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학의 대모,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장 작가 토니 모리슨 최신작
“토니 모리슨은 우리 사이에 섞여 있는 신(神)들 중 하나다.
그녀는 강직하고 두려움 없이 꼭 필요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_배너티 페어
감각적인 문장으로 빚어낸 어리고 다친 삶들,
거침없이 질주하는 이야기 속 슬픔과 분노로 뒤엉킨 목소리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과 다가올 날들에 내리비치는 축복 같은 희망……
“우리는 또다시 모리슨의 비옥한 풍경 속에 발을 들였다. 그녀가 여전히 이토록 강력한 구원의 힘과 시적인 품위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_더 플레인 딜러
미국 문학의 대모이자 이름만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세계적인 작가, 토니 모리슨.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모리슨의 최신작이 한국 독자들과 만난다. 2015년 발표한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유난히 새카만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결핍 속에서 성장한 젊은 여성 브라이드와 어린 시절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젊은 남성 부커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모리슨이 쓴 열한 편의 장편소설 중 유일하게 21세기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제 아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놀라울 만큼 젊은 감각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250페이지 남짓 되는 짤막한 소설 속을 활공하듯 질주하는 강렬하고 유려한 문장과 대담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독자를 사로잡는 토니 모리슨의 문학적 힘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한다.
첫 작품인 『가장 푸른 눈』을 비롯해 『술라』 『빌러비드』 『자비』 같은 토니 모리슨의 이전 작품들이 어떻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인종주의가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흑인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어떻게 견뎌왔는지를 주로 다루었다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 땅에,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 있는 차별과 억압의 잔재를 다룬다. 특히 그러한 차별을 내면화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고 끈질기게 그들의 삶을 구속하고 위협하는지,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어떻게 또다른 상처와 고통을 낳는지를 여러 인물들의 처절한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어떠한 보호막도 없이 세상의 칼날 같은 냉기를 받아내며 성장한 소설 속 ‘아이들’은 슬픔에 비틀거리고 분노에 넘어지면서도 계속 나아가려 애쓴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던 그들의 미래는 멈춰 선 순간에 비로소 열린다. 다가올 삶을 돌보느라 마음 한구석에 구겨놓았던 어린 자신을 돌아볼 때,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이에게 숨겨왔던 흉터를 내보일 때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올려다볼 어른이 아니라 마주볼 동반자에서 구원을 찾는 이 소설은 이제 인생의 꼭대기에 선 노작가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향해 내리비추는 축복처럼, 모리슨의 문학 자체만큼이나 큰 축복처럼 느껴진다.
칼날 같은 세상의 한기에 얼어붙어
미처 자라지 못한 어른 소녀와 어른 소년의 이야기.
1990년대, 피부색이 밝은 어느 흑인 여성에게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아주 새카만 피부를 가진 룰라 앤이. 아이의 피부색을 보고 경악한 어머니는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고 의무감에 의지해 딸을 키운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엄마 대신 ‘스위트니스’라고 부르게 한다. 룰라 앤의 아버지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며 집을 나가버린다. 룰라 앤은 어머니가 손바닥으로 체벌이라도 해주기를 기도할 만큼 어머니의 손길을 갈구하며 사랑에 굶주린 채 성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듯 이름을 ‘브라이드’로 바꾸고 화장품회사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흑단처럼 검은 피부가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깨닫고 피부색을 강조할 수 있는 새하얀 옷만 입으며 아름다움을 뽐낸다.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브라이드는 현재의 애인인 부커와의 관계에 만족한다. 그런데 어느 날 부커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브라이드를 떠나버리고 그녀는 큰 충격에 빠진다.
부커를 향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쉽게 마음을 다잡지 못하던 브라이드는 결국 부커를 찾아 길을 떠난다. 하지만 한적한 도로에서 차를 몰던 도중 가로수를 들이받아 다리가 부러지고 결국 근처에서 히피처럼 살아가고 있는 어느 가족에게 구출돼 두 달 동안 그들의 허름한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녀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그 기간 동안 점점 자신의 몸이 밋밋하고 연약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다시 떠날 수 있게 된 브라이드는 부커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다시 마주한 그에게 자신을 버린 이유를 설명하라고 윽박지른다. 어린 시절 살해된 형의 기억에 평생을 시달려온 부커는 자신의 아픈 기억을 털어놓고 브라이드 역시 평생 짐처럼 간직해온 어린 시절의 치명적인 실수를 고백한다.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게 된 두 사람은 조금씩 관계를 회복하고,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나는 젊어. 성공했고 예뻐. 정말 예뻐.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할까?”
주로 브라이드와 부커, 스위트니스의 일인칭 시점이 교차하며 빠르게 전개되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묘미 중 하나는 마치 들리는 듯 생생하게 표현된 인물들의 목소리다. 특히 모리슨은 유행의 첨단을 걷는 화장품회사에서 일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는 브라이드의 목소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다. 작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소설은 2008년 출간된 『자비』보다 먼저 집필을 시작했지만 브라이드가 구사하는 현대적이고 다소 부박한 말투를 경박하지 않게 문학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모리슨은 몇 년 동안 패션 잡지나 관련 TV 프로그램을 보며 그들의 언어를 관찰하고 연구했고, 그 결과 브라이드라는 현대적이고 개성 있는 인물을 성공적으로 탄생시켰다.
그러나 브라이드를 통해 모리슨이 재현한 것은 단지 현대적인 외형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인종주의를 견디며 살아가는 젊은 세대 흑인들의 삶과 그것의 본질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차별을 내면화한 부모의 핍박과 검은 피부를 아름다움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브라이드의 외적 아름다움과 내면의 공허 사이의 괴리는, 외형적 평등을 어느 정도 쟁취한 사회에서 젊은 흑인 세대가 겪는 괴로움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하게 가른다는 것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된다.
선과 악이 뒤엉킨 세상에서 선을 꿈꾼다는 것.
“나는 선이 악보다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악은 단순하다.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그런 일들은 다섯 살만 먹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은 복잡하다.” _토니 모리슨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는 누가복음 18장 16절로 소설의 문을 여는 이 작품은 무엇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폭력은 성폭행이나 살인 같은 매우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로 가해지기도 하지만, 스위트니스가 브라이드에게 행했던 것처럼 인종주의라는 ‘현실’을 변명으로 내세운 정신적 폭력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피부 색깔은 그 아이가 늘 지고 다녀야 할 십자가야.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야.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아니야.”_본문 19쪽
스위트니스는 브라이드에게 행한 자신의 폭력을 이렇게 해명한다. 물론 인종주의는 스위트니스의 잘못이 아니다. 흑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의 딸을 사회적 제약 속에 가둔 그녀 역시 인종주의의 피해자다. 그러나 브라이드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피부색 그 자체가 아니라 차별의 뒤틀린 논리를 받아들이고 브라이드에게 강요한 그녀가 지운 것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명백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모리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 후반부에 밝혀지듯, 냉혹한 모녀 관계에서 명백한 피해자였던 브라이드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리슨이 그려낸 현대의 미국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억압에 대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부서진 마음의 틈 사이로 햇살이 스밀 때,
슬픔과 분노로 척박해진 내면에 다가올 날들이 꽃핀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상처와 슬픔으로 얼룩진 이야기지만 그 끝은 토니 모리슨의 어떤 작품보다도 희망적이다. 그리고 그 희망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작가가 온기 어린 미래의 가능성, 선한 세상의 가능성을 젊은이들의 손에 오롯이 쥐여주기 때문이다. 브라이드와 부커가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은 결국 두 사람의 소통,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통해서다. 물론 그들의 주변에도 삶의 지혜를 나누어주는 어른이 존재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어른도 ‘하느님’도 아닌, 선한 세상을 꿈꾸는 그들 자신이다. 소설의 끝에 이르렀을 때 책장을 쉽게 덮을 수 없는 이유는 이야기 자체에서 오는 감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헌사에서 밝히고 있듯 이 작품이 “너에게”, 그녀가 떠난 후에도 이 책을 펼쳐들 젊은 세대에게 남기는, 그녀의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위로이자 축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이들에게 던지는 충고가 아니라 남겨질 이들, 여전히 힘겹고 버거운 세상을 살아갈 이들의 머리에 그 세상을 평생 견뎌온 작가가 따뜻하게 얹어주는 진심어린 손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우화와 현실, 그 중간 지대를 점유하는 강렬한 이야기 조각들을 만들어내고, 안전과 사랑과 소속감을 열망하는 처절한 인물들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점점 고조되는 속도와 자신감에 더해, 모리슨의 마법 같은 내러티브는 브라이드와 부커의 감상적인 발라드를 힘있는 동시에 감동적이고, 맹렬한 동시에 울림을 주는 이야기로 바꾸어놓는다. 뉴욕 타임스
모리슨의 이번 작품에는 새로운 종류의 절박함이, 꾸밈이나 장식 없이 이야기 자체만을 전달하려는 욕망이 있다. 모리슨은 이론의 여지 없이 미국 흑인 삶의 최고의 해석자다. 보스턴 글로브
아름답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최상급의 작품이다. 이야기가 모리슨의 자신감 넘치는 문장을 타고 활공한다. USA 투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작가는 계속해서 인물들의 분노와 치명적인 상처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해낸다. 이 작품은 평생 동안 축적되고 순수하게 정제된 분노와 슬픔에 대한, 맹렬하고 치열하게 그것에 매달리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토니 모리슨은 우리 사이에 섞여 있는 신(神)들 중 하나다. 그녀는 강직하고 두려움 없이 꼭 필요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각적이고 위엄 있는 작품. 배너티 페어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주는 작품. 모리슨의 문학적인 솜씨는 거친 언어와 세밀한 묘사 그리고 유머마저도 포괄한다. 쉽게 잊히지 않는 이 소설은 미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정의와 용서에 대한 흔들림 없는 감각을 보여준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교묘하고 맹렬하며 진실하고 우아하다. 모리슨은 다시 한번 투지와 마력을 품은 스토리텔링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내며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자리매김한다. 엘르
시의적이면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 모리슨은 외적인 충족에 내적인 치유가 반드시 동반되는 것은 아님을 지극히 간결하고도 유려하게 보여준다. 시애틀 타임스
오싹한 예언자이자 활기 넘치는 스토리텔러로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리슨은 45년 전에 『가장 푸른 눈』으로 시작한 문학적 탐구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커커스
찬란하면서도 불꽃이 튄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4부로 구성된 희비극적인 재즈 오페라. 모리슨은 인간이 겪는 고통의 가락으로 예술을 만들어낸다. 디 애틀랜틱
단호하게 물러서지 않는, 수려한 작품.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훌륭하다. 여전히 모리슨은 그 어떤 이야기를 하든 흥미를 끄는 강렬한 작가다. 가디언
탁월하다. 모리슨은 셰익스피어적 비극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재능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를 가득 채우고 있다. 뉴스데이
모리슨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상처와 삶을 뒤바꾸는 그 상처의 영향력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보여준다. 모리슨처럼 뛰어난 산문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별로 없다. 에센스
긴 여운을 남기는 감동적이고 대담한 소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토니 모리슨이 우상과 같은 존재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버슬
짤막한 이야기들이 다차원적으로 겹쳐지면서 각각의 인물들이 점차 완성되어가는, 피카소의 그림 같은 작품.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
간결한 문장으로 강렬하게 그려낸다. 이야기의 모든 조각들이 매끈하게 들어맞는다. 과거를 물리치고 현재를 직면하며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는 일에 대한 소설. 라이브러리 저널
최소한 두 번은 읽어야 할 책. 첫번째로는 이야기를 파악하고, 두번째로는 언어와 주옥같은 표현들을, 인간은 사랑할 능력도 있지만 동시에 파괴할 능력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음미하면서.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
숨막히는 문장. 모리슨의 새 책이 나오는 것은 언제나 기념할 만한 일이다. 댈러스 모닝 뉴스
가슴 아픈 이야기. 모리슨은 여전히 빛난다. 소설 속 브라이드처럼 모리슨 역시 작가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혁신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
▶ 책 속에서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어야 마땅한 교훈을 한 가지 배웠어. 아이에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 아이들은 절대 잊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_65쪽
“괜찮아, 베이비, 넌 다른 사람의 악에 책임이 없어.”
“알아,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고, 고칠 수 없는 것에서는 배워.”
“뭘 고쳐야 하는지 항상 알 수 있는 건 아냐.”
“아니, 알 수 있어. 생각해. 우리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정신은 늘 진실을 알고 모든 게 분명해지기를 원해.” _82쪽
자유를 얻으려면 싸워야 한다. 자유를 얻으려 노력하고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라. _100∼101쪽
한때 신뢰했던, 자신이 안전하다고, 어쩐 일인지 식민지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던 한 사람을 찾아 미지의 영역으로 차를 몰게 하는 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상처였다. 그가 없는 세상은 혼란 이상이었다—천박하고, 춥고, 고의적으로 적대적이었다. _112∼113쪽
그녀는 자기 연민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강인한 어린 소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놀랍게도 전혀 질투심이 섞이지 않은 동반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여자아이들이 가까워지듯이. _146쪽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이웃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거예요.” 그 상투적인 표현은 어디에서 왔을까? 왜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한다고 할까? 너무 마음이 약해서 병을 옮기는 벌레의 목숨은 빼앗지 못하지만 아이의 생명에는 기쁘게 도끼질을 할 수 있다는 뜻일까?” _156쪽
정치 세계는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행동가들은 보수건 진보건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혁명가들은 무장을 했건 평화적이건 자신들이 ‘승리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가 통치할 것인가? ‘민중’이? 제발. 그게 무슨 의미인가? 최선의 결과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념을 소개하는 것이고, 어쩌면 정치가가 거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을 구하는 연기다. 오직 부만이 인간의 악을 설명했고, 그래서 그는 부를 따르지 않고 살기로 결심했다. _170쪽
맛있는 섹스, 프리스타일 음악, 도전적인 책, 편안하고 부담없는 동반자 브라이드라는 축복에 빠져 여섯 달을 보내자, 동화의 성은 그 허황된 건축의 바탕이었던 진흙과 모래 속으로 무너져내렸다. 그래서 부커는 달아났다. _186쪽
“과학적으로 보자면 인종 같은 건 없어, 브라이드. 따라서 인종이 없는 인종주의는 하나의 선택이야. 물론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택이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야.” _195쪽
“왜 갈라섰는데?”
“거짓말. 침묵. 진실은 무엇이고 이유는 무엇인지 그냥 말하지 않은 것.”
“무슨 진실?”
“어린 시절 우리의 진실이요,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 사실 우리가 그저 아이에 불과했을 때 벌어진 일을 두고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생각을 했는지, 행동에 나섰는지.” _211쪽
개인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이기적이 되기 쉽고, 얼마나 쉽게 찢어져버리는지 잘 알았다. 섹스를 억누르거나 거기에 의존하면서, 자식들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삼킬 듯이 애지중지하면서, 진짜 감정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거나 진짜 감정들을 가두어버리면서. 젊음은 그런 포춘쿠키식 사랑의 변명이 되고—그러다 그게 변명이 되지 않고, 그저 어른의 멍청함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_214∼215쪽
나도 한때는 예뻤어, 그녀는 생각했다, 정말 예뻤지,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었어. 그래, 실제로 그랬어, 그러다 더는 그렇지 않은 때가 왔고, 진짜 인간이 되어야만 했지, 그러니까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야만 했어.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게 병이 아니라 조건일 뿐이라는 걸 알 만큼 똑똑해졌지. 이제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그 자리에서 읽어낼 만큼 똑똑해졌어. 하지만 그런 똑똑함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그녀는 자식들을 챙기지 못했다. _215쪽
브라이드는 아마 사랑에 관해 나보다 많이 알 거야. 적어도 기꺼이 사랑을 파악하려 하고, 뭔가 하려 하고, 뭔가 위험을 감수하고, 가늠해보려 하잖아. 나는 아무것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아. 왕좌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불완전하다는 표시만 확인하지. 나는 나 자신의 지성과 내가 택한 도덕적 입장에, 거기 수반되는 오만에 홀렸어. (...) 나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만 기록하고 있잖아. 쉬운 일이지. 아주 쉬운 일이야. 하지만 나 자신의 약점은 어쩌고? _217∼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