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의 『연어』 『관계』를 기점으로 90년대 후반의 새로운 출판 장르로 확고하게 뿌리내린 ‘어른을 위한 동화’ 여섯번째 권으로 이하석 시인의 『꽃의 이름을 묻다』가 나왔다.
중견시인 이하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야생화 이야기, 순정한 기다림의 미학
『꽃의 이름을 묻다』의 진정한 주인공은 야생화들이다. 현호색 복수초 은방울꽃 구슬붕이 하늘말나리 원추리 으아리 패랭이 구절초 등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야생화들이 이야기의 곳곳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저 야생화들은 지난 50여 년간, 근대화의 그늘 속으로 밀려나, 특히 도시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신세대들에게는 ‘매우 낯선 고유명사’가 되고 말았다. 지은이는 우선, 이 야생화들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야생화에 얽혀 있는 전설과 야생화가 저마다 지니고 있는 생태를 하나하나 일러주면서 ‘도시에서 태어난 세대’들에게 생명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을, 그리고 우리가 통과해온 고난에 찬 역사를 들려준다.
그러나 위와 같은 메시지는 ‘하늘말나리’ 같은 할아버지와 ‘구슬붕이’ 같은 고아 소년이 엮어내는 슬프고도 맑은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일제 강점기하의 가야산 자락. 부모를 잃은 떠돌이 고아 소년이 우연히 찾아든 산골 마을에서 평생을 야생화를 가꾸며 살아가는 노인을 만난다. 처음 마주치는 아름다운 들꽃들의 향기에 끌려 노인과 함께 꽃을 가꾸며 살아가는 소년의 마음에는 노인이 들려주는 꽃에 얽힌 사연과 수많은 들꽃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의 간절함과 외로움이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을 깨우쳐가는 소년의 가슴에도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꽃이 저절로 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일본 순사를 때려눕히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마을을 떠난 순이 삼촌과,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돕다가 경찰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시대에 눈뜨는 한편, 순이와 만나면서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성큼 성장한다. 할아버지가 신신당부한 것을 어긴데다가 더 큰 세상에 대한 동경이 겹쳐지자, 소년은 집을 떠나 남사당패와 어울려 남도 지방을 떠돈다. 날마다 야생화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동구밖까지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이제 소년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우리들이 외면해온 야생화―우리들의 역사이고 얼굴이며 생명
일찍이 한국 서정시의 한 맥을 계승하면서 시단에 나온 이하석 시인은, 80년대 중반 이후 도시 문명의 일그러진 풍경을 세밀화로 포착해왔다. 90년대 들어 다시 자연과 생명의 세계로 회귀하고 있는 이하석 시인은, 시인이 되기 이전부터 이 야생화 이야기를 가슴에 품어왔다. 이하석 시인이 30여 년 만에 펼쳐놓은 이 ‘꽃의 이름’들은 바로 우리들이 외면해온 우리들의 삶이고 시대이고 역사이며 마침내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다. 고아 소년을 키우는 할아버지의 기다림, 꽃과 소녀를 만나며 성장하는 고아 소년.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저마다 제 이름을 갖는 청정한 삶들이 야생화의 전설과 겹쳐지면서 들꽃 같은 향기를 흩뿌리는 것이다.
꽃의 이름은 곧 역사의 이름이고, 인간의 이름이며, 생명의 이름이다. 세상에 ‘이름없는 꽃, 이름 모를 꽃’은 없다. 지은이는, 꽃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지향이 달라진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꽃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자연과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고, 꽃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그만큼 자연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으로 인하여 모든 생명이 공멸의 위기에 처한 이때, 꽃 이름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소중한 삶의 척도이자,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반드시 복원시켜야 할, 새로운 삶의 상징이자 은유이다. 고아 소년이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꽃 이름을 배우는 과정과 하나가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일제 시대라는 배경을 떠나 지금, 여기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