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사랑, 그 위험에 부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열 살짜리 딸을 목 졸라 죽인 젊은 엄마, 자신이 임신시킨 여학생을 살해한 어린 남학생…… 요즘 매일같이, 아무렇지 않게 올라오는 뉴스들입니다.
일본의 젊은 작가 텐도 아라타의 소설 『넘치는 사랑』을 읽으면서, 그 뉴스들이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며칠 전 아침에는 출근을 준비하면서 켜둔 TV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가출한 어린 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 그러나 딸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칩니다. 가까스로 붙잡은 아버지에게 어린 딸은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집에는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어제까지 자신은 너무나 행복했다고, 날 다시 어제로 돌려놓으라고, 엄마 아빠만 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제발 놓아달라고 사정하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열여섯 어린 소녀는 스물네 살 난 대학생과 작은 원룸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천장에 걸린 빨랫줄에는 두 사람의 속옷이 나란히 걸려 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아버지는 말하더군요. “저 아이에게 안 해준 게 없습니다. 집을 나갈 때 저 아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모두들 입고 싶어하는 제일 비싼 수입 브랜드였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집에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사랑, 너무나 쉽게들 말하는 사랑, 그러나 사랑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모양입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혹시 내 사랑을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넘치는 사랑』을 읽는 내내 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다룬 연작소설
텐도 아라타는 현대인의 일상에 파고드는 폭력과 악의 문제를 추리적 기법의 뛰어난 스토리 텔링에 담아내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넘치는 사랑』은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네 가지 인간 군상을 통해 현대적 병리의 고통스러운 실상을 해부한 연작소설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서스펜스와 미스터리 기법을 최대한 억제하는 대신, 평온한 일상의 묘사 위에 사랑의 과잉과 결핍이 안겨주는 심리적 파국의 드라마를 전율이 일만큼 잔잔하게 구축해나갑니다. 일종의 심리치료 소설이라 할 수 있는 『넘치는 사랑』은 잡지에 연재될 때부터 독자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작가는 연재과정에서 확인된 독자의 반응을 수렴, 대폭적인 개작을 거쳐 단행본으로 묶어냄으로써 독자와의 교감이 살아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아이를 죽일 것 같다"는 아내
이 책에 담긴 작가의 주제의식은 넘치는 사랑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의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온화한 사랑의 부재는 이기적이고 과잉된 사랑의 강요로 나타나기 쉽고, 이러한 왜곡된 사랑은 특히 가족관계에서 깊은 정신적 내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넘치는 사랑이란 현대인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출발선에서 작성한 작가의 진단서인 셈입니다.
첫번째 작품 「우선은, 사랑」은 두 살배기 아이를 둔 젊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성실한 직장인 남편, 아이를 돌보며 남편을 정성스레 뒷바라지하는 아내가 이루는 이들 부부의 생활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죽일 것 같다"며 정신적 불안을 호소하는 아내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집안의 평화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좋은 아내와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내의 정신을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는 동안, 남편은 스스로가 상정해놓은 가족과 아내의 상(像)에 갇혀 아내의 속내 얘기를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아내의 자해와 이혼 요구에 부닥친 남편이 조금씩 아내의 자리로 다가가는 과정이 섬세한 심리묘사로 그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가상의 연인을 사랑하는 소녀, 그 소녀를 사랑하는 무기력증 중년 남자
스트레스 치료센터를 배경으로, 자아분열에 시달리는 한 소녀와 그 소녀를 사랑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텅 빈 연인」은 좀더 본격적으로 현대인의 정신적 내상을 추적합니다. 이혼과 직장 일의 스트레스로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중년 남성 시오세 쇼지는 치료센터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생기 넘치는 소녀 토모코를 알게 되고, 그녀를 통해 새로운 생의 의욕을 느끼지만, 정작 토모코는 현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연인을 실제처럼 여기며 성장기의 정신적 내상을 다스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토모코에게만 존재하는 가상의 연인을 정상/비정상의 틀을 넘어 바라볼 수 있도록 독자를 유도합니다.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은 쇼지의 조급하고 넘치는 사랑으로는 타인의 아픔에 진정으로 가 닿을 수 없음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범생 콤플렉스와 부모의 편애
「평온의 향기」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두 명의 젊은 남녀가 사회복귀를 위해 치르는 육 개월간의 계약 동거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주인공의 병인(病因)이 모범생 콤플렉스나 부모의 편벽된 애정 등, 주변에서 쉽게 목도할 수 있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야기의 흡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작품 속에는 평범한 사람의 삶에 언제든 엄습할 수 있는 정신적 붕괴의 뿌리가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번갈아 쓴 일기장을 교환해가며 서로의 상처를 감싸안는 두 남녀의 안타까운 치유기에는 정상인들의 이기적이고 과잉된 사랑을 자연스레 되짚어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마음의 상처를 만들어가는 것
마지막 작품 「멀어져가는 그대에게」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청년 히로유키는 크리스마스 전날 편의점에 들른 한 남자의 죽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죽은 남자의 미망인에 대한 미묘한 죄의식과 애정은 인스턴트식 사랑에만 익숙해 있던 히로유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줍니다. 부부의 행복한 추억이 깃들인 곳들을 답사하고 그곳의 풍경을 미망인에게 사진과 이야기로 전해주는 주인공의 행동은 철없는 순수함으로 들떠 있지만,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여자 친구의 아픔에 귀를 열고, 편의점 바닥에 누워 죽어가던 남자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타인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상처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넘치는 사랑』의 전언은 그런 게 아닐까요.
함께 살면서 그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 진심으로 절실하게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그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보낸 하루하루가 진정 사랑으로 충만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자신이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애매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아무리 사랑이라 믿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항상 의심이 따르게 마련이니까요.
--「멀어져가는 그대에게」에서
▶ 텐도 아라타 てんどう あらた
1960년 일본 에히메(愛媛) 현에서 태어나 명문 메이지 대학 문학부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가 소설에 전념하여 추리소설분야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무라카미 류, 야마다 에이미 등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격찬을 받고 있는 그는 1986년 『하얀 가족』으로 제13회 야성시대 신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 『고독한 노랫소리』로 제6회 일본 추리 서스펜스 대상 우수상, 1996년 『가족 사냥』으로 제9회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밀리언셀러가 된 『영원의 아이』로 제53회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박태규
1969년 서울 출생. 세종대학교 일문과 대학원을 거쳐 국립 오사카 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했으며 「일본 신가부키와 한국 창극에 관한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이인직의 연극개량의지와 은세계에 미친 일본연극의 영향에 관한 연구」「「桐一葉」의 개작과정을 통해 본 坪內逍遙의 사극관에 관하여」등이 있으며, 단편 「빛과 젤라틴의 라이프치히」 등을 번역했다. 현재 세종대와 동양공전에 출강하고 있다.
* 초판 발행 | 2002/10/21
* ISBN | 89-8281-586-4 03850
* 신국판 | 320쪽 | 값 8,800원
* 담당편집자 | 김현정, 조연주, 장한맘(927-6790,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