술평론가 조정권)와 단아한 화풍으로 일상의 깨달음을 새겨온 그가 ‘원불교 100주년’을 맞아 대종경 연작판화집 『네가 그 봄꽃 소식 해라』를 펴냈다. 3년여간 원불교 경전을 수없이 곱씹으며, 그 뜻을 목판에 새기고 종이에 찍어내 채색한 결과물이 총 203점의 판화로 태어난 것이다. 애당초 특정 종교를 선전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당대의 화두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생의 정신과 원불교의 사상이 만나서 공명한 깊은 사유의 결실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원불교의 개교표어는 물질의 격류를 따라가지 못한 인간의 정신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지금, 현대인들이 한번쯤 마음으로 풀어가보아야 할 귀중한 질문을 던진다.
이철수의 칼끝에서 새로 피어난 대종경,
맑은 진리의 길을 비추다
원불교의 교리는 학식과 경험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기록한 ‘대종경’은 여타의 어려운 경전과 달리, 친숙한 생활언어로 풀어낸 진리들로 가득하다. 대종경을 관통하는 법문은 “천하 사람이 다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큰 도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도라” 하는 구절에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드넓은 시야에,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도야말로 ‘참도’라는 깨달음을 더했다. 뜬구름 잡는 말 없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 경전은 무릎을 한껏 낮춰, 일상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다정히 눈 맞추며 친히 행하여 가르친다. 그 앞에서 특정 종교의 경계는 이미 눈 녹듯 사라져 있다. 평등하게 만물을 비추어 어루만지는 선禪의 빛살은 이철수 특유의 산뜻하고 힘있는 선線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판화라는 형식 또한 안성맞춤이다. 원판 하나로 똑같은 작품을 몇 번이고 찍어낼 수 있는 판화는 ‘써도 남고 써도 남는’ 무량無量한 지혜에 가장 가까운 예술이 아닐까. 한 사람이 공력을 들여 완성한 그림 한 점이 무한한 수의 사람들에게 오롯이 닿아, 각자의 마음속에 무한한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주므로. 더욱이 이철수는 오로지 칼을 쟁기 삼아 목판 경작耕作에 매진하며, 구도하듯이 평생 목판화로 용맹정진해왔다. 그의 작품활동이 수도자의 고행과 겹쳐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로 인해 목판화가 존재감을 얻었고, 그로 인해 목판화의 맛과 멋이 비로소 대중화되었다. 그는 ‘칼을 든 구도자’다.
우리의 마음밭에 고운 봄꽃 하나 피워올리기를
『네가 그 봄꽃 소식 해라』에는 별지로 마련된 판화 3점과 원불교 정전正典및 대종경 속 법문을 구현해낸 판화 200점이 수록되어 있다. 광고인이자 작가인 박웅현의 해설대로, 이철수 판화의 가장 큰 매력은 “쾌도난마”, 촌철살인의 아찔함에 있다. 단아하고 담백한 화풍, 여백의 여운에 무심히 빠져 있다보면 어느새 뒷머리가 선뜩해지며 무언가를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철수 판화 속 선문답식 글귀들은 자주 느낌표로 마무리되곤 하는데, 그 올곧은 직선을 보고 있노라면 제 마음속에도 단단하고 굳은 심이 박히는 듯하다. 그러다 어느 한 작품을 마주하면 머리를 맑히는 충격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바로 <좌선>(39쪽)이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사용하지 않고도 몇 가닥의 선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경지. 마치 단원 김홍도의 걸작<염불서승>을 목판으로 껴안으며 승화시킨 듯한 이 작품은 이철수가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구현한 조형적인 절창 중 하나다.
판화 속 글귀들은 일일이 영문으로 번역하여 해당 작품 옆에 배치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간결한 판화에 담긴 깊은 의미를 두루 전하기 위함이다. 판화집 전체를 아우를 해설도 대종경의 특성을 좇아가도록 고심하여 실었다. 박웅현은 해설에서 미술이나 종교에 대한 전문지식을 걷어내고 일반 독자의 눈높이로 이 책을 읽는다. 덕분에 우리는 이 판화집을 부담 없이 따라 읽고 공감하며, 이철수의 판화세계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판화를 접한 뒤, 관련 경전 구절을 찾아 읽고 싶어질 독자들을 위해서 판화가 담고 있는 경전 부분 또한 발췌하여 도서의 말미에 덧붙였다. 이 책 한 권이 우리의 마음공부에 온전한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이철수 선생의 뜻이다. 판화집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대종경은 따로 단행본으로 묶여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
사私가 없기에 평등하게 불어주는 봄바람처럼, 이철수가 전하는 일원의 진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마음 구석구석에 속속들이 닿는다. 이제 우리가 그 ‘봄꽃 소식’이 될 차례다. 아직은 결이 거친 그 마음밭에 고운 봄꽃 하나 피워올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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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농사꾼으로 살면서 그려내는 독창적인 판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철수 화백이 이 땅의 자생종교 원불교의 100년을 맞아 ‘대종경 판화연작’을 만들었다. 본인으로서도 크게 복을 짓는 일이려니와, 우리 시대의 대중들이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에 한결 가까워지고 교단 또한 유·불·선과 그리스도교 및 현대의 과학문명까지 아우를 새 종교로서 그 사명을 더욱 충실히 이행해가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_백낙청(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누군가 책 읽기를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여행은 배움이 있는 여행이었다. 여행의 여운을 갈무리할 겸 전체 여정에서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를 한번 생각해봤다. 나의 선택은 <좌선>.(39쪽) 언젠가 봤던 선생의 다른 판화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와 같은 쾌감이 있다. 모두들 좌선 좌선 하는데 바위만한 좌선 어디 있겠는가? 비바람에, 세월에 흔들리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 무릇 좌선하는 자세는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 담백한 시선이 좋았다. (…) 다시 이십여 년 전의 그 단어가 떠올랐다. 족탈불급. 고마운 일이다. 맑게 사는 선생과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 수시로 자극이 되어주는 인생 선배가 곁에 있다는 사실. _박웅현, 「읽었으면 느끼고, 느꼈다면 행하라」
세상은 미혹하는 물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새로운 발명품들도 많지요. 생명의 근본도 흔들어놓는 세상입니다. 질적 변화를 실감하는 시대를 사는 게 분명한데, 어지럽습니다. 어리둥절한 채 변화의 회오리 가운데 서 있습니다. 변화가 우리 손에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래저래 소외되는 걸 겁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씀을 아시는지요? 우리는 지금 ‘물질의 개벽’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마도! 분명히! 우리는 이미 개벽을 살고 있습니다. 현실의 혼돈과 위기가 물질의 ‘큰 변화’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을 정신의 ‘큰 변화’가 당연하고 급하다는 말입니다. (…) 전대미문, 전인미답의 물질개벽 속에서 정신의 무한도전이 될 ‘마음개벽’을 시대의 화두로 삼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연작판화를 새겼습니다. 지혜가 어리석은 사람의 뒤를 밀어주신 덕분입니다. 이제 내어놓습니다. 대종경의 지혜는 크고 깊고, 제가 길어올린 것은 작고 얕습니다. 지혜의 큰 바다는 따로 만나셔야 합니다. _이철수, 「일원의 배를 타고 지혜의 바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