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편린을 뒤쫓는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거장 모디아노의 새로운 작품 출간!
사태가 모호하고 신비스러울수록 나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본문 p.44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언제나 불분명하다. 독자는 소설 속 인물들의 발자취를 모디아노와 함께 더듬어 가지만, 남겨진 흔적은 마치 깨진 조각처럼 단편적인 동시에 안개에 가려진 듯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도 남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고 난 후의 나른한 만족이 아니라, 아련한 향기가 지나간 것 같은 상실감이다. 나와 타인의 정체성을 기억하기 위해 끈질기게 알아내려 해도 결국엔 정확히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간직한 인물들.
이렇듯『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신원 미상 여자』『한밤의 사고』 등으로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대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모디아노의 새로운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여러 편의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허구의 인물들의 정체성과 기억을 탐색해왔던 모디아노는『혈통』에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모님과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아무런 감정 없이 자료를 수집해가며 진술한다. 마치 조서나 이력서처럼. 그가 한 것은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스쳐 지나갔던 기억의 편린들, 머릿속 어딘가에 희미하게 떠돌고 있는 ‘묘한 시대에 살았던 묘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을 붙잡아 글 속에 가두는 작업이다.
확실함과 불확실함이 혼재하는 글쓰기,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로 남은 사람들
1962년 크리스마스. 그해 크리스마스에 정말 눈이 왔는지 이젠 알지 못한다. 어쨌건, 내 기억 속에서는 밤에 거리와 차량들 위로 눈이 펑펑 쏟아진다. -본문 p.101
『혈통』은 시작부터 독자를 매우 긴장하게 한다.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지명과 인명, 그리고 연도까지. 모디아노는 그 단서 하나하나를 가지고 소설을 완성해나간다. 아버지가 사용했던 많은 가명들, 어머니가 일했던 극장 이름들, 그가 머물렀던 셀 수 없이 많은 호텔과 그 주소들…… 그는 40년 넘는 삶 속에서 떠돌던 기억의 조각들을 간신히 건져 올린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전화를 걸어 확인하거나 직접 서류를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확인한 정보는 모디아노 자신에게도 단지 과거를 기억해내기 위한 작업의 한 재료일 뿐 커다란 소설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며 또한 독자들에게도 아무 의미 없이 잊히고 말 정보일 뿐이다.
그 많은 정보들로 인해 그의 작품은 일견 리얼리즘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장을 읽다 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진다. 서술이 정확하면 할수록 독자는 더욱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현실일까, 아니면 허구일까? 그리고 이 사건의 앞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가가 기억하고 조사하는 사실은 모두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이라, 우리는 영원히 완전한 진실을 알 수 없다. 게다가 이 소설은 부모의 삶을 정당화하거나 미화시키려는 데 그 의도가 있지 않다. 기억에 감정을 대입하지 않는 서술 방식은 독자를 낯설게 하지만, 그러한 기억의 나열 속에 모디아노만의 독특한 필체와 느낌이 전해진다. 그런 그의 소설은 삶이야말로 기억과 망각 속의 어딘가를 떠도는 것이라 말해주는 듯하다.
이 책의 원제인 un pedigree(혈통)의 어원은 pied de grue(학의 발)로, ‘점선’을 지칭한다. 족보에서 조상과 후손을 잇는 점선. 점선같이 이어진 학의 발자국. 하지만 점선에는 항상 선 사이의 공백이 있다. 선이 확실한 기억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 사이에 있는 공백은 어렴풋한 망각이다. 모디아노는 그 점선과 공백을 이어 나가며 하나의 도상을 완성하고자 한다.
흐릿한 플래시처럼 이어지는 기억과 망각의 연속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별거하게 되었는지, 동생 루디가 어쩌다가 죽은 것인지, 간간이 나오는 여자친구들과는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귀다가 헤어진 건지 등등에 대해서 그는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그가 나열한 기억만을 가지고 상상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부분이『혈통』내에서 자서전과 픽션을 가르는 기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디아노 문학의 키워드가 되는 작품
이 작품 『혈통』에는 모디아노가 그간 발표한 다른 작품에 등장한 사건, 캐릭터, 이름, 공간들이 많이 등장한다. 『혈통』이 논픽션에 가까운 자전적 글임을 감안하면, 모디아노가 자신의 실제 경험과 기억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소설을 써왔음을 알 수 있다. 모디아노의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이런 사건 내지는 이름이 어느 소설에서 등장했는지 상기하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혈통』에 잠깐 언급되는 보석 ‘남십자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다른 소설『8월의 일요일들』에서 더 자세히 묘사되며,『혈통』에서 바칼로레아 시험을 보는 날 아침 자명종이 울리지 않아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는 미레유 우루소프라는 여자의 일화는『신원 미상 여자』에서 하찮은 사건으로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이야기로 다시 등장한다. 어린 시절 차에 치여 죽은 개에 대한 이야기는『한밤의 사고』에서도 나온다. 모디아노가 어머니의 명령으로 생활비와 양육비를 타러 아버지에게 가는 에피소드는『도라 브루더』에 등장한다. ‘에테르’에 의한 환각 역시 그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또한 소설 속 인물의 이름 역시 여러 곳에서 중첩되곤 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여자친구 중 하나였던 ‘게이 오를로프’는『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주인공의 과거와 연관이 있음직한 여자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모디아노의 삶, 모디아노의 다른 소설, 그리고『혈통』은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그 많은 힌트와 기억의 단편들로 우리는 ‘진짜’ 삶을 쌓고 허물어뜨리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얽힌 실을 풀기 위한 모디아노의 지난한 노력이 담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작가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요구할 것이되, 마찬가지로 삶의 진실 추구로의 똑같은 길 위에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지도 모른다.
해외 언론 리뷰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소설로 썼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사람들과 달리, 이 사람 - 정신이상과 비행과 어쩌면 죽음까지도 문학 덕분에 피할 수 있었던 이 사람, 모든 진정한 작가들이 그렇듯 진실을 문체 속에 지니고 있는 이 사람 - 은 간결하고 정확한 조서調書를 작성하기 위해 자신의 문체까지 포기했다. 그의 조서에는 어떤 해설도 없고, 심지어 정보조차 없다. (동생 루디는 1957년, 열 살 때 죽었다고 했는데, 왜 죽었는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정보는 오직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이름뿐이다. 어린 시절에 불행했고 청년기를 허비하고 말았다는 느낌은 흔히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모디아노의 힘은 그것을 문학으로 만들기를 거부했다는 것, 설명하기를 거부했다는 것,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고 어머니를 정당화하려 하고 자신의 행위를 해석하려 하기를 거부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왜 중요하며 획기적인 것인가 하는 이유이다. 성찰의 거부, 페이소스의 거부, 센티멘털리즘의 거부는 이 책을 낯설게 하면서 동시에 힘을 갖게 한다. 분명 이 책에는 감정이 들어가 있고, 비극적 느낌은 모디아노의 초탈한 어투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문학이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황폐한 삶’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한탄과 클리셰와 반복된 수사를 냉정하게 되돌려주는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시위이다. - 르 몽드 Le Monde
사실들, 날짜, 주소, 증거들을 빼곡이 나열하고 있는 이 책은 경찰 조서만큼이나 세세한 사실들로 꽉 차 있다. 서술이 정확하면 할수록 내용은 혼란스럽다는 역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의 기적이 아닐까. 이 책이 모디아노가 그간 쓴 소설에 대한 열쇠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이 열쇠로는 모디아노 상상력의 녹청색 문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으로 예순이 넘은 작가의 생애의 베일이 걷히지만, 작가의 미스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다. 진실은 바로 문체에 있다는 것을. - 누벨 옵세르바퇴르 Nouvelle Observateur
모호함의 예술가 모디아노, 그는 지금껏 사실을 정확히 기술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작가였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반대로, 모디아노는 이 책에서 자기 고백을 하고 있다. 희미함 대신 분명함을, 몽롱한 묘사 대신 보고서 같은 문체. 독자들은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인물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지역위원회에 소환되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호적에 가깝다. - 르 푸앵 Le Point
지은이와 옮긴이
지은이 파트릭 모디아노 Patrick Modiano
바스라지는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으로 대표되는 생의 근원적인 모호함을 신비로운 언어로 탐색해온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 1945년 불로뉴 비양쿠르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68년 첫 소설 『에투알 광장』으로 로제 니미에 상, 페네옹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언론, 독자들의 격찬을 받고 있다. 『외곽도로』(1972)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거머쥐고, 『슬픈 빌라』(1975)로 리브레리 상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1978)로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가족 수첩』(1977) 『잃어버린 거리』(1984) 『8월의 일요일들』(1986) 『도라 브루더』(1997) 『신원미상여자』(1999) 『작은 보석』(2001) 『가계도』(2005)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옮긴이 김윤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번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와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강사를 지냈고,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에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불문학 텍스트의 한국어 번역 연구』, 옮긴 책으로 『프랑스 낭만주의』『조서』『파스칼』『플랫폼』『유클리드의 막대』 등이 있다.
본문 발췌
이 모든 인명들과 뒤에 나올 다른 인명들에 대해 독자들의 용서를 바란다. 나는 혈통 있는 척하는 한 마리의 개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뚜렷한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너무나 파란만장하고 불확실해서 마치 반쯤 지워진 글자들로 신분증명서나 행정서식을 채우려 애쓰는 것처럼, 나는 이 흐르는 모래 속에서 몇 가지 흔적이나 몇 가지 표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p.10
나는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리고 아마도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삶을 끝내기 위해 마치 조서 혹인 이력서를 작성하듯 이 페이지들을 써나간다. 이것은 사건과 행위의 단순한 필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고백할 것도 해명할 것도 전혀 없으며, 내관(內觀)과 자기성찰에 대한 취향도 없다. 반대로 사태가 모호하고 신비스러울수록 나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심지어는 신비가 전혀 없는 곳에서 신비를 찾으려 하기로 한다. -p.44
하지만 왜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이 아닌 어떤 사람들과, 다른 장소가 아닌 어떤 장소에 있게 되는지 잘 알지 못해도, 또 그 영화가 오리지널인지 아니면 더빙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해도 삶은 계속되었다. 오늘날 내 기억에는 짤막한 시퀀스들만 남아 있다. -p.114
그리고 사소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당신에게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진정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아무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느낌을 받는다. -p.120
▣ 2008년 7월 21일 발행
▣ ISBN 978-89-546-0612-7-03860
▣ 128*188(사륙양장) | 144쪽 | 9,000원
▣ 책임편집 조현나 (031-955-8857, jelesais@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