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다 지로(淺田次郞)는 일본 문단에서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손꼽히는 작가다. 그의 첫 소설집인 『철도원』은 1997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숱한 화제를 낳으며 140만 명이 넘는 독자들을 슬픔과 감동에 젖게 했다. 여기에 117회 나오키 상 수상은 이 소설집에 대한 확실한 문학적 보증이 되었다. 『철도원』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 중에서 「철도원」과 「러브 레터」 두 편이 영화화되었고, 「츠노하즈에서」와 「백중맞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는데, 이는 나오키 상 제정 이래 최초이자, 단일 소설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들이 영상화된 이례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영화 「철도원」은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다.
탁월한 이야기꾼
그렇다면 이같은 폭넓은 공감과 호응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선, 아사다 지로는 그 누구보다 소설의 기본에 철저한 작가다. 그의 소설을 펼친 후 다 읽지 않고 덮어버리는 사람은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거나, 소설 읽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가 쓴 단편소설의 꼭 알맞은 짜임새와 적재적소의 함정 파기에는 숱한 평자(評者)들이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어떤 계층의 인물 묘사건 그의 손이 닿으면 자연스럽게 저마다의 독특한 표정을 짓고, 그의 문장이 그려내는 장면은 그대로 독자의 머릿속에서 영상이 되어 살아 움직인다. 『철도원』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들이 이를 확인시켜준다.
“탁월한 스토리 구성, 확실한 문체, 그야말로 주옥 같은 여덟 편. 각 편마다 읽는 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일간 현대
“단편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항거의 못질을 하고 싶다는 아사다 지로의 정열이 담긴 소설집. 태작이 단 한 편도 없는 대단한 작품집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그려서 독자를 감동시키는 노련함이야말로 아사다 지로의 미덕이다.―인터넷 북리뷰
눈물의 따뜻한 힘을 믿는 작가
그러나 아사다 지로 소설의 매력은 이러한 장인적 솜씨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매력의 더 깊은 원천은 ‘눈물의 따뜻한 힘’을 믿는 작가의 선의(善意)다. 아사다 지로는 어느 대담에서 “세상의 독자들에게 복음(福音)을 전파하지 못한다면 소설의 가치는 없다. 소설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작가의 소설관은 그의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그리하여 인간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려는 눈물겨운 믿음, 어디에도 악인은 없다는 복음이 그의 소설을 감싼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몰락을 겪은 뒤 뒷골목 불량소년의 길로 빠지고, 20대를 야쿠자 생활로 보냈는가 하면 패션 부티크 경영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 그의 거친 인생 역정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품어낸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한 장편소설의 후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동세대의 작가, 편집자들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갖가지 특별한 계층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어떤 문학 수업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하였다. 작가로서 내가 가진 희귀한 경력은 아마 앞으로도 내게 큰 용기를 줄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집에서 다양한 과거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만남을 통해, 어떤 이들은 스쳐 지나간 나날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잊고 지냈던 사랑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허무하고도 쓸쓸한 사람살이의 행로를 은은하면서도 또렷하게 짚어내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쏟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맑고 깨끗한 슬픔’과 맞닥뜨리게 하는 극도로 절제된, 그러나 따뜻하기 그지없는 풍경은 그것을 빚어내기까지 작가의 삶과 마음이 걸어왔을 고단하지만 속깊은 행로를 자연스레 짐작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90년대를 풍미한 신세대풍의 일본 소설들과는 확연히 갈라진다. 그의 소설에는 낯설고 생경한 관념이 없다. 대신 아주 구체적인 직업 묘사나 소설 공간의 현장성이 그의 작품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그는 늘 보통 사람이 겪게 마련인 흔한 시련과 좌절, 그 속에서 키우는 사랑과 희망의 불씨 위로 시선을 드리운다. 그의 소설에 절제된 슬픔의 눈(雪) 냄새와 함께 기분 좋은 사람의 훈기가 늘 배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40만 일본 독자들의 공감을 넘어 이 소설집이 가지는 보편적인 호소력의 원천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나 임철우의 「사평역에서」 같은 빼어난 서정의 미학에 단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절묘한 이야기 솜씨가 어우러진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은 소설 읽기의 즐거움과 감동을 새삼 느끼게 해줄 드문 자리가 될 것이다.
문학동네에서는 『철도원』에 이어 『은빛비』 『낯선 아내에게』 등 아사다 지로의 다른 작품집들도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순수하고 고귀한 자리
가장 화제가 되었던 표제작 「철도원」은 평생을 철로변에 바쳐온 노(老)역장의 이야기다. 무대는 홋카이도의 눈 쌓인 한적한 마을. 곧 폐선(廢線)될 조그만 종착역 호로마이를 지켜온 오토마츠 역장. 그는 어린 외동딸의 죽음에도,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를 맞고 보내며 역을 지켰다. 폐선과 함께 정년을 앞둔 그의 가슴엔 여전히 식지 않은 철도원의 사명감과 무심하게 떠나보낸 아내와 외동딸에 대한 회한이 교차한다. 눈 쌓인 정초의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기적… 죽은 어린 딸이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음날 그는 눈 쌓인 플랫폼에서 철도원의 생을 마감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던 어린 딸의 환영(幻影)은 그의 전 생애를 위로하는 복음이었다.
야쿠자 밑에서 밥벌이를 하는 건달 인생이 돈벌이 목적으로 위장 결혼을 해준 중국인 여자의 유품에서 서툰 일본어로 쓴 감사와 사랑의 편지를 발견하게 되는 「러브 레터」를 비롯하여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마음 속에 곱게 숨어 있는 순수하고 고귀한 자리를 슬며시 들어올린다. “눈물 많은 사람은 장소를 가려가며 읽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마이니치 신문의 단평이 전혀 과장이 아닐 만큼 아사다 지로의 인간 이해는 훈훈하면서 아프다. 그림을 그리듯 눈앞에 펼쳐보이는 정밀한 묘사와 탄탄한 서사 구조도 돋보이지만, 눈물과 웃음,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독자를 휘몰아가는 작가의 그 따뜻한 시선과 원숙한 솜씨는 가히 천의무봉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은 옮긴이 양윤옥 씨가 역자 후기의 첫머리에 써놓은 글이다.
“번역 노트의 한 귀퉁이에 이런 메모들이 적혀 있다. ‘울었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가슴이 뭉클. 눈물이 우리를 정화시킨다는 명제를 실감’―정말 울었다. 가슴이 뭉클했고,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따뜻한 감동에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근래에 드문 소박한 경험이다.”
아사다 지로(淺田次郞)
1951년 도쿄 출생. 대중잡지에 연재를 시작하며 서른여섯 늦깎이로 데뷔했다. 1991년 20대의 야쿠자 체험이 담긴 피카레스크 소설 『찬란한 황금빛』을 펴내면서 이름을 알렸다. 1995년 장편 『지하철을 타고』로 제16회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1997년 첫 소설집 『철도원』으로 제119회 나오키(直木) 상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은빛비』 『낯선 아내에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