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윤리는 흥미롭고 일상적인 학문이다
의료윤리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버거움을 안긴다. ‘의료’만으로도 전문적인 영역으로 느껴지는데, 난해해 보이는 ‘윤리’까지 더했으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다음의 사례를 보면, 의료윤리라는 학문이 전혀 어렵지 않고 누구나 고민해봐야 하는 유용한 물음을 던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60년 가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온 어떤 여성이 남편이 죽고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다른 남성과 때로 성관계를 갖는다. 이 여성의 아들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직원에게 관계의 진전과 신체적 접촉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 외의 다른 사람과 이런 식으로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여겼을 겁니다.” 직원이 개입하여 새로운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막고 두 사람을 떨어뜨려놓아야 할까?
앤드루스는 평생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살아왔다. 현재는 치매를 앓으며 요양병원에서 머물고 있는데, 어느 날 병원에서 열린 참전기념일 행사에 앤드루스가 참여하게 됐다. 앤드루스가 치매를 앓기 전 지켜왔던 가치(양심적 병역거부)를 아는 가족들이나 직원들은 그를 만류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치매가 걸린 현재의 앤드루스가 원하는 바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정당한 선택은 무엇일까?
로버트와 해나 커플은 아이를 낳았는데, 아직 밝혀지지 않는 유전 질환이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둘째 아기가 태어날 경우 비슷한 질환을 앓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 위해 유전학자를 찾아갔다. 유전학자는 검사를 통해 둘의 유전자 조합으로는 유전 질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없으며 로버트가 첫째 아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과연 그는 이 사실을 로버트와 해나에게 알려야 하는가?
의료윤리에서 펼치는 논리는 단지 의료종사자만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아팠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며, 미래에 아플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료라는 장치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각자 나름의 견해를 지녀야 하며, 그 견해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저 어느 나라의 의료제도가 좋다거나 국가가 이런 부분을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료를 단순히 남의 일로, 다른 사람이 결정한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절차로 놓아둘 뿐이다. 결국 의료를 통해 도움을 구하고 치료를 받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의료윤리에 관한 친절하고 명료한 책
이 책은 질환과 질병을 치료하고 관리하며 그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모든 측면을 망라하고 있다. 보건·의료 전문가가 함께 일하는 광범위한 활동 모두를 다루며, 명백하게 의료적인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윤리 이슈라 해도 그것이 병원, 수술실, 요양원, 심지어 환자의 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돌봄과 관련된 것이라면 살피고 있다.
1장에서는 의료윤리의 특수성과 기여를 통해 의료윤리가 흥미로운 이유를 파악한다. 2장에서는 윤리적 사고라고 불리는 4가지 도구를 이용하여 조력사에 대한 논증을 펼친다. 3장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섭리 논증,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 등 8가지 도구가 들어 있는 사고도구함을 통해 의료윤리의 기술적 측면에 집중한다. 4장과 5장에서는 의료윤리가 비판자로서 하는 역할을 보여주면서 관습적 사고에 대해 지적한다. 6장에서는 치매에 걸린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사례를 통해 윤리적 이해와 좋은 돌봄 행위를 가져오는 방법을 다룬다. 7장에서는 정책입안자가 보건의료의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를 들여다본다. 8장에서는 유전병 검사를 하러 온 커플에게 뱃속에 든 아이가 친부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전학자가 말해줘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며 의료인의 비밀유지의무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9장에서는 현대 윤리의 가치와 의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취하는 개인주의적 접근이라는 전방위적인 경향에 질문을 던진다. 10장에서는 의료윤리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의료윤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 과학적 기술적 발전에 대한 예측, 문화적 변화와 국제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의료연구 등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