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아직 낯선 이름 나가노 마유미는 1988년 데뷔 이래 독특한 작품세계와 문체로 마니아적인 독자층을 형성한 작가다. 환상소설, 아동소설, SF, 순수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80편이 넘는 소설을 발표하며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즈미 교카 문학상, 노마 문예상 등의 문학상을 받았다. 『소년 앨리스』는 일본 분게이슌주 출판사의 신인상인 문예상을 수상한 데뷔작으로, 출간 후 삼십 년이 가까워오는 현재까지 여러 판본으로 선보이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이 떠오르는 투명하고도 환상적인 모험담이 청량한 밤하늘을 수놓듯 펼쳐진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밤의 세계가 선사하는 남빛 메르헨
섬세한 미학과 독창적인 변주가 빛나는 일본 환상소설의 명작!
‘수련이 피어나는 소리가 나는 달밤’, 단짝친구 아리스와 미쓰바치는 교실에 두고 온 책을 찾으러 한밤의 학교를 찾는다. 하눌타리 안에 반딧불이별을 넣어 불을 밝히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던 중 아무도 없어야 할 과학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학교 안마당에 있는 분수에 관해서입니다.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압니까?” “네, 선생님. 그곳은 여름과 가을이 엇갈려 지나가는 현관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문답에 귀를 기울이던 아리스는 엉겁결에 그들 틈에 섞여 비밀스러운 수업에 동참한다. 양철 판과 조개껍데기로 밤하늘의 벨벳 천막에 별과 달을 만들어 달고, 이윽고 표본상자의 알 속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우리는 원래는 새지만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밤에는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거든. (……) 하지만 그것도 날이 밝기 전까지야. 날이 밝으면 원래 있던 알로 돌아가야 해.” 여름의 끝자락, 알아서는 안 되는 세계의 비밀을 접하고 함정 같은 모험에 빠져버린 아리스는 친구와 함께 무사히 귀로에 오를 수 있을까?
『소년 앨리스』는 고전의 변주와 독자적인 미학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섬세하고 서정적인 자연배경 묘사에서는 일본의 전설적인 아동문학가 미야자와 겐지의 영향이 짙게 배어나며, 주인공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의 얼개와 몇몇 모티프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또한 나가노 마유미는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고어와 한자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평소에는 좀처럼 접할 일이 없는 생소한 식물과 광물의 이름 등이 특유의 문체와 어우러져 신비롭고도 탐미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꺼운 도감이나 백과사전의 책장을 벗어나 소설 속에서 새 생명을 얻은 이 단어들은 부록 ‘소년소녀를 위한 『소년 앨리스』 사전’으로 다시 정리되어 짧고도 인상적인 이야기의 여운을 곱씹게 한다. 이슬이 내리고 꽃잎이 피어나는 등의 소리 없는 밤 풍경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도 담백하게 그려내는 문장력도 나가노 마유미만의 매력이다.
한밤의 학교라는 금단의 영역으로 숨어든 아리스와 미쓰바치, 그리고 둘을 따라온 미쓰바치의 강아지 미미마루가 하룻밤 사이 겪는 꿈결 같은 모험담은 순수한 우정을 나누는 소년들의 성장 이야기로도 읽힌다. 학교 안마당의 분수 앞에서 미쓰바치가 목격하는 여름의 끝은 곧 사춘기의 종막을 뜻하고, 아리스가 인간과 새의 세계를 오가며 느끼는 혼란은 그 경계에서 겪는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교문 안으로 한 발 내디딘 두 소년이 만난 미지의 세계는 누구나 한 번쯤 맞닥뜨렸을 불가사의한 성장의 기로를 상기시키며 보편적인 애수를 자아낸다. 덕분에 『소년 앨리스』는 세대를 거듭해 사랑받는 명작으로 손꼽히며 지금도 많은 이들을 나가노 월드로 끌어들이고 있다.
캄캄한 학교 안에 넘쳐흐르는 감정들. 문장의 어느 부분을 잘라내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가노 마유미는 소년들의 우정과 형제애 등을 실로 아름답고 아련하게,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문체로 그림을 그리듯 표현해낸다. _아쿠타가와 나오(칼럼니스트)
『소년 앨리스』는 의미에 묶여 있는 일상세계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소년들은 환상의 세계로 날아오르고 글자는 기표의 굴레를 벗어나 마음껏 영역을 넓힌다. 책장에 자유와 해방의 기운이 넘친다. 그리고 ‘성장’이라는 의미성을 지닌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_다카야마 미쓰루(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