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을 펴낸다. 시인의 말마따나 지난 3년 동안 쓰인 시들로, 이들 시편들이 총 3부에 나뉘어 담겨 있다. ‘지난 3년 동안’이라는 말에서 이번 시집의 힌트를 찾는다면 무리가 아니겠나 하겠지만, 오히려 그 밝힘이 이 시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안내 표지판이 된다는 걸 앞서 밝히고 싶다. 우리에게 지난 3년의 시간은 어떠했나. 매일같이 일어나고 습관처럼 빚어지는 사건 사고의 참혹함은 해결될 기미 없이 오늘도 현재진행형이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라는 정신은 뒤로 더 뒤로 더는 갈 데가 없음에도 계속 후퇴하며 벼랑 끝까지 밀려가고 있는 게 또한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고? 아 그러니까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우리 조국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까.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슬플까.
김정환 시인의 이번 시집은 지난 1980년 데뷔 이후 그가 써왔던 시의 계보, 그러니까 역사를 담보로 현실을 증거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지경의 탄탄한 장시들을 독보적으로 선보인 김정환만의 시적 장기들이 유감없이 발휘된 한 권의 수작이다. 시의 정신과 시의 입말이 같은 보폭으로 그 궤를 맞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나 놀랍다. 정신이 앞지르면 시의 문체라는 가랑이가 찢어지고, 문체가 앞지르면 시의 정신이라는 옆구리가 터지는데 김정환 시인은 이 둘의 조합을 조화로이 이뤄낸다. “인간으로 살았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라는 자조 섞인 오묘한 인정이 언제나 그를 균형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게 하고 쓰게 하고 행동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시에서 그는 세상을 넓고 얕게 보기도 하고 좁고 깊게도 볼 줄 아는 까닭에 다면의 눈을 자유자재로 떴다 감는 입체성을 선보인다. 더불어 굵고 진한 테두리 속 유려하면서도 미려한 그의 시적 컬러를 나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쉽게 찾아내기도 한다.
여보. 우리가 당분간 유지할 것은 연민의 각도다.
산 자들의 번화가 아니면
비린내 질펀한 어촌 근해 집어등 야경이 우리 앞에
다시 출현할 때까지. 울음이 울음의 흔들림을
선이 선의 흩어짐을, 수습할 때까지. 아니면
할 수 없는 거다 여보. 그것은 우리 몫의 연민.
바다가 멀리멀리 물러나 일직선에 가닿을 때까지.
벽에 걸어두고 온 모자가 걸린다. 그 무게의
부재가 많이 걸린다.
-「각도」부분
옛사람이 글씨 쓴 것 아니고 옛 글씨가 사람 쓴 것 아니다.
한용운이 영원히 살았다며 내게 보낸 한문 우편엽서
답장으로 쓴다. 스스로 장한 너의 일을 하라. 알게 모르게
죽음도 문제는 죽음이 아니고 생이다.
아니, 자신이 생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 말고
죽음이 무얼 더 알겠는가?
-「고립의 역정」부분
우리가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
그건 차라리 낫겟지. 그때 사라지지도 못한
사람들 생각하면 생이, 잔존하는 생명이
끔찍 그 자체일 수 있다.
원전 노후,
그것은 괴물이 스스로 그러기 전에 자신을 폐해달라는
말. 괴물 자신의 마지막
필사적인 인간 언어의
말, 말의 마지막인 호소.
왜 그것을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나?
우리 마을에 나라를 집어삼킬,
낯익은 괴물이 있다.
호소하는 낯선 괴물이 있다.
-「원전 노후(老朽)」부분
무엇보다 그라는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은 누구든 가르치려 드는 권위와 교조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물과 같은 사람이다. 흐르는 사람이다. 섞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로 흘러야 하고 흘러가야 하는지는 제 몸이 귀신같이 알아채서 제가 가지 말아야 할 길로는 절대 물 한 방울도 튀게 하지를 않는 사람이다. 마구 흩어져 있는 듯한 분산인데 그 나름의 공식이 존재하는 일사분란이다. 혀를 내두를 만한 숙련이라 하면 평생 시로 산 시인에게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일 테지만 솔직한 것이 얼마나 대범해질 수 있는지 그 대범함 속에 얼마나 많은 삶의 길항이 자연스럽게 머물다 갈 수 있는지 그는 제 시 속에 다양한 삶의 가지가지들이 놀다 갈 수 있게 자연스럽게 몸을 내어주는 대신 흥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흥은 흥을 만나 더한 흥으로 몸을 부풀리는 흥겨운 더하기이자 리듬의 곱셈. 굳이 리듬감을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이 시들을 노래처럼 흥얼거릴 수 있다면 이는 그가 부린 흥의 그물망이 참으로 탄력적이기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여지가 없겠다. 또한 다음의 시를 보자.
아내가 출근 전에 팔팔 끓여놓고 간
도미 대가리 매운탕 다시 끓여
나 홀로 점심 먹는다. 땀을 뻘뻘 흘려도
도미 대가리 매운탕
새빨갛게 맵고 새까맣게 짜도
소용이 없다.
어두봉미* 눈알을 파먹는 거
별거 아니고 잠깐이고
동굴이다.
춥고 끔찍하여 최소한
아내와 내가 있었지.
얼굴 살 뜯어먹으면 서서히
드러나는 생선
두개골, 광년 너머
지질 연대의.
특히 백악기의.
인간이 먹는 죄가
진화를 능가하고 그것이 참으로
빠른 시간의 먼
거리(距離)였구나. 아내와 나
순식간 멀리 떨어져
아내도 없고 나도 없다.
소름 끼치는데 소름이라는 낱말이 없는 그
백악기에 내가 있다. 아내는 어느 연대에?
그리운, 그리운
구석기여, 음식의
죽음이 보였던. 인간 종(種)의
희망이여, 살갗이었던.
아내여, 이 모든 것이었던.
* 魚頭鳳尾. ‘물고기는 머리 쪽, 새 고기는 꼬리 쪽이 맛있다.’
-「도미 대가리 매운탕」전문
이 시집에서 특히나 주목해서 보아야 할 페이지가 있다면 바로 2부의 시편들이다. 신학철 선생의 그림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와 함께 펼쳐진 장시「構想의 具象, 혹은 중력의 수평」속에서 우리 현대사를 찬찬히 읽어나가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면, ‘세월호 참사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물 지옥 무지개」는 시인이 “2014년 5월 5일, 그러니까 참사의 수가 뒤늦게, 어처구니없이, 그러므로 더욱 지리하고 더욱 지리한 바로 그만큼 더 끔찍하게, 304로 변경 확인되기 전에 쓰”인 것으로, 그날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보 속에 있는 세월호 참사의 현장을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저마다의 주관적인 판단을 해보게끔 열어주는 의미로 시의 제 기능을 다해내고 있다.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을 뿐인데 참혹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라의 국상이라지 않는가. 나라가 다할 때까지 울어야 할 국상이라지 않는가.
1
자식 잃은 부모들, 슬픔에 희망이 없다. 슬픔을 모르는 자 더욱 희망이 없다.
6
죽은 어린이날이 있다. 죽은 어버이날이 있다. 죽은 스승의 날이 있다. 오 그 밖에 이러고도 세상이 돌아가다니, 우리가 살아 있기는 한 건가?
10
너무나 지리한 슬픔의 미분(微分)으로 넘어간다. 왜냐면 주검들의 소문만 끝없이 이어진다. 너무나 느닷없는 충격의 적분(積分)들로 넘어간다 왜냐면 끝까지 기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
무지개 뜨지 않았다. 박제된 시간 위로 투명한 어깨들이 고개 숙이고 있다. 늦는 남편이 늦는 아내가 늦는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26
무지개 뜨지 않았다. 열 달 품어 낳은 자식인데 열 며칠 만에 인양을 할 수는 없다…… 실종 학생 부모의 절규가 절규의 뒤늦은 등장을 알 수가 없다.
29
내 이름은 세월호 참사. 울음이 나라의 한몸일 때까지 울어보자.
30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
-「물 지옥 무지개-세월호 참사의 말」부분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을 다 읽고 나면 내가 한 권의 시집을 읽은 것인지 한 편의 시를 읽은 것인지 가물가물 헷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한 호흡으로 쓴 시와 한 호흡으로 완성한 시집이라는 품은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질그릇이 아니다. 질그릇을 깨든 질그릇을 애지중지 여기든 이제 남은 몫은 읽는 자들의 것. 다만 이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를 짧게 요약해달라면 이렇게 덧붙일 수는 있겠다. “비운보다 인과/ 응보로 느껴져야 했다./ 조선 왕족들 자존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면 말이지./ 끔찍한 비만 틈틈 그 비좁은 길로 쏟아져나온/ 백성들의 인산(因山)/ 인산인해./ 통곡하는 슬픔보다 더 불쌍한 그 슬픔의 짐을/ 비좁은 길보다 더 비좁게 옥죄는 데 써야 했다.”(「한성부 지도」부분) 이것이 바로 우리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여전한, 우리로부터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우리를 가리키는 커다란 비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