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기억을 체험하는 기계, 증강현실 기술, 엽록체 이식 수술,
육체 부활 장치, 인간관계 예측 분석 앱…
삶의 풍경이 뒤바뀐 시대의 면면
표제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STS SF’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단편이다. 눈앞의 풍경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편집해서 보여주는 증강현실 기술 ‘옵터’가 상용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증강현실 규제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바다 위의 크루즈선에서 생활하며 본인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통솔하는 가상현실에 안주하려는 “옵터 중독자”(9쪽)들의 모습을 그린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사회가 진짜인지, 진짜보다 진짜 같은 거짓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하는 문제작으로,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편집되는 기이한 모습과 가상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들의 서늘한 대화 장면을 통해 근미래의 황량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 가상현실로 도피한 이들의 심리를 다룬다면, 「당신은 뜨거운 별에」는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척박한 섭씨 400도의 행성 금성에서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수정’의 몸에 초점을 맞춘다. 거대 자본을 거느린 어느 탄산음료 회사가 우주로 파견한 과학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사람의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생체 기술을 개발하고, 수정은 몸을 지구의 냉동 시설에 맡긴 채 머리만 금성으로 보내진다. 금성을 탐사하던 수정은 어느 날 과학자들의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회사의 비윤리적인 비밀을 알게 되고 탈주를 계획한다. 소설은 효율성이 극대화된 과학기술의 어두운 면을 한 편의 블랙 코미디로 펼치면서 몸의 소유권을 침탈당한 여성의 울분을 생동감 있게 전한다.
한편,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등장하는 대체 역사소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타인의 기억을 주입받을 수 있는 ‘체험 기계’가 발명됨에 따라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그린다. 유대인위원회는 아이히만을 체험 기계에 넣어 그가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겪고 반성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그 자리에 기자단을 초청한다. 소설은 유대인 공동체와 과학계, 그리고 각국의 기자들의 반응을 다각도로 묘사하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다’라는 도덕적 황금률의 허점이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한다.
연쇄살인마, 성폭력범, 아동 학대범들에게도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러나 그 사연을 굳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단순히 그들이 우리와 닮은 존재여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171쪽)
앞선 세 편의 소설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회공동체 전방위에 가해지는 충격파를 보여주고 있다면, 「나무가 됩시다」와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새로운 기술을 기꺼이 받아들인 채 생활하는 개인의 내면 속 파문을 그려낸다. 「나무가 됩시다」는 피부에 엽록체를 이식하는 ‘그린 라이프’ 수술을 받은 사람이 쓴 수기 형태의 단편이다. 빛을 받아 양분을 흡수하는 식물처럼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있게 된 트랜스휴먼의 모습을 통해, 먹고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살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죄와 그 죄에 대한 완전한 해방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흥미로운 단편이다.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소설 속 화자 ‘장강명’이 슬럼프를 겪으며 얻은 우울증을 떨치기 위해 플라스마 헤어밴드를 착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플라스마 헤어밴드는 집중력을 극대화해 지루한 일에도 강렬하게 몰입하게 해주는 특수 발명품인데, 소설 속 장강명은 이 물건을 쓰며 점차 예상치 못한 위기에 빠진다. 소설 속 헤어밴드와 같은 발명품을 한 번쯤 꿈꿔보았을 작금의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오답을 쌓아가며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구성하게 하는 소설
「아스타틴」은 한 편의 장대한 우주 활극으로, 목성과 토성권에서 우주 사회를 이룩한 천재 과학자 ‘아스타틴’을 그린다. 그는 육신을 무한히 재생할 수 있는 부활 장치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대대로 다시 태어나면서 신적인 존재인 초지능통합체로 거듭난다. 자기 자신을 열다섯 명으로 복제한 그는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과 지능을 지닌 한 명의 개체를 최종 아스타틴으로 선정하는 부활식을 고안해낸다. 세상의 근본적인 생태를 송두리째 바꿀 만한, 길들일 수 없는 야수 같은 기술에 잠식된 포스트휴먼 시대의 이 생존 게임은 읽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마침내 커다란 갈등이 해소되면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결말부는 두말할 것 없이 이 소설의 백미이다.
작품집의 말미에 수록된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관계 지속 가능성을 예측하는 앱이 상용화된 사회를 그린다. 성격도 살아온 배경도 판이하게 다른 ‘이유진’과 ‘송유진’은 우연한 계기로 사랑에 빠지지만, 데이터 예측 앱이 전망하는 두 사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두 사람은 그 예측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끝내 앱의 예측대로 이별하고 만다. 그러나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묘미이다. 아무리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은유된 삶의 우연성과 불확실성은 제거하기도 제어하기도 어렵다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또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 고른 오답”을 선택함으로써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84~85쪽) 것. 급변하는 기술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데 필요한 모험적인 용기와 주체적인 시선은 그렇게 함양되는 것 아닐까.
세상을 좀더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과학 발전과 그에 따른 문제가 뭔지 알 필요가 있다. STS는 교양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이 소설집을 통해 그것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_홍성욱(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추천의 말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을 다 읽고 난 뒤 이 책의 제목을 다시 곱씹는다. 책을 읽기 전 막연하게 떠오르던 이미지가 비선형적인 형태로 질문의 꽈리를 튼다. 장강명 작가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근미래에서 벌어지는 모순적인 상황들을 압축시켜 선명하게 내민다. 밀도 높은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내 안의, 내가 꿈꾸던 세상의 실체를 마주한다. 그것은 서글프고 불편하며, 동시에 짜릿하고 귀한 경험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런 것이다. _천선란(소설가)
인간이란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기 마련인데, 세상을 좀더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과학 발전과 그에 따른 문제가 뭔지 알 필요가 있다. STS는 교양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이 소설집을 통해 그것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_홍성욱(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 작가의 말
STS는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탐구하는 학문 분야다. 과학기술은 이제 여러 영역에서 실존적 위기를 일으키고 있고, 나는 문학이 여기에 대응해야 하며,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우리는 아주 깊은 차원에서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즉, 우리는 기술로 인해 ‘변질’된다. 그 변질을 포착하는 것이 STS SF의 목표다. _‘작가의 말’에서
■ 책 속에서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다 주관적 현실 속에서 삽니다. 그리고 누구한테나 크건 작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객관적 사실이 있는 거고요. 저희한테는 지난 대선 결과가 그랬죠. 어떤 치들은 선거 결과 자체를 부정하면서 부정투표네, 개표 조작이 있었네 하고 음모론을 떠벌렸죠. 주관적 현실을 들고 객관적 사실과 싸우려 한 거죠.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선 결과가 농담 같았고, 그냥 그걸 농담으로 즐겨보기로 했습니다.”
_「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17쪽
“증강현실 기술 이전에도 꿈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많았어요. 아니,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 그래요. 우리는 매 순간 복잡한 우리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요.”
_「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24쪽
“우리는 금성에 머무르면서 외로워하고 기뻐하고 욕망하고 결단하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그런 고민을 인간의 시계에 맞춰서 인간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배우 겸 초벌 각본가가요.”
_「당신은 뜨거운 별에」, 65쪽
주변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오래도록 고군분투하는 상황을 가정해보라. 특히 그 도움이 자신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타인에게는 아주 사소한 종류인 경우를 그려보라. 결국엔 누구나 스스로를 처절하게 버림받은 존재로 느끼게 되고야 만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물과 자신과의 거리를 계산하게 된다. _「당신은 뜨거운 별에」, 97쪽
아인슈타인 박사는 “타인의 마음은 우리에게 달보다 더 아득히 먼 곳”이라고 말했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의 환희와 고통을 바로 그 사람이 느낀 그대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인의 삶, 단체의 규칙, 정치와 사회정책, 문화가 모두 바뀔 것이고, 더 나아가 문명 전체가 변화할 것”이라며 아인슈타인 박사는 힘주어 말했다. _「알래스카의 아이히만」, 126~127쪽
삼십칠 년간 살면서 꿈만 꿔온 기술이었다. 나는 자이나교 수행자처럼 단식을 하다 굶어죽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 역시 나의 생명을 살해하는 행동이라고 봤다. 그린 라이프 수술은 인간이 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굴레에서 해방될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줬다. _「나무가 됩시다」, 188쪽
“어느 순간부터 진짜 삶에 가까운 소설을 쓰고 싶어지더라고요. 삶에는 복선도 없고 플롯도 없잖아요.” _「사이보그의 글쓰기」, 222쪽
아스타틴은 우리를 낳은 아버지이고 영적 스승이며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우화이자 우리 문명의 나아갈 바를 알려주는 신화라고, 나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개소리에 청중들이 감동한다. _「아스타틴」, 346쪽
그는 자신이 예측 불허의 인간이 됐다고 믿고 싶었으나, 모든 추천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과 반대로 하는 사람은 기실 똑같은 정도로 예측 가능했다. _「데이터 시대의 사랑」, 386쪽
예측이 옳건 그르건 간에 그 자신이 보지 못하는 그의 내부와 미래를 누군가 그렇게까지 깊이 들여다보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_「데이터 시대의 사랑」, 3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