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모든 것의 정신이라면 인간의 정신은 인간의 신이다!”
고독한 지성은 어떻게 시대를 밝히는 별이 되는가
모든 학문을 집대성한 대작 『새로운 학문』이 완성되기까지
솔직하게 써내려간 지적 성장 과정의 고백록
그리고 청년기에 쓴 단 한 편의 시「절망한 자의 사랑」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이자 역사학자 조한욱 교수가 번역한 『비코 자서전』은 미숙했던 청년 시절의 잠바티스타 비코가 원숙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대해 스스로 기술한 고백록이다. 수백 년 전에 쓰인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문체는 현대적이며, 문학과 역사, 철학의 토양에서 구워낸 한 편의 묵직한 성장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또 『비코 자서전』은 유럽의 변방이라 불렸던 나폴리에서 지식인들의 동호인 모임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와 같은 조직을 통해 어떻게 인맥이 형성되고, 그것이 학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구조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나폴리를 넘어 유럽의 세계에서 학자들 사이의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어떤 평판이 형성되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어 17~18세기 당대 지식인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풍속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다.
1725년 비코가 쉰일곱 살이 되던 해에 완성한 이 책은 학문의 길에 들어서는 젊은이들에게 길잡이가 될 글을 써달라는 베네지아의 귀족 포르치아 백작의 계획의 일환으로 집필되었다. 1728년 베네지아에서 500쪽 정도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여덟 명의 저자들 중 비코의 글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혔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당시까지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지 않은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취했으며 게다가 당시로선 혁신적인 ‘지적 전기’였기 때문이다.
『비코 자서전』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비코가 스스로의 사유 체계를 형성해간 과정이다. 비코는 특정 학파에 속한 적이 없고, 특별히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적도 거의 없다. 비코의 부친은 서점 주인이었다. 그 덕분에 비코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그가 섭렵한 주요 저자들만 살피더라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교부철학자와 스콜라철학자, 로마의 법학자, 르네상스시대의 인문주의자들, 베이컨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같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철학자들, 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 같은 법학자들에 달한다.
방대한 독서의 분량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책을 읽었던 방식이다. 그는 비판적인 독서를 통해 자신이 읽은 저자들의 사유 체계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논박하며 극복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로부터 받아들일 것을 선별한 뒤 그런 점들을 종합하여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만들어갔다. 당대의 명망 높은 철학자 칼로프레세가 고대의 에피쿠로스에 빗대어 비코를 “스스로를 가르친 사람(autodidalscalo)”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였다.
“내가 재가 되어버린다 해도 오명을 감수할 것이오.”
개인적 불행을 인류 행복에의 기여로 승화하다
『새로운 학문』에 이르는 길, 『비코 자서전』
한 인간의 저작은 단순하고도 명백하게 그 자신의 삶에서 나온다. 축적된 경험을 소재로 삶과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상상함으로써 쓰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비코 전문가 크로체는 “비코의 『자서전』은 『새로운 학문』과 같은 정신 속에서 씌어졌다”고 갈파한 바 있는데, 그의 말마따나 난해하기로 유명한 그의 필생의 업적 『새로운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서전』 속 비코의 생애를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그 지름길이 될 수 있다.
비코는 일곱 살 때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섯 시간 넘게 실신한 적이 있다. 두개골 골절에 여러 부위에 걸쳐 다량의 뇌출혈이 있었다. 의사는 그가 꽤 장시간 기절해 있던 사실을 감안하여, 이 아이는 죽거나 또는 회생하더라도 바보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행히 그 어느 쪽도 현실이 되지 않았는데, 사고의 후유증은 다르게 나타났다. 상처가 아물면서 점점 우울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변해간 것이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데다 가세마저 심각하게 기울었다. 이 때문에 그는 바톨라에 있는 로카 가문에 들어가 가정교사로 지내면서 9년을 보내야 했다. 이 기간은 그에게 법학과 시에 집중하고 진척하는 데 보탬이 된 시간이었다.
서른한 살이 되던 1699년에는 스스로 명예로 여겼던 왕립 나폴리대학교 수사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많은 철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형이상학에 대해 처음으로 논의다운 논의를 할 수 있었다. 비코는 『자서전』에 이즈음 매 학사 연도를 시작하는 10월 18일에 행한 연설들도 수록하고 있다. 그 연설문들은 수사학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훗날 비코가 『새로운 학문』에서 보이는 학문의 종합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1723년에는 나폴리대학교 법학 교수 공개 모집이 있었다. 실력은 누구보다 월등했지만 대학 내의 인사 및 정치 문제에 둔감했던 관계로 탈락했다. 큰 실망이 따랐지만, 그 이후 비코는 나폴리의 대학 공동체 내부에서의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어떤 희망도 포기한 채 자신의 심원한 사상을 배양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 결실로 태어난 것이 바로 『새로운 학문』이다. 비코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학문 자체를 포기하거나 그것을 위해 분투했던 것을 후회하게 만들었을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라는 신의 섭리였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적고 있다.
『비코 자서전』 한국어판 출간의 의의
작년 말 역자는 『새로운 학문』 완역을 마치고 독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독자들의 요청에 여러 번의 강연을 진행하면서 비코의 생애와 사상을 알릴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비코의 성장 과정과 주변 환경, 나아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면 『새로운 학문』의 의미나 중요성이 다소나마 친밀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비코 자서전』의 한국어 번역 출판은 『새로운 학문』에 무난히 이르기 위한 징검돌이라는 점 외에도 몇 가지 큰 의미를 지닌다. 먼저 세세한 것으로서 현행 이탈리아 표기법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베네치아’, ‘피렌체’, ‘로렌초’, ‘칸초네’ 등의 표기를 ‘베네지아’, ‘피렌제’, ‘로렌조’, ‘칸조네’로 바꾼 것이다. 현지 발음과 다소 차이가 있는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대한 이의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는데, 역자는 이 책을 기점으로 함께 적극적으로 그 대안을 논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역주는 가능한 한 많은 번역본들을 참고하면서 상세하게 달았다.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뿐 아니라 훗날 누군가 비코 연구를 하게 된다면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역자의 배려가 담겨 있다. 미국과 일본과 독일에서 이루어진 기존 번역은 모두 이 책과 저본이 다르다. 그 번역본들은 베네데토 크로체와 파우스토 니콜리니가 공동으로 편찬하여 1929년에 라테르자 출판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사용했다. 본문은 동일하지만 니콜리니가 단독으로 출간한 이 책의 저본과 니콜리니가 크로체와 함께 공동으로 편집한 그 판본은 각주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 두 판본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자서전이 끝나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본은 비코가 집필을 마쳤던 1725년에서 끝나는 반면, 크로체와 니콜리니가 함께 편찬한 저본에서는 그 이후 비코의 말년과 사망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 70년 이상이 지난 뒤 나폴리의 학자 빌라로사 후작이 덧붙인 부분까지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나머지는 비코에 대한 타인의 ‘전기’이지 비코의 ‘자서전’은 아니다. 그것이 이 책에서 그 부분을 부록으로 처리한 이유이다.
또 비코의 속마음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진 장시 「절망한 자의 사랑(Affetti di un Disperato)」 번역 전문을 당시의 원문과 함께 부록으로 실었다는 점도 새롭다. 이 시는 비코의 청년기에 해당하는 1686년에서 1695년에 걸쳐 바톨라의 성에 거주하던 시기의 마지막 무렵에 쓴 것이다. 그동안 유수의 비코 연구자들에 의해 비코의 철학적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시로 해석돼왔지만, 역자는 거기에 반대하여 청춘기 비코가 사랑의 고뇌를 토로한 관점으로 접근한다.
시가 절절한 감정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청년 비코에게 가장 절실한 눈앞의 현실에 대한 토로였다. 앞서 말했던 나폴리의 신문 기사가 지적하듯 비코는 줄리아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의 제목 “절망한 자의 사랑”은 “절망한 자의 고통”이라고 옮겨도 무방해 보인다. 줄리아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줄리아 역시 비코에게 비슷한 감정을 품었던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신분의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비코의 연정이 더욱 슬픈 것은 후견인의 보호를 받는 열등한 존재로서 그 결혼식의 축시를 그가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_「옮긴이 해제」, 268~269쪽
여기에는 단지 비코의 연정을 밝히는 것 이상의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역자는 「절망한 자의 사랑」에 대해, 이는 비코 스스로 그 속내를 결코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던 사회적 차별에 대한 분노와 민중에 대한 애정을 행간에 감춘 시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풀이한다. 그것이 비코가 품고 있던 민중사관의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