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마주하게 되는 삶의 편린
쓸쓸하면서 감미로운 한 편의 누아르
“내가 사건의 실상을 알려줄 수는 없다. 그 그림자만 보여줄 수 있을 뿐.”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파트릭 모디아노가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발표한 장편소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스탕달의『앙리 브륄라르의 생애』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에서 비롯한 스탕달의 자서전 속 이 구절은 기억과 망각, 정체성이란 주제를 천착해온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관통한다.
1968년 『에투알 광장』으로 등단한 이래 2014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기까지 오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파트릭 모디아노는 특유의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문체로 ‘기억의 예술’을 통해 인간의 불가해한 운명을 환기시키고 독일 점령기 프랑스의 모습을 그려왔다. “우리 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모디아노의 최신작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작가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작가 장 다라간이 사소해 보이는 한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그는 과거의 공간을 집요하게 더듬어가며 자신의 기억과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려 애쓰지만, 서로 맞춰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과 메워지지 않는 공백에 가로막힌다. 육십대가 된 작가 장 다라간의 현재와, 수상쩍은 사람들 틈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던 그의 유년 시절, 첫 소설을 써내려가던 청년 시절 등 세 시점으로 번갈아 서술되는 이 작품은 슬픔을 동반하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쓸쓸하면서 감미로운 한 편의 누아르”(<더 뉴요커>)를 연상케 한다.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먼지가 수북한 다락방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곳에 무엇이 어떤 논리로 정돈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기억의 주인은 그를 과거로 이끌어가는 표지들을 발견하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된다. 흔적들은 완벽히 지워지지 않고 그것들을 다시 알아보기 위해서는 구별하기 힘든 표지들을 해독하고 그들의 관계를 연결하고 의미를 짐작해가며 하나의 사실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결코 확실치 않아 실재했는지 믿을 수 없다. 의혹은 여전히 남는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러한 불확실한 수사로 걸작을 만들었다. _<르 수아르>
현대의 기억과 망각에 대한
파트릭 모디아노의 가없는 수사
작가 장 다라간은 어느 날 오후 집필실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전화를 건 남자는 다라간이 잃어버린 연락처수첩을 돌려주겠다며 그에게 만나자고 한다. 자신을 질 오톨리니라고 소개한 마흔 남짓한 남자는 그보다 젊어 보이는 여자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 그는 다라간에게 수첩을 돌려주며 그 속에 이름이 적힌 기 토르스텔이라는 남자에 대해 묻는다. 사내는 어떤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데, 그 사건에 기 토르스텔이 연루되어 있다며 그에 대해 알려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다라간이 언젠가 수첩에 무심코 적었을 이름, 그의 첫 소설에 등장하기도 한 토르스텔이라는 인물은 다라간의 기억 속에서 이미 까맣게 지워진 후다. 다라간은 그들에게서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오며 모종의 불안을 느낀다. 카페에서의 만남이 있은 뒤로 그들은 다라간의 잠든 기억을 깨우려는 양 그에게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한편 질 오톨리니가 이틀 동안 파리를 떠나 있는 동안, 남자와 함께 왔던 샹탈이라는 여자가 ‘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다라간에게 따로 만나자고 청한다. 샹탈은 질이 경마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며, 기 토르스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서류철을 다라간에게 건넨다. 서류철 안에는 글자가 행간 없이 빽빽하게 타이핑된 종이 뭉치와 일곱 살가량으로 보이는 아이의 증명사진 확대본이 들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다라간은 살인 사건에 관한 짤막한 메모들을 뒤죽박죽 모아둔 듯한 종이 사본들을 읽어내려가다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하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이름을 떠올린다. 아니 아스트랑. 그리고 마침내 다라간은 서류철에 끼어 있던 아이의 사진으로 눈길을 돌린다. 뒷면에 ‘즉석 사진 세 장. 신원 미상 아동. 아니 아스트랑 수색 및 체포. 벤티밀리아 국경 검문소. 1952년 7월 21일 월요일’이라고 쓰여 있는, 자신의 어릴 적 사진으로.
“당신에게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이상한 길을 지나와야 했는지.”
“소설의 시작은 추리소설을 닮았다. (…) 장 다라간은 ‘불확실하고 몽환적인’ 과거로, 현시점의 인디언 서머처럼 유예된 채 남은 과거로 발을 내디딘다. 저항을 해도 한번 시작된 역류를 막을 길은 없다. 과거로, 그 과거를 발판으로 더 먼 과거로 떠나는 일만 남았다. 내면의 추리, 과거의 추리가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추리소설이라 이르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겠다.”
_옮긴이의 말에서
작가는 다라간의 현재와 유년 시절, 청년 시절을 번갈아 서술한다. 두 남녀가 불러일으킨 기억은 그를 1950년대 아니 아스트랑과 함께 살던 생뢰라포레 시절로, 그가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60년대로 이끌어간다. 육십대가 된 소설가는 어릴 적 생뢰라포레에서 머물던 시절로부터 한참 비켜서 있다. 그는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잊어버리려 했다. “여태 고이 파묻혀 있던 슬픔이 마치 불붙은 완연(緩燃)도화선처럼 지난 세월을 타고 서서히 타들어가지나 않을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베어무는 순간 프루스트가 유년 시절을 보낸 마을 콩브레의 풍경을 떠올렸듯, 연락처수첩에 담긴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이, 질이 썼다는 책 속 트랑블레 경마장이라는 단어와 다라간이 과거에 살기도 했던 그레지보당 단지에 있는 질의 집이, 청년 시절 다시 만난 아스트랑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샹탈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를 과거로 이끈다.
벌레에 쏘이면 처음에는 별일이 아닌 것 같다가, 통증이 점점 심해지며 얼마 안 가 살이 째지는 느낌이 든다. 현재와 과거가 서로 뒤섞이며 자연스레 혼재하는 것은 둘을 구분짓는 것이 셀로판지 한 장뿐이기 때문이다. 벌레에 쏘이기만 해도 셀로판지는 찢어진다. (36쪽)
소설 중반으로 가면 다라간의 슬프고 고독한 어린 시절의 비밀과 미스터리만이 남는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오래전 다라간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자, 훗날 연인 같은 존재로 남은 아니 아스트랑에 대해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라간의 기억 속에는 과거의 수수께끼의 핵심인 아니 아스트랑의 잔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청년이 된 다라간은 수배 전단을 작성하는 마음으로 첫 소설 『그 여름의 어둠』을 쓴다. “다라간은 그 책을 오직 그녀에게 기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책을 쓴다는 것도 그에게는 소식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등대 불빛을 쏘거나 모스부호를 띄워 보내는 일과 같았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책장 이곳저곳에 흘리고, 마침내 그들에게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78쪽) 소설은 장 다라간에게 있어 “그가 남몰래 삽입한 현실의 한 조각, 오직 한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신문광고란 속 개인적 전언 같은 것이었다.” 그는 아니 아스트랑의 눈길을 붙들 수 있는 한 대목을 소설에 집어넣고, 그렇게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다.
“제 책은 모두 바다에 던져진 병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 번도 그것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가닿길 바라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것이며, 그들이 제게 신호 보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침묵이 저로 하여금 다시 글을 쓰게 하고, 다른 병을 띄우게 합니다. 과거의 증인들이 다시 나타나더라도, 그들이 허구이고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_<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파트릭 모디아노는 전후(戰後) 혼란스러운 시대에 부모님의 부재와 동생의 죽음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 시절 자신의 고독과 불안을 헤아리며 그때를 잊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쓴다. 그러나 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드리워 있는 그림자를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기억의 공백은 기억을 더욱 뚜렷하게 한다. 작가가 갈리마르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 “대개 상실은 그것이 촉발하는 결여 혹은 결핍감으로 인해 기억을 선명하게 한다. 그 상실이 물론 사랑하던 존재의 상실일 수도 있지만, 과거에 친숙했던 장난감 병정이나 부적, 우리가 받았던 편지, 오래된 연락처수첩 등 평범한 물건의 상실일 수 있다. 이러한 상실과 부재가 당신에게 과거로의 틈새를 열어준다.”
“그들을 설명할수록 그들의 미스터리는 짙어진다.”
우리 스스로 풀어놓는 삶의 이야기와 기억의 조각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프루스트적인 소설이다. 사뮈엘 베케트는 프루스트와 그의 작중인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들을 설명할수록 그들의 미스터리는 짙어진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말한다. “장 다라간은 매우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낸 듯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속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만들어낸 수수께끼가 있다. 다라간은 어린 시절에 얽힌 에피소드를 ‘수사’해나가면서, 삶의 특정한 시절에 대한 추억이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 우리와 같은 시기를 기억하는 ‘증인들’의 추억과 종종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작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행위가 스스로 상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기억과 망각에 의해 방해를 받기 때문에, 결국 무익한 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힌다. 시간 속에서 어슴푸레해졌던 과거, “비눗방울처럼, 잠에서 깨면 날아가버리는 꿈의 조각들처럼” 빠져나가던 기억들은 그러나 영원성을 지닌다. 과거의 수수께끼는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러므로 모디아노는 계속해서 병을 띄울 것이다.
* 표지 사진은 윌리 로니스
(1910~2009)의
<방돔 광장
>(1947)이다
. 로베르 두아노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더불어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머니스트 사진작가로 알려져 있는 그는 우리에게 바게트를 들고 뛰어가는
<어린 파리지앵
>이라는 사진으로 더욱 친숙하다
. 로니스는 보슬비가 내리는 정오의 방돔 광장에서 오벨리스크가 비치는 물웅덩이를 건너는 여자의 모습을 포착했다
. 모디아노가 붙잡고 싶어한 기억의 찰나처럼 그는 흑백사진 속에 영원히 기억될 순간을 담아냈다
.
◆ 본문에서
예전에는 새로운 만남이 급작스럽고 거침없기 일쑤여서 사람과 사람이 어린 시절 타던 유원지 범퍼카처럼 길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잃어버린 수첩, 전화 속 목소리, 카페에서의 만남…… 그래, 모든 게 꿈결처럼 가벼웠다. (64~65쪽)
머나먼 과거에 몸을 담근 것은 잘못이었으리라. 그래봐야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떠올리지 않은 지 벌써 여러 해라, 그 시절은 이젠 불투명한 유리 너머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어슬핏한 빛만 유리를 통과할 뿐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의 윤곽인지는 구분할 수가 없다. 매끈한 유리가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했다. 어쩌면 그는 자발적 기억상실을 통해 이제야말로 완벽하게 과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강렬했던 그 색채와 질감이 시간 속에서 누그러진 것이리라.(82~83쪽)
오늘밤 집필실에서 떠올리자니 그 모든 것이 아득히 멀었다. 세기가 바뀐 지도 벌써 십 년이다…… 하지만 길모퉁이에서 어떤 얼굴을 마주칠 때, 아니, 심지어 대화중 느닷없이 등장한 어떤 단어나 음악 속 어떤 음을 듣기만 해도 그 이름, 아니 아스트랑은 그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런 일도 갈수록 뜸해졌고 또 갈수록 짧아졌다. 들어왔다 바로 꺼지는 신호등 불처럼. (98쪽)
그 존재도 우리 염두에 없던 사람들, 한 번 마주치곤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이 어째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역을 담당하는 것일까? (103쪽)
이미 오래전부터 아니 아스트랑에 대해서도
, 생뢰라포레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은 터였다
. 하지만 그 만남이
, 그가 본인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행여 다시 살아날까 우려하던 기억들을 일거에 되살렸다
. 그래
, 그렇게 됐다
. 그 기억들은 그렇게 집요했다
. (104쪽)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쓸쓸하면서 감미로운 한 편의 누아르. _더 뉴요커
모디아노의 이야기들, 더 정확히 말해서 그의 이야기를 이미 안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_뉴 리퍼블릭
시간이 흐를수록 파트릭 모디아노의 매혹적인 문체는 분명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흐릿해진다. 지워진 듯, 유보된 듯, 미완성인 듯. 오늘날 누가 이토록 아름답고 뛰어난 문장을 쓸 수 있을까! _라 크루아
모디아노는 독자에게 슬픔이 동반되는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고이 파묻힌 그 슬픔은 마치 불붙은 도화선처럼 지난 세월을 타고 서서히 타들어간다. _렉스프레스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소설.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마법은 오래도록 지속된다. _보그
향수에 빠지듯 슬프되, 아름답다. _우에스트 프랑스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풀어놓는 이야기와 기억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수사. 끊임없이 출몰하는 미스터리. _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파트릭 모디아노는 끊임없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선다. 현기증을 동반하는 먹먹한 우울감을 자아낸다. _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파트릭 모디아노는 시선을 돌려 사물을, 세계를, 그리고 스스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오랫동안, 천천히, 깊이 있게. _텔레라마
소설이 진행되며 과거의 미로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_레 제코
바흐의 음악처럼 간결하고, 또한 애절한 소설. 때때로 우리는 잃어버린 영원성을 되찾곤 한다. _렙도
파트릭 모디아노는 작품을 천천히 음미하는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결말을 보장한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모디아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그의 작품들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그 어떤 작가의 작품들과도 다른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황홀감에 오랫동안 빠져 있게 될 것이다. _르 피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