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환상미, 거침없는 전개
환락의 섬 제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 틈도 없이 이야기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흡인력을 자랑하며 굳건한 마니아층을 형성한 소설가 김사과의 신작 장편소설 『바캉스 소설』이 출간되었다. 인간성을 통제하는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특유의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세계관을 선보여온 김사과에게는 지금껏 한국소설에서 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는 기대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바캉스 소설』은 회사에서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K-직장인’들이 제주로 바캉스를 떠나 펼치는 코믹하고도 잔혹하며 극도로 환상적인 모험을 그려 보이며 이러한 기대에 부응한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게 100억원을 쥐여주고, 직장인들이 그들의 바람대로 경제적 자유를 이룬다면 과연 행복해질 수 있는지 관찰한다. 소설 속에서 걸핏하면 술과 약물에 취하며, 명품 잡화를 몸에 걸치고 슈퍼 카의 핸들을 쥔 채 절규하는 캐릭터들은 부에 대한 현대인의 판타지를 냉소적으로 꼬집는다.
『바캉스 소설』은 눈앞에 그려지는 듯 생생한 장면 묘사와 미적으로 긴장된 미장센을 통해 소설에서도 ‘영상미’를 논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독특하고 전위적일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시선으로 재탄생한 대도시의 사무 공간과 제주의 풍경에서 광기 서린 아름다움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김사과 소설이 이루어낸 또 한번의 성취이다. 이 매력적인 무대 위에서 잔혹한 범죄가 발생하고, 피해자의 유령이 곳곳에 출몰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면이 뒤집히고, 사건의 전말은 예기치 못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며 스릴을 자극한다. 무엇보다도 유희로서의 읽기를 염두에 두고 쓰인 이 소설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 우리는 이 질주하는 서사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회사에서 버림받은 두 직장인 남녀가 유배된 곳은
매끈하던 풍경이 핏빛으로 물드는 영원한 여름의 세계
지금, 코믹하고 선정적이며 잔혹한 바캉스가 시작된다
기후 위기로 인해 제주도가 열대 지역으로 변해버린 근미래, 세계적인 규모의 금융 컨설팅 기업 FWIS에서 일하던 이로아는 회사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주식을 통한 경제적 자유를 꿈꾼 대가로 회사로부터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다. FWIS 한국 지사장 뤼카스 휘스먼은 백인 사업가로서 자본주의의 현신과도 같은 인물이면서, 프랑스문학을 향유하고 사자성어를 구사하며 이로아가 지닌 체제 전복에 대한 로망에 공감하는 것으로 자신의 오픈 마인드를 과시하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그는 이로아가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이후로 회사생활에 여유롭게 임하며 기업의 질서를 동요시키자 냉정하게 이로아를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정신과 약물을 처방받아가며 헌신적으로 일해왔음에도, 이로아는 더이상 회사에 삶을 완전히 내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승진을 가장한 인사이동을 겪는다. 곧이어 감당하기 버거운 프로젝트를 할당받게 된 절체절명의 순간, 이로아의 본능적인 투자 감각은 그녀에게 100억원이 넘는 수익을 안겨주고, 이로아는 퇴사 후 제주로 부유한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효용가치를 잃고 방출되어 온 신해남과 얽히게 된 이로아는 점차 그와 진한 관계를 맺는다. 제주에서 사업을 한다는 신해남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이로아는 자신이 도망쳐온 제주 또한 개발의 광풍에 휘말려 자본에 잠식되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제주에 도착한 후 초호화 리조트의 최첨단 객실에 머물면서도 밤마다 잠을 설치던 이로아는 어느 날 한밤중에 나타난 여자아이의 환영을 본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기억을 되살려 이로아는 신해남과 함께 여자아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지난밤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던 여자아이가 싸늘한 주검이 된 것을 발견한다. 여자아이의 죽음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 이로아는 신해남과 함께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을 맹목적으로 좇는 이 세계에서,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면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메워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그러나 신해남의 친구들을 비롯해 섬에 도사린 위험을 감추려는 세력이 이로아에게 접근하며 점차 그녀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투자자 자격으로 제주에 내려온 뤼카스 휘스먼과 다시 마주치게 되면서, 이로아는 자신이 거대한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는데……
성공적인 투자에 따른 인생 역전, 여유로운 라이프 스타일, 자유로운 쾌락 추구에 대한 판타지 등, 『바캉스 소설』은 현대인이 어느 때보다 열광할 다양한 설정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최적의 지점들을 자극한다. 현대사회의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그럼에도 그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통탄을 기발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한데 녹여낸 이 소설은 김사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각적인 스타일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
‘읽는’ 소설에서 ‘보는’ 소설로
국내 최고의 작가들이 만들어나가는
무수한 취향의 테마파크!
흥미진진하고, 몰입감 높으며,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남기는
웰메이드 장편소설의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는 ‘플레이(PLAY)’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소설 읽기를 ‘놀이’로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문학 테마파크를 지향한다. 또한 한 장면 한 장면 허투루 쓰이지 않은 감각적이고 탄탄한 장편소설을 엄선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함으로써 오감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문학을 선보이고자 한다. 앞으로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는 평단과 독자에게 인정받는 국내 최고의 작가들과 함께하며 재미와 감동을 함께 전하는 뛰어난 작품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본문 중에서
조영민 팀장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이로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발리섬 남동쪽 누사두아 해변의 해질녘 하늘의 빛깔이었다. 네온 핑크와 오렌지, 레몬옐로와 일렉트릭 퍼플 빛으로 물든, 금빛 진주 가루가 흩뿌려진 듯 나른하게 빛나는 구름들이 휘핑크림처럼 뭉게뭉게 늘어선 완벽한 꿈의 하늘을 그녀는 정녕 목격했던가.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사장에 두 발을 파묻은 채 그녀가 바라본 것이 과연 진짜 석양이었을까. 꿈같던 무지갯빛 양떼 아니 구름떼는 실재했던 걸까. 아니면 독한 칵테일에 취한 그녀가 만들어낸 환상이었을까. 터질 듯 부풀어오른 해가 오렌지빛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짙푸른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이, 거대한 거미줄 같은 그림자가 겹겹이 내려앉는 초현실적인 해변의 이미지가, 감미로운 독약 같은 쪽빛 파도가 믿을 수 없게도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 더욱 걸쭉해져가는 핏빛 노을 아래 영원한 듯 펼쳐진 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파도 소리, 반복되는 물결의 소음은 진정 환각적이었다……(9~10쪽)
직장인들이 하루 중 아주 잠깐 동안 수용소에서 풀려나는 점심시간, 그들이 어떤 미치광이 소리를 내며 울부짖든지 그것은 이해를 해줘야만 한다고 이로아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게 다 돈 때문이니까. 우리, 돈에 목줄 걸린 노예들…… 이 끔찍한 디지털 목화밭을 탈출하는 데 필요한 돈의 액수는 과연 얼마일까?(30~31쪽)
그녀는 끝난 건지도 몰랐다. 적어도 FWIS에 그녀의 자리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FWIS를 제외한 그녀의 삶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론상 그녀에게는 별다른 삶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억울함을 느꼈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렇게나 납작하게 눌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이고 난 뒤에도 남은 감정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34쪽)
역사도, 과학도, 민주주의도,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심지어 돈도 인생도 사랑도 그녀는 믿지 않았다. 쉽게 말해, 허세가 극에 달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자기 삶의 매 순간에는 대단히 진심을 다해, 누구보다도 진정성 있게 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서울의 화이트칼라 인간이기도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평균적인 서울의 화이트칼라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허세가 극에 달한 미치광이처럼 느껴진다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들의 세계는 믿을 수 없이 독아론적이기 때문이다.(51쪽)
과연 풍경은 한층 더 초현실주의적이었다. 환한 달빛이 고요한 호수 가득 떠 있는 빅토리아 수련의 거대한 잎사귀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잎사귀와 동시에 날아오르는 것만 같잖아…… 곧 그녀의 눈앞에서 거대한 수련의 잎사귀들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잎사귀들 사이로 꽃대가 길게 자라나더니 순백의 꽃봉오리들이 부풀어올랐다. 그 가운데 가장 길고 크게 자라난 꽃대가 커다란 보름달 앞에 거대한 꽃을 피워 올렸고, 꽃은 짙은 이국의 향기를 풍기며 천천히 분홍빛으로 물들었다……(208쪽)
—그래, 돌았다. 그래, 내가 완전히 돌았다고 쳐. 근데 왜 그렇게 됐는지 안 궁금해? 그게 다 저 사람들 때문이라구! 왜 그걸 몰라줘요? 저 사람들이 먼저! 나를 돌게 만든 거라구요! 그러니까 애초에 저쪽이 더 미친 거라구! 진짜는 저쪽이라구!(2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