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가 금정연과 소설가 정지돈이 함께 쓴 『문학의 기쁨』이 출간되었다. 한국문학의 오늘을 짚어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평론집이다. 금정연은 인터넷서점의 MD로 출발해 광범위한 독서를 배경으로 전문 서평가, 평론가,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온 인물, 정지돈은 2014년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소설이냐 아니냐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하나의 현상이 된 작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능청과 너스레, 끊임없이 주제를 벗어나 딴 얘기를 할 수 있는 ‘해찰’의 정신이다. 한 문학 계간지의 요청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전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지만(원래 진지하고도 정기적인 대화여야 했다), 덕분에 상당히 괴이한 형식의(에세이, 대화, 서간, 시나리오가 혼합된) 유쾌한 문학평론이 탄생해버렸다.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에 대한, 형식부터 새로운 문학 이야기여서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책에는 2015년부터 2년 동안 두 사람이 만나 함께 나눈 여덟 편의 대화가 실렸다. “대화”라고 했지만 딱히 대화록은 아니다. 대화를 나눈 뒤 한 사람이 쓰거나 두 사람이 이어 쓰거나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기도 하는 글이다. 2015년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계간 『작가세계』에 연재한 다섯 편의 대담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한국문학은 가능한가」 「한국문학의 위기」 「우주에서 온 편지」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2016년 7월부터 경기문화재단 웹진 <톡톡talktalk>에 연재한 페이퍼시네마(영화를 지면 위로 옮긴 듯 쓴 글) 중 일부에 코멘터리를 붙인 「시흥의 밤The Night of Siheung」, 그리고 소설집의 해설 「오한기에서 오한기로」(오한기, 『의인법』, 현대문학, 2015)와 「우리가 미래다We Are the Future」(이상우, 『프리즘』, 문학동네, 2015)가 바로 그것이다.
일단,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에서 두 사람은 제목 그대로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한다. 새로운 답을 발견해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아니다. “그저 가장 빈번하게 던져지는 질문이어서”가 그 이유다. 이들은 연재 당시의 요청(“매 계절 신인(또는 신인에 가까운) 한국 작가의 신간 단행본을 가지고 깊이 있는 대화를 진행해달라”)에 따라 세 편의 작품을 고르고 이 질문의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고, 결국 선정은 흔히 좋다고 말할 때 사용되는 관성적인 평가, 쉽게 통용되는 수식어에 따라 이루어진다. 첫째,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며 난해하다고 이야기되는 작품. 둘째, 탄탄한 서사와 문장으로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여겨지는 작품. 셋째, 독립출판으로 출간된 개성적이라고 믿어지는 작품. 그러나 이렇게 추려낸 작품을 읽고 내린 결론은 정반대의 것이다. 첫째, 어렵지 않으며 평범한 주제를 다룬다. 둘째, 탄탄하다고 하기에는 어정쩡하다. 셋째, 소설에 대한 통념을 고스란히 따른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대화는 좌초되고 만다.
「한국문학은 가능한가」에서는 공모전 당선작을 살펴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줄거리를 요약한 후에는 할 이야기가 사라지고 그저 어떤 장면이 좋았다, 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 찾아온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공모전을 비판하며 활기를 띤다. 상금이라는 가짜 권위가 만들어내는 양극화, 한 번에 수백 편의 작품을 심사하여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작품에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암묵적으로 공모전이 지향하는 특정한 경향이 있다고 여겨지고 이것이 다시 문단에 미치는 영향 등 이들은 공모전의 문제점을 다양하게 지적한다. 2015년 여름을 통과하며 이루어졌을 이 대화는 당시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형 작가의 표절 사건과 이로 인해 제기된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이들의 대화는 한 시기를 통과하며 그 시기가 뿜어내는 기운을 일부 흡수, 또는 반사해내는 과정을 거치며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서신 교환
대화는 「한국문학의 위기」와 「우주에서 온 편지」에 이르러 서신 교환의 형식으로 변화한다. “한국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상습적으로 반복되어왔다는 지적과 함께, 이들은 마치 무언가 있어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음을 감출 뿐인 문장들을 구사해내며 자신들이 처한 위기 상황, 즉 대화의 위기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폭로한다. 시상식 뒤풀이, 술자리, 빠질 수 없는 집안일, 편지 쓰기가 가져오는 피로감 등이 이들이 봉착한 위기의 원인인 것처럼 너스레를 떨지만 그 너스레는 결국 읽기와 쓰기에 대한 성찰이다. “문학의 역사가 부재할 때 각각의 작품을 논하는 우리는 부사와 형용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연대기의 나열이 아닌 일종의 가치로서의 문학사입니다. 그것이 부재한다면 비평은 부르주아의 미식美食 취미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이것은 알튀세르의 표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따라서 무시하는) 취향의 박람회. 그러니 어느 순간 이런 의구심이 드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요즘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102쪽)
해가 바뀌고 이러한 위기는 더욱 가속화된 듯 다음 편지는 무려 우주에서 날아든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계획은 거의 실현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원래 장르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으나 곧 자신들이 ‘장르’문학과 그 구분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데이비드 보위의 죽음(2016. 1. 10.)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예상과 전혀 다른 편지를 쓰게 된다.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과 그를 둘러싼 추억, 사이먼 크리츨리의 『Bowie』에서 발췌·번역한 일부, 영화 <유스>(파올로 소렌티노, 2015)를 두고 나눈 대화(“그녀를 보고 바람이 부는 대로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바람을 일으키는 건 그녀예요. 그녀가 텔레비전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제 텔레비전이 새로운 예술이 되는 거죠. 어쨌거나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늙음이 그런 것처럼. 이게 이번 원고를 통해 제가 하려는 이야기예요”(139쪽)), 그리고 <유스>의 시나리오 일부 등 다양한 조각들이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면서 2015년의 대화가 마무리된다.
한번 더,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함께 대화를 나눈 지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들은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은 처음에 쓴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에서 이것이 몹시 낡은 질문임을 알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이를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제목은 하나의 상투적이고 무의미한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데 우리는 동의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질문을 하자고 말한 것에는 […] 뭔가가 가능하기라도 할까, 우리가 지속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 라는 의미로서, 우리가 즐겁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할 뭔가가, 불가능을 가장한 아카데미즘과도 결별하고 독자들을 현혹하려는 상업주의와도 결별하고 나이브한 자기만족이나 자기애와도 결별하고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이상과도 결별하고도 가능한 무언가가 있을까 하는 생각."(36~37쪽)
다시 쓰는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에서 두 사람은 한국문학이 관료제라는 주장을 펼친다. “인간의 본질이나 심연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그 장 속에서 좀더 효과적인 배치나 구조를 생성하는 활동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강고한 관료제일수록 더욱 자신의 시스템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게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음에도 단지 시스템을 벗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시스템이 곧 목적이고, 시스템을 벗어나려는 이들은 진리를 공격하는 자들이니까요. 그래서 단지 소설의 형식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151쪽)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소설의 계열을 정리한다.
안톤 체호프 | ↔ | 셔우드 앤더슨 |
| | | | |
레이먼드 카버 | 플래너리 오코너 | |
에피파니 | 그로테스크 | |
희망적 | 비극적 | |
휴머니즘 | 블랙 유머 |
두 사람은 현재 한국문학에서 안톤 체호프―레이먼드 카버 계열이 몹시 지배적임을 지적하고 이 “우세종”이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더 대중적이기 때문인데, 마치 훌륭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다른 종류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비판한다. “결국 우세종은 진리의 담지자가 되고 다른 건 모두 샛길이나 실험, 외도에 불과한 취급을 받습니다.”(154쪽)
´대문자 문학´에서 ´탈정상 문학´으로
마침내 이들이 도달한 지점은 어디일까. 현재 한국문학 그리고 이들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무엇일까? 「시흥의 밤」은 『문학의 기쁨』에서 가장 나중에 쓰인 글로(두 사람은 2015년부터 2016년까지 다섯 번의 연재가 이루어지는 동안 틈틈이 역시 대화의 방식으로 오한기와 이상우의 첫 소설집 해설을 썼고, 2017년 1월 「시흥의 밤」을 썼다) 독방에 갇힌 마약왕 하비스 치메네스 파바오가 바라보는 스크린 속에서 시작한다. 금정연, 정지돈, 황예인 세 사람이 대담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시흥으로 가는 여정 위에 박솔뫼의 단편소설 「우리의 사람들」(『문학과사회』 2016년 여름호)의 일부를 변형하고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사사키 아타루와 그의 신도들의 모습을 희화화한 장면을 연결하고 겹쳐놓는다.
이 페이퍼시네마에 덧붙인 코멘터리에서 정지돈은 브뤼노 라투르의 ‘대문자 과학’(“객관적 지식으로서의 과학은 몇몇 과학자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라며 이를 ‘대문자 과학’이라고 불렀다”(191쪽)) 개념으로부터 유추하여 현재의 한국문학을 ‘대문자 문학’으로 명명한다. 휴머니즘, 리얼리즘, 문학 근본주의로 구성된 ‘대문자 문학’은 한국의 문학계를 산업적, 비평적으로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탈정상 과학’(“사회가 발전하고 과학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과학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점점 더 답을 내릴 수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 토머스 쿤의 정상 과학 개념을 확장시킨 탈정상 과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192~193쪽)) 개념으로부터 ‘탈정상 문학’을 유추하여 ‘대문자 문학’과 구별되는 정의를 세워나간다. ‘대문자 문학’이 지닌 인간, 현실, 삶에 대한 너무도 평평하고 편협한 이해를 부정하면서 말이다.
어찌 되었거나, 그저 기쁨
한국문학에서 2015년은 어떤 해였나. 표절 사건으로 시작,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들이 격렬하게 쏟아진 해였다. 그리고 2016년에는 출판사와 문예지들이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며 변화를 모색해나갔다. (물론 2017년인 현재, 비판과 변화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서평가 금정연이 문학 전문 출판사 중 하나인 문학동네의 계간지에 리뷰좌담 멤버로 참여한 해가 2014년이다. 그는 비평가들과 함께 매 계절 발표되는 단편소설들을 읽으며 ‘한국 문단’이라는 곳의 체험을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각종 해설과 행사의 사회를 맡으며 좀더 깊숙이 개입, 이후 특이한 궤적을 그려나간다. 같은 해 정지돈은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는데,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소설이냐 아니냐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하나의 현상이 된다.
2010년대의 한국문학(혹은 한국사회)을 돌이켜볼 때, 이 시기 벌어진 사건들과 다양한 담론들, 그리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들… 이 모든 것들은 혹시 어떤 지각 변동을 설명하는 자료가 되지는 않을까? 여전히 공고한 듯 보이는 지금 이곳을 사유하기 위해 『문학의 기쁨』은 면밀하게 읽힐 필요가 있다. 어쩌면 또다른 누군가는 『문학의 기쁨』에서 문학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읽어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은 가능한가. 한국○○은 가능한가. 한국○○의 위기…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부과하는 낡은 질문들과 그것으로는 결코 설명해낼 수 없는 현실 말이다. 어찌 되었거나 두 사람의 대화를 읽으며 다다르는 곳은 문학이 아닌 기쁨, 그리고 문학의 기쁨, 그저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