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평재의 첫 소설집 {마녀물고기}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인간 욕망의 바닥을 신화적 상상력과 정신분석학적 탐구의 자장 속에 끌어들여 그로부터 소설의 서사를 인공적으로 빚어내는 이평재의 작업은 진정성과 내면 탐구, 혹은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을 중심축으로 하는 기왕의 한국소설 문법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비껴서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그간 여성작가들이 보여준 조심스럽고 수동적이기까지 한 소설언어와 상상력을 생각해보면 이평재의 작업은 일탈적이고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신화적 상상력의 과감하고 폭넓은 도입, 환상과 현실의 경계 지우기, 시원적 욕망 탐구로서 성애 행위의 대담한 주제화, 인공적인 서사의 조직 등에서 이평재의 전략적 글쓰기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신예 작가의 첫 소설집인 만큼 앞으로의 차분한 주시가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지금 주목할 만한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평재의 {마녀물고기}에는 표제작 [마녀물고기]를 비롯한 9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문학평론가 서영채씨는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마녀물고기와 거미인간, 푸른고리문어 그리고 여자들의 엉덩이를 수집하는 남자와, 날아가는 갈매기떼 모양의 멋진 치모를 가진 여자, 이야기의 신에게 영혼을 파는 소설가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버린 임산부 등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엑스터시의 섬광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이평재는 그 섬광이야말로 사소화되어가는 우리 삶에 신령한 자양이 될 수 있음을, 한 탈출구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며 이번 작품집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는 자신의 글쓰기를 "파격을 위한 파격이 아닌,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들에 대한 파격을 꿈꾸는 기질적 작업"이라 정의하고 있는바, 한국소설의 지평을 확장하고 갱신하려는 남다른 의욕을 확인하게 된다.
욕망과 글쓰기, 나를 찾아 떠나는 모험의 여정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마녀물고기}에 실린 중단편들이 욕망과 글쓰기의 대위법적 자장 속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욕망의 운동이 바로 글쓰기의 구조임을 시종일관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글쓰기의 욕망은 욕망의 글쓰기와 동일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래서 {마녀물고기}에 실린 모든 작품들이 꿈이나 환상, 마술적인 몽환이나 무의식의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표제작 [마녀물고기]는 특히 이 소설집의 모티프 전체를 총괄할 만한, 욕망과 주체의 관계에 대한 폭넓은 구조도를 제시한다. 이 소설은 마녀물고기라 불리는 먹장어를 상상력의 고리로 삼고 있다. 다른 물고기를 공격할 때 제 몸뚱이로 매듭을 만든 뒤 자신의 몸을 상대방 몸 안으로 송두리째 박은 채 안에서부터 죽어가는 먹이를 먹기 시작한다는 마녀물고기. 주인공 나는 마녀물고기와의 섹스에 집착하며 영혼을 잠식당한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녀물고기]에서 작가는 내면의 욕망을 자신의 자기 동일성을 위협하는 마녀/악마로 간주하고 있다. 욕망은 의식, 주체, 현실의 밑자리를 관류하는 이성의 타자이다. 그렇기에 이 욕망은 이성과 현실로부터 억압된 주체의 어두운 밤의 측면이다. 작가는 이 주체의 어두운 밤의 측면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거미인간 아난시]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글쓰기 행위에 해당될, 글 쓰는 자의 순수한 수동성과 자기 소멸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다. 변변한 지면 하나 얻지 못하는 한심한 소설가가 이야기의 신, 거미인간 아난시에게 영혼을 팔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욕망의 문제를 글쓰기와 관련짓고 있다. 즉, 글쓰기의 욕망은 결국 욕망의 글쓰기일 수밖에 없음을, 글쓰기의 행위는 욕망의 구조적 상동체라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리면 그 즉시, 길어도 두 시간 안에 사망하는 강한 독을 지닌 푸른고리문어를 등장시킨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는 글쓰기를 죽음에 이를 정도로 격렬한 고통과 환희와 절망의 과정을 동반하는 성행위에 비유한다. 어려운 문학을 주로 하는 소설가 나는 성애소설을 쓰기로 하지만, 쉽지 않다. 연인이 창녀 역할을 하는 무임승차게임을 통해 소설의 실마리를 잡으려 하던 나의 욕망은 푸른고리문어에게 성기를 물리는 환상으로 이어지고, 푸른고리문어와의 격렬한 성행위는 푸른고리문어와 나, 연인과의 일체감을 이룬다.
[만다라케 언덕에 서다]와 [마술에 걸린 방]은 잉태라는 소재로 서로 반대되는 내면심리를 그리고 있다. [만다라케 언덕에 서다]에서의 나는 불임여성으로서 아이를 갖고 싶어 복제아기를 주문하게 되고 그 욕망은 만다라케라는 마술적 공간으로 이어진다. 반면 잉태한 아이를 낙태시키려는 [마술에 걸린 방]에서의 나의 욕망은 벽 사이의 좁은 틈, 즉 어머니의 자궁 속을 향한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이 마술의 공간 역시 의식이 당도할 수 있는 한계 바깥의 것으로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려는 위협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술에 걸린 방]은 제17회 동서문학 신인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자기 고뇌와 하나가 된 언어의 무늬를 촘촘히 그려나가고 있는 수작이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한 여자의 강박관념이 한 발은 악몽 속에 다른 발은 현실 속에 담은 채 짜나가는 그 언어의 물망은 단 한 줄의 행갈이도 허용치 않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읽는 마음을 옥죄어든다."(심사평 중에서)
소설집의 유일한 중편인 [마야]는 사라져버린 마야 문명의 흥망사를 통해 욕망의 구조를 심층적으로 해부하고 있는 작품이다. 장신구 디자이너인 주인공 앞에 갈매기떼 모양의 치모를 가진 누드모델 마야가 나타난다. 사라진 마야 문명의 상징인 마야는 알고 보니 욕망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던 스승 정찬재의 딸이다. 화재로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처참한 모습으로 살아 있고 마야에 대한 사랑과 마야 문명에 대한 집착으로 괴로워하던 나는 장신구전 중간에 마야를 찾으러 그녀의 집으로 가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마야 문명은 깃털 달린 뱀의 이미지를 통해 욕망의 두 얼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그 밖에 잡귀를 몰아내고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가위나무를 모티프로 하여 씌어진 [아가위나무의 우울], 러시아 황제의 막내딸로 자처했지만 사실은 자기가 황녀라고 주장한 거지에 불과했던 아니스타시아를 통해,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거울 앞에 선 아나스타시아], 인간의 신체에 붙어 영혼과 에너지를 흡수하는 불가사리 모티프를 소설화한 [불가사리 냄새] 등 {마녀물고기}에는 욕망의 악마성/마술성을 상징하는 강렬한 모티프들이 등장한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이것을 글쓰기의 욕망 앞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작가 자신의 내면의 표현이라 말하고 있다.
"문학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작품을 한다는 것, 그것은 글 쓰는 자가 자기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이 고독 속에서 자신의 침묵을 완성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종국에는 고독이 스스로를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고독의 자리는 주체라는 존재자의 바깥에서 행해지는, 말하자면 주체의 자기 동일성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보다 근원적인 어떤 존재의 사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평재의 파격적 상상력 밑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계속 그 뒤를 쫓고 있었던 셈이다.
이 책에 대하여
이평재의 소설은 우리를 낯설고 신비한 세계로 끌고 간다. 그곳은 마녀물고기와 거미인간과 푸른고리문어 들이 출몰하는 곳이고, 또 여자들의 엉덩이를 수집하는 남자와, 날아가는 갈매기떼 같은 모양의 멋진 치모를 가진 여자, 이야기의 신에게 영혼을 파는 소설가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버린 임산부 들이 있는 곳이다. 그렇게 이평재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너절한 일상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엑스타시의 섬광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아마도 이평재는 그 섬광이야말로 사소화되어가는 우리 삶에 신령한 자양이 될 수 있음을, 한 탈출구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난관에 처해 있는 우리의 이야기들에게도 어떤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평재의 상상력이 포착해낸 환상의 강렬함은 우리로 하여금 또하나의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을 조심스럽게 주시하게 한다. -서영채(문학평론가·한신대 교수)
이평재의 소설에는 독특한 마성이 깃들여 있다. 주술의 언어를 불러오는 해괴한 상상력. 상식을 파괴하는 논리의 틈바구니에서 기이한 이야기의 샘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푸른 물감과 붉은 물감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소설의 전개 과정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식의 장벽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한마디로 말해 차원의 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듯한 강렬한 환각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대한 강렬한 문제 의식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한없이 위축되고 왜소해진 소설의 기능성을 독특하게 상승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뿐만 아니라 이평재는 여성작가이면서도 남성/여성의 고질적인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무성적(無性的)인 경향을 거침없이 구사한다. 현실/환상, 남성/여성으로 고착된 경계를 해체하고, 작가는 제3의 소설적 공간에다 판타지, 신화, 민담, 고대문명 등을 차용해 다양한 상상력의 재전을 벌인다. 지금까지 한국소설이 터부시하거나 금단시하던 영역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어 새로운 소설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묵정밭이 되어가는 문학판에서 벌이는 이 작가의 한마당 굿. 우리 소설의 새로운 결실과 수학으로 이어지길 빌고 싶다. -박상우(소설가)
*2001년 6월 30일 발행 /ISBN 89-8281-400-0 03810
*312쪽 / 값 8,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파격적이고 낯설고 신비한 소재들로 가득한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욕망의 운동이 바로 글쓰기의 구조임을 시종일관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마녀물고기와 거미인간, 푸른고리문어 그리고 여자들의 엉덩이를 수집하는 남자와, 날아가는 갈매기떼 모양의 멋진 치모를 가진 여자, 이야기의 신에게 영혼을 파는 소설가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버린 임산부 등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엑스터시의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