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인호의 『왕도의 비밀』을 보면 작가는 우리 고대사의 각종 유물에 나타나는 우물 정井 자 문양의 비밀을 찾아 국내 전역과 중국 및 일본을 탐사했고, 그것이 광개토대왕을 상징하는 부호라고 결론지었다. 최인호는 井 자 문양을 하백河伯의 물과 백두산 천지의 물로 연결시켰으며 하백의 물은 그의 외손자인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과 연관이 되고 천지의 물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라는 이미지와 만주 벌판을 호령한 광개토대왕의 이미지와 연관이 된다. 소설의 이러한 이야기는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황당한 결론이 아닐 수 없지만 완전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井 자 문양이 팔방의 방위를 나타내는 구궁도에서 발전한 것이라면 보편성과 객관성 차원에서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하도=사방오위도, 낙서=팔방구궁도
이러한 최인호의 소설로 그려낸 고대 서사보다 더욱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고대 문양 탐구의 획기적인 성과물이 번역 출간되었다. 아청阿城이 지은 『낙서하도: 문명의 조형 탐구』가 그것이다. 우리에게 하도낙서河圖洛書로 더욱 잘 알려진 전설 속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다. 하도낙서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을 보자.
고대 중국에서 예언이나 수리數理의 기본이 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합친 것으로, 『주역周易』의 원초적 형태이며 전한前漢 말에서 후한後漢시대에 이루어졌다. 「하도」는 복희씨伏犧氏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으로, 용마의 등에 그려진 무늬에서 하늘과 땅의 생명의 율동상을 깨닫고 이를 그려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었다고 한다. 「낙서」는 하나라의 우禹가 낙수洛水에서 얻은 글로, 낙수에서 나온 커다란 거북의 등에 드리워진 여러 개의 점에서 천지 변화의 기틀을 깨닫고 이것으로 우는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을 삼았으니 바로 「홍범구주洪範九疇」라고 한다.
하지만 복희씨나 우 등 신화 속 인물들이 강에서 지혜를 건져올렸다는 것은 현대의 합리적 이성으로 받아들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거기엔 반드시 현실적인 내력이 있을 텐데 중국 고전에 익숙한 독자들은 다들 하도낙서의 기원에 대해 한번쯤은 궁금해봤을 법하다. 아청의 『낙서하도』는 바로 그 궁금증을 말끔히 풀어주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아청阿城은 중국 신시기 심근문학尋根文學을 대표하는 유명한 소설가이자 미술대학에서 도형과 문양을 강의하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낙서」와 「하도」 문양의 근원을 탐색하여 기실 그것이 무슨 오묘한 그림이 아니라 북극성 중심의 방위를 나타내는 도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하도」와 「낙서」는 본래 「사방오위도四方五位圖」와 「팔방구궁도八方九宮圖」인데, 이 두 가지는 모두 방위를 나타내는 한 가지 성격의 도안일 뿐이고, 애초의 「하도」는 「천지자연하도天地自然河圖」로 명명된 도안으로 현재의 「음양태극도陰陽太極圖」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음양도」란 흰 물고기 문양과 검은 물고기 문양이 태극처럼 마주보며 도는 바로 그 그림이다().
고대 북극성 신앙이 그림으로 구체화된 것
그런데 중요한 점은 「낙서」의 「구궁도」가 신석기시대 이래로 팔각 별무늬八角星紋로 형상화되었고, 그것이 더욱 간략화되면서 ‘米’자 문양의 부호로 상징화되어 「하도」의 나선형 돌기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米’자 문양 즉 「낙서」 부호는 「하도」의 중심에서 흔히 마름모꼴(◇)로 대체되는데, 그것은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天極의 상징이므로 「낙서」의 방위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사방과 팔방으로 퍼져나가는 천극 신앙의 구현체가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아청이 기존의 명명법인 「하도낙서」를 뒤집어 「낙서하도」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팔방의 방위를 표시하는 「낙서」 부호는 이미 신석기시대에 정형화되었고, 이후 그것은 또 「하도」의 중심으로 들어가 천극天極: 北極星을 상징하는 핵심 도안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하도」 부호는 「낙서」보다 늦은 청동기시대에 극성하여 상나라와 주나라의 각종 정鼎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상·주 청동기의 도철饕餮은 괴물이 아니라 천극신과 동청룡
계속해서 아청은 「낙서」와 「하도」가 북극성 중심의 천극신天極神 신앙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담한 상상력을 펼친다. 아청에 의하면 천극신 부호는 상·주 청동기에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여태까지 우리가 도철饕餮로 알고 있는 도상도 사실은 천극신과 동청룡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천극과 청룡, 천극과 거북, 천극과 주작, 천극과 나비도 등의 도안도 모두 아청에 의해 천극신 신앙체계로 재해석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상나라 말기 혹은 서주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호식인유虎食人卣에 대해서도 아청은 지금까지 호랑이가 노예를 잡아먹는 모습으로 설명해온 기존 학계와는 달리 백호가 천극신을 보호하는 형상으로 재해석한다. 말하자면 백호는 서쪽을 상징하는 신수神獸이므로, 동쪽 상나라를 멸망시킨 서쪽 주나라가 천극신을 품고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전부 기존 주류 학계의 논리와 다른 점이다.
귀장역歸藏易에서 주역으로의 변화는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변화
아청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북극성 중심의 천극신 신앙 체계를 바탕으로 중국 선진철학의 논리와 특징까지 규명해내려 하고 있다.
아청의 설명은 이렇다. 상나라는 천극신 신앙을 신봉한 모권母權 사회다. 그러나 주나라에 이르면 상나라의 천극신 신앙은 계승했지만 부권父權이 모든 권력의 중심에 놓인 사회가 된다. 역易도 상나라는 곤坤을 중시하는 『귀장歸藏』을 썼지만 주나라는 건乾을 중시하는 『주역』을 썼다. 모권 사회는 음陰, 유柔, 약弱, 허虛, 자雌, 하下 등의 가치를 숭상하고, 부권 사회는 이와 반대로 양陽, 강剛, 강強, 실實, 웅雄, 상上 등의 가치를 숭상한다. 이로 인해 주나라에서는 부권 중심의 전쟁과 폭력과 패권이 만연하면서 천극신 신앙도 무너져 내린다. 주나라가 천극신 신앙을 잃고 통치 권위를 상실하자 예악이 붕괴되면서 짐승 집단보다 더 극악한 사회가 도래한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등장은 주나라가 천극신 신앙 체계를 잃어버리는 시기와 맞물린다. 그중 공자와 노자가 선진철학의 각성을 대표한다. 공자는 현실에서 인仁과 예禮를 수단으로 사회 질서의 회복을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실현된 태평성대를 소망한다. 이에 비해 노자는 좀 더 복고적인 회귀적 각성을 추구한다. 즉 부권 중심의 주나라 질서를 벗어나 모권 중심의 상나라 질서로 회귀하려 한다. 그것은 바로 천극신 신앙에 바탕한 현빈玄牝의 세계다. 순자를 거쳐 이사와 한비에 이르는 법가는 공자의 예를 이어받긴 했지만 공자가 추구했던 자유의지를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공자 사상을 소외시키고 이질화하여 전쟁과 패권을 추구한다.
노자의 현빈, 공자의 성악론, 장자의 심추
아청은 위의 논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실로 놀라운 주장을 펼친다. 공자는 성악론자다. 극기복례란 인간의 동물성 연원에서 출발한 논리다. 문文이란 자원 점유와 자원 분배 행위에 대한 제한이다. 무武란 인간의 선천적인 동물성이다. 하늘은 양陽이 아니라 음陰이며, 오히려 땅이 양이다. 장자는 심미審美가 아니라 심추審醜의 의미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다. 이 주장들 중에는 이미 개론적인 문제 제기가 된 주제도 있지만 모두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영감을 자극하는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추측」에서 아청은 더욱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명稻作文明은 남중국해, 동중국해, 황해, 발해 등 지금의 바다 밑 대륙붕에서 기원했고, 그것이 중국, 한국, 일본으로 상륙하여 동아시아 특유의 문명을 이뤘다는 것이다. 아청은 이 도작문명의 공통 종교가 바로 북극성을 숭배하는 천극성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바다 밑에서 벼농사가 기원할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 빙하기까지 지금의 동아시아 대륙붕이 모두 육지였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건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논리일 뿐이지만 지금의 바다에 막힌 상상력을 넓혀놓고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이 다시 보이게 된다. 특히 아청은 근래에 중국 동남 해안 지역에서 발굴되는 선사문명 유적은 주위의 자원 조건이나 경제 여건으로 볼 때 그곳에서 발생하기 어려우므로 그 문명의 영역을 대륙붕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물론 이에 대한 타당성 여부는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대담한 상상력은 타성에 젖은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먀오족 의상에 남은 천극신 신앙의 다양한 도상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석기시대로부터 비롯된 천극신 신앙의 도안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아청은 중국 서남쪽 소수민족 먀오족과 이족 등의 전통의상에서 「낙서」와 「하도」 부호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천극신 신앙과 관련된 다양한 도상圖象까지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중국 선사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및 상·주 청동기 문양과 비교하여 일치점과 유사점을 확인한다. 이 책의 올 컬러 사진은 모두 이런 천극신 신앙과 관련된 도상들로 채워져 있다. 문자 텍스트보다 훨씬 많은 양이라 어쩌면 무슨 전시회의 도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이미지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아청의 대담한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증거 역할을 한다. 이는 아청의 분방한 상상력과 함께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