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워 간절하게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취해갔던 그 밤들에서 벌써 한 계절을 건너왔다
“강릉 바다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바다다.
강릉 바다는 그동안 가장 많이 기웃거린 바다이기도 하다.
그 바다 근처를 서성거렸던 이야기를 담았다.”
강원도산 곰취 같은 청정 에세이
이 책에 실린 산문은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글들이다. 그중에서도 깊은 밤에 마시는 소주 안주로, 달걀을 노른자에 분이 날 때까지 삶아 칼로 반 토막을 낸 뒤 고추장을 찍어 곰취에 싸먹는 것을 최고로 치는 소설가만이 쓸 수 있는 산문이다. 이 책은 겨울철에 강릉 삽당령 너머 영동지역의 해양성 기후와 여름철 고랭지 기후가 만나는 송현리에서 자라는 곰취의 맛을 제일로 치는 김도연 작가의 세번째 산문집이다. 강원도의 거친 듯 속 깊은 바람처럼 맑고 정갈한 글들을 모아, 작가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바다이자 삶의 변두리에서 끊임없이 기웃거리고 서성거렸던 ‘강릉 바다’에 담았다.
“대관령 산골짜기에 어느 날 하늘에서 물고기들이 우박처럼 뚝뚝 떨어진 적이 있다고 들었다. 덕분에 마을사람들은 명절 생일날에나 먹을 수 있었던 바다의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다고 했다. 아마도 용오름 때 하늘로 불려간 물고기들이 생선 구경하기 힘든 산골마을에 선물처럼 내려앉은 것일 게다. 이 이야기는 내가 처음 들은 바다 이야기 중 하나일 텐데 그때부터 나는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온갖 물고기들이 날아다닐 것만 같은 바다 같은 하늘을. (…) 그 바다 근처를 서성거렸던 이야기를 담았다. 하늘에서 고등어 꽁치 명태 오징어가 뚝뚝 떨어지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깊고 그윽한 돌배 술 같은 에세이
작가의 고향 진부령에서 자라는 돌배나무의 돌배는 아무리 잘 익은 것이라도 한입 깨물면 특유의 신맛에 몸서리를 칠 정도여서 다른 열매에 비해 인기가 없다. 하지만 술로 담그면 세상의 어떤 술보다도 맛이 깊고 그윽하여 인기가 높다. 이 책에 실린 글들에는 잘 담근 돌배 술 같은 18년 차 작가의 농익은 글맛이 잘 배어 있다. 그런 만큼 오래전 누에들에게 자기 방을 빼앗긴 한 산골 소년을 만날 수 있고, 강원도에서도 봄이 일찍 찾아오는 원주의 소쩍새 울음소리에 공감하는 한 남자를 만날 수도 있다.
“우리는 마치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고, 달려가고, 몰려오고, 쓰러지는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더 나아가 취한 배에, 취한 기차에, 취한 그 무엇에 실려 눈보라 일렁이는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평창올림픽 계기로 네이버 스포츠 최초로 산문 연재
눈의 고장 평창은 안타깝게도 얼마 전 천혜의 자연을 훼손하면서 동계올림픽을 개최했다. 작가의 어린 시절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개통한 신작로가 그 고장의 유일한 길이었는데, 1970년대 들어 길이 포장되고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달라진 고향 사람들의 삶, 그리고 자연과 사람 사이의 정, 개발에 따른 급격한 변화에 대한 작가의 상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돼 있는데, 마지막 3부에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제안으로 연재한 평창 동계올림픽 관전평을 실었다. 경기장을 품고 있는 장소가 자아내는 기억들, 경기 현장의 열기와 선수들의 땀에 대한 묘사 등 인상적인 읽을거리가 가득하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대관령을 넘고 또 넘었을 것이다. 그 많은 평창의 길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바로 이 길이다. 산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산비탈에 불을 놓아 밭을 일구려는 화전민들이 피워 올린 성화같은 가난한 연기. 그들이 만든 길을 나는 좋아한다.”
♣ 책 속으로
지금껏 나는 취한 말들의 공격만 받으며 살았던 걸까. 나 역시 나보다 약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취한 말들을 던져온 것은 아닐까. 그 말에 누군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아파했던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이 던진 취한 말에는 온갖 괴로운 표정과 신음을 토해놓곤 내가 던진 취한 말엔 모르는 척, 기억나지 않는 척, 대수롭지 않은 척 등을 돌려버렸던 건 아닐까. 내가 던진 말은 절대 취한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고 고집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점점 자리를 넓혀가고 있으니. 취한 말뿐만 아니라 취한 행동까지 저질러놓곤 억지로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_「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
어쩌면 얼음은 겨울의 혹한이 가져다준 선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배가 없는 우리들이 언제 드넓은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볼 수 있겠어요. 얼음이 없으면 그 호수 밖에서 호수를 바라볼 뿐이지요. 호수에 떠 있는 청둥오리들을 부러워하는 게 전부겠지요. 호수 위를 날아가는 고니나 두루미를 눈길로 따라갔다가 되돌아올 따름이겠지요. 호수 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에 대한 상상만 펼치다가 이내 시무룩해지겠요. _「주문진 향호」에서
오르막과 내리막, 그것은 터널이 있든 없든 고갯길의 운명이다. 인생의 어떤 비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고갯길을 넘으며, 터널을 통과하며, 우리네 인생을 곰곰 되짚어보는 모양이다. _「밤재」에서
그동안 우리가 먹던 메밀국수는 텁텁함을 없애기 위해 어느 정도 전분을 섞어서 만든 것인데 내게는 오히려 그 텁텁함이 매력으로 다가온 거였습니다. 먹는 방식도 당연히 달랐지요. 간단히 요약하자면 잘 익은 갓김치를 국물 없는 메밀국수에 참기름과 함께 비벼 먹는 거였습니다. 목이 막히면 국수 삶은 물로 목을 축이면서. _「숨어 있는 강원도의 거친 맛」에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대관령을 넘고 또 넘었을 것이다. 그 많은 평창의 길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바로 이 길이다. 산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산비탈에 불을 놓아 밭을 일구려는 화전민들이 피워 올린 성화같은 가난한 연기. 그들이 만든 길을 나는 좋아한다. _「길, 한 오백 년」에서
제한된 시야 속에서 현장의 관중들은 봉평 태기산에서 불어오는 혹한의 칼바람과도 맞서 싸워야만 했다. 손핫팩을 만지작거리고 무릎담요를 올려놓고 뜨거운 커피를 수시로 마셔가면서까지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장점은 뭘까를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안방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어떤 열정이었다. 선수들에게서 전해져오는 열정, 그리고 선수들을 응원하는 세계 각국 관중들에게서 전해져오는 열정, 그것은 오직 현장에만 있었다. _「하늘을 날고 얼음 위를 달렸다」에서
강릉 바다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바다다. 강릉 바다는 그동안 가장 많이 기웃거린 바다이기도 하다. 한동안 ‘저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란 노래 가사를 입에 달고 산 적도 있다. 그 바다 근처를 서성거렸던 이야기를 담았다. 하늘에서 고등어 꽁치 명태 오징어가 뚝뚝 떨어지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_‘뒷표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