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수필로 만나는 새로운 백석
한 권에 담긴 백석 문학의 다채로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자 후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여우난골족」 등의 빼어난 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석이 처음 문단에 이름을 알린 것이 1930년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였고 그뒤로도 그가 시 창작 틈틈이 여러 편의 소설과 수필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 문학적 중요성에 비해 비교적 덜 언급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명실상부한 백석 연구의 권위자인 고려대 고형진 교수가 공들여 완성한 『정본 백석 소설·수필』은 백석이 남긴 네 편의 소설과 열두 편의 수필을 정확한 정본으로 갈무리하고 친절한 낱말 풀이와 해설을 보태 백석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백석이 산문 장르에서 이룬 또다른 문학적 성취를 온전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게 해준다.
30여 년간 백석의 문학세계를 깊이 연구해온 백석 연구의 선구자인 고형진 교수는 2007년 『정본 백석 시집』으로 백석 시의 가장 신뢰받는 정본을 확립하고 『백석 시를 읽는다는 것』 등 백석 시 해설서와 백석 시어 사전 『백석 시의 물명고』 등을 펴내며 백석 시에 대한 이해와 연구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그 작업의 연장이라 할 『정본 백석 소설·수필』은 10여 년에 걸친 자료 조사와 연구를 종합한 성과로, 『정본 백석 시집』과 더불어 시와 소설, 수필을 아우르는 백석 문학의 정본을 확정한 뜻깊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오랜 백석 연구에 바탕한 면밀한 정본 작업
고형진 교수는 ‘책머리에’에서 그동안 백석의 산문을 소개한 책들이 없지 않았지만 정확한 기준 없이 소설, 수필, 평문 등을 단순히 모아놓기만 하고 정작 문학성 짙은 산문은 빠뜨려 그의 산문문학의 정수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웠음을 지적한다. 또 작품의 일부 어절이 잘못 인식되거나 누락된 경우가 많고 엄정한 기준 없이 발표 당시와 현재의 맞춤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표기함으로써 작품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꼽는다.
백석 작품의 정본을 확립하는 일은 단순히 원본의 오탈자를 바로잡거나 현대어로 바꾸는 작업과는 다르다. 시와 마찬가지로 산문에서도 백석은 의식적으로 방언과 옛말을 살려 쓰는 일이 많았는데, 이러한 백석의 문학적 특징을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원본의 낯선 표기 중에서 작가의 의도가 담긴 표현을 당시의 맞춤법이나 관습, 또는 착오에 따른 표기와 구별해 엄밀한 기준에 따라 표기를 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발표 당시의 맥락과 백석의 작품세계 전반을 고려해 작품의 장르와 성격을 확인하는 일도 이에 포함된다.
『정본 백석 소설·수필』은 『정본 백석 시집』과 마찬가지로 백석의 소설과 수필 작품의 원본 지면을 일일이 재검토하고 정확히 판독해 기존의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이를 현재의 맞춤법에 맞추어 표기하되 백석 고유의 어휘와 표현을 살려 백석의 산문 작품이 지닌 문학적 향취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리고 백석이 구사한 토속어나 조어 등을 자세히 풀이해 백석의 풍요로운 문학세계에 오늘날의 독자들이 보다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백석 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전문가로서 백석의 어휘와 표현적 특징에 정통한 고형진 교수의 그간의 연구 성과와 경험이 이 작업의 곳곳에 깊이 스며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덕분에 『정본 백석 소설·수필』은 백석의 소설과 수필 작품이 지닌 문학적 의의를 현재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복원하여 옛 작품을 오늘날에 맞게 되살린 귀중한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백석의 시와 함께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의 산문 작품
백석은 시와 마찬가지로 소설과 수필에서도 허투루 쓴 작품이 단 한 편도 없다. 소설은 물론이고 수필에서도 문학적 형식을 중시해 한 편 한 편을 단 하나뿐인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 완성해낸 그의 소설과 수필은 초창기 우리 산문문학의 폭과 수준을 크게 드높인 것이었다.(‘책머리에’, 13쪽)
『정본 백석 소설·수필』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해설이다. 백석 문학에 대한 축적된 연구와 면밀한 작품 독해를 바탕으로 한 고형진 교수의 해설은 백석의 소설과 수필 한 편 한 편을 그의 문학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조망 속에서 읽어냄으로써 백석 산문문학의 정수를 또렷이 보여준다.
해설에서 고형진 교수는 「단풍」 「당나귀」 등의 수필이 시로 잘못 간주되곤 한 것을 발표 지면의 성격과 작품의 표현 양식을 면밀히 검토하여 바로잡고, 수필 「가재미·나귀」에서 보인 가자미와 나귀에 대한 애착이 얼마 뒤 발표한 시 「선우사膳友辭」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바탕이 되었음을 확인하며 백석 산문의 문학적 의미를 그의 시와의 연관 속에서 짚어낸다. 그의 산문을 이효석, 김기림, 김동리 등의 당대 작품들과 나란히 비교하는 대목도 백석의 문학사적 맥락과 개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발표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그와 연관된 백석의 전기적 사실을 적절히 짚어주는 점도 작품 이해에 긴요하다. 백석이 소월을 비롯해 정주 오산학교에서 맺은 인연들을 추억하는 수필 「소월과 조선생」에 대한 해설은 근대 초기 우리 문학과 역사에서 오산학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게 해주며, 「슬픔과 진실」 「조선인과 요설」 등 만주 시절 백석의 신문 기고문은 당시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현실과 백석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해설을 통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백석이 네 편의 소설을 통해 보여준 독특한 형식적 시도이다. 그는 문단 등단작인 「그 모母와 아들」에서부터 마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문을 소설의 중요한 축으로 삼는 개성적인 형식을 보여주었으며, 「마을의 유화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에서는 동물뿐 아니라 무생물까지 의인화해 묘사하여 생동감 있는 장면과 서사를 만들어냈다. 또 「사생첩의 삽화」에서는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병치하는 독특한 형식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가 시에서 보여준 독자적인 양식적 성취가 소설 장르에서도 또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서사성과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시적 묘사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석은 소설과 수필에서도 시에 못지않은 독특한 문학적 향취를 품은 소중한 유산을 우리 문학에 남겨놓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을 사랑한 시인의 친근한 면모를 새삼 확인하고, 한편으로 그간 눈여겨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백석의 문학을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정본 백석 소설·수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