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 수상 작가 게리 스나이더가 전하는
인간과 자연에 관한 아름다운 에세이
캘리포니아 원시림에 들어가 스스로 야생의 삶의 실천하며 시를 써온 게리 스나이더의 산문집 『야생의 실천』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자 동양의 불교와 한시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무수한 수행 경험과 깊이 있는 통찰을 통해 얻게 된 자연과 야생성의 가치를 잔잔한 목소리로 전한다. 스나이더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서양철학의 맹목적이고 이분법적인 대치 구도를 벗어나, 살아 있는 모든 생명 속에 깃든 본질적인 아름다운을 찾아낸다. 자연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 모두가 희망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새로운 삶의 실천에 관한 이야기다.
야생의 현자, 게리 스나이더
현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자연시인. 사람들은 스나이더를 이렇게 표현한다. 야성과 자유의 의미를 찾아 평생을 매진해온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얼마 후 북서태평양 연안으로 작은 농장으로 이주했다. 어릴 적부터 눈 덮인 산봉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사로잡혀 홀로 여러 산들을 등반하며 자연스레 거친 자연의 풍광에 동화되었다.
여러 대학을 거치며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벌목꾼, 배수시설 노동자, 산림관리원 등 꾸준히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는 1956년 일본으로 떠나 교토의 한 임제종 사찰에 머물며 선(禪) 수행을 시작한다. 스나이더는 일본에서 승려로 살기로 결심했고 얼마 동안은 그것이 그의 인생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수행을 거듭하면서 외적인 형식이 내적인 수행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삭발과 장삼이 그 당시 미국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독특한 이력 덕택에, 잭 케루악은 스나이더를 비트문학의 고전이 된 소설 『달마의 후예들』의 주인공 ‘재피 라이더’의 본보기로 삼기도 했다.
스나이더는 자신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성스러운 ‘거북섬(인디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의 모양을 빗대어 붙인 이름)’의 일원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영적인 수행에 대해 어릴 적부터 친근함을 느꼈으며, 아울러 자연과 친해지게 되었다.
이후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우거진 시에라네바다 구릉지에 손수 집을 짓고 가족과 함께 정착한 스나이더는, 85세의 고령이 된 현재까지도 환경 보호와 세계 평화를 위한 캠페인과 강연을 하는 등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인간에 대한 명상, 모든 생명을 위한 기도
오늘날 사람들은 대개 건물 안에서 천장에 가려진 하늘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고, 자동차를 타고 포장된 도로로만 다니며 흙 한 번 밟지 않고 살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살아 있는 동물의 일부였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어떤 풀 한 포기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이 인공(人工)인 시대. 안락한 삶을 향유하게 해주는 문명에서 살고 있지만, 그만큼 자연과 유리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계속 심화되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을 점점 더 크게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나이더는 이 팽창 일변도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인류가 자연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과정을 추적해보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작업들과는 다르게,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야생을 우리가 잃어가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이런 회의(懷疑)는 그로 하여금 불교와 신화에 가닿게 했으며, 하나의 궁극적인 ‘야생 체계’를 사유하게 했다.
그는 자연이 가진 고유의 장소성과 그곳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인류의 언어, 노래, 춤과 같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나아간다. 이는 인간이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전 생명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단지 자연과의 대결이라는 지엽적인 측면에 머물지 않고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를 동등하게 여기며 전 지구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좀더 통합적이고 신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머니로서의 지구가 우리에게 베푸는 거대한 사랑을 인식하고, 때로는 냉혹하면서도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진정한 야생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자연과의 조화이다. 우리는 그의 말처럼 좀더 섬세하게 세계와 조화하려는 신중한 노력을 일관되게,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스나이더가 말하는 ‘실천(practice)’의 의미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그 세련된 사회조직이 가진 견고한 질서의 매력적인 복잡성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 이전의 까마득한 고대부터 우리에게 전해내려왔던, 지금은 잊힌 수많은 교훈들과 삶의 기술들을 회복하자는 이야기다. 이미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냈으며 앞으로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안의 야생성에 귀기울일 때, 인류는 또 한번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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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야성적이고 자유로운.’ 이 미국적인 꿈의 표현은 이제 그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긴 갈기를 날리며 초원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말, 높은 곳에서 울음소리를 떨구며 V자형으로 떼지어 날아가는 캐나다 기러기, 머리 위 참나무에서 재잘거리며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다니는 다람쥐. 그것은 또한 할리 데이비슨의 광고 장면 같기도 합니다.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위의 두 단어는 이제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눈요기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28쪽)
우리는 이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우리의 후손도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이곳에서 살 것이라는 사실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땅의 위대한 오랜 역사, 그 야성에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지키고, 그리고 이곳에 있는 다양한 생물종과 건강이 손상되지 않은 미래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시아가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온 장소라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90~91쪽)
‘책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은유는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세계는 기호들로 충만할 수 있겠지만 집주본 고문서를 가진 고정 불변의 텍스트는 아닙니다. 책에 의지하는 모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역사 기록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가정과 더불어 여행합니다. 문자, 기술, 제도는 확실히 사람에게 우위를 제공합니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스스로 더 우월하다고 여겨왔습니다. 또 성서를 가진 사람들은 토속 종교의 신화와 의식이 아무리 풍부한 것이라 해도 그에 상관없이 그것을 가진 사람들보다 자신들을 우위에 놓았습니다.(144쪽)
신대륙 북쪽 지방은 유럽의 과거로 나 있는 창입니다. 켈트족의 신성한 연어, 북유럽 문학에 나오는 갈색곰, 지중해의 돌고래, 수렵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곰 춤, 헤라클레스가 몸에 걸쳤던 사자 가죽이 인간들이 가까이 살았던 야생계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문학과 상상 속에 이 경이로운 생물들이 존속하고 있음은 그들이 우리의 건강한 영혼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152쪽)
현대인은 사냥할 필요가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다양해서 고기를 피하기가 쉽습니다. 미국 시장에 공급할 쇠고기를 늘리기 위해 목장을 만들려고 열대림이 잘려나갑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겉으로는 더 편안할 수 있고 분명히 더 무지할 수도 있습니다.(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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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명이 미개하고 무질서하다고 부르는 야생은, 실제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냉혹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자유롭다.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식물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삶, 폭우, 폭풍, 고요한 봄날의 아침, 그리고 어둠 속에서 반원을 그리며 쏜살같이 흘러가는 유성, 이 모든 것은 야생의 실제 세계이며, 우리 인간은 그 세계에 속해 있다. _‘지은이 서문’에서
동양의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수도승으로 한겨울의 습한 추위와 한여름의 습한 더위의 긴 세월을 견뎌내며 인간과 생명의 궁극을 탐구하고, 그런 후 깨달음에 헌신하기 위해 버리고 떠났던 세계로 다시 진실하게 돌아온 사람, 가장 깊은 숲속 오솔길을 걸어보고, 구름 덮인 드넓은 초원에 핀 들꽃을 사랑하고, 수많은 강의 상류와 지류를 건너고, 북극지대의 마을과 마을을 찾아가본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생명의 오의를 싱싱한 입김으로 전해준다. _‘옮긴이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