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쓰다듬는 더운 손길, 시를 일구어내는 견딤의 시간
툭 떨어진 밤 한 송이/등산화로 꾸욱 눌러보았다/터진 빈 껍질 속의 욕망만 바닥에 뒹굴었다/맑은 햇살 쪼이며 몇 개의 잎새로 버티고 있는/가을 밤나무 뒤에서 까만 청설모 한 마리 조그만 입으로/껍질 터진 가을 하나 가득 물고 눈을/동그랗게 뜬 채 쳐다보고 있다/의심하는 눈치였다/내가 미소를 보내자/내 안심을 그제야 보았는지/그 둥근 시간을 두 손으로 안고 이리저리 굴리며 껍질을 깐다/낙엽을 깔고 앉아/이제 온 산 가득 쏟아져나오는 말의 잘 익은 알맹이들을 먹는다/놈은 내 미소 냄새를 맡았고/대신 나는 놈이 둥근 시간이 되어가는 걸 훔쳐보았다/서로 안심을 나누었다 --「안심」 전문
등산길에서 만난 청설모와 무언의 속내를 교감하며 서로 안심을 나무는 사이가 되었다고 읊조리는 이 시는, 하찮은 동물과 인간간의 소통, 경계 허물기라는 주제가 기조를 이룬다. 화자가 청설모에게 미소를 보냄으로써 경계와 의심을 버리고 양자가 자연생명체의 일부로 합일된 것이다. 둥근 시간, 서로 안심을 나누는 세계, 우리 시대가 허물어뜨린 가치를 복원하는 일, 서로가 경계를 풀고 속내를 열고 사람다운 세상의 풍성한 말을 가꾸는 것……
해설을 쓴 조정권 시인은 이것이 금기웅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세상과 자연과의 소통, 인간의 가슴에까지 가 닿으려는 시인의 자기 성찰은 "쓸쓸하고 아득한 세상에/따스한 말 몇 마디라도 남기고 가고 싶다"(「공중에 달린 목숨들 1」)에 이르러서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시인의 이런 욕망은 시인에게 물질만능 사회, 서로 불신하는 현실에서의 희망 없는 절망감을 안기고(「껌」 「누구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결국 현실의 고통과 무력함과 나약함을 견디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밤은 물 속에서도 눈 뜨고 있다」 「작은 새」 「광장」).
조정권 시인의 지적처럼, 금기웅 시인이 시는 견딤의 시학이다. 그의 작은 새 억새풀 버들치 오리 잔설 갈대 등 연약한 시적 대상물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수탈당하는 후줄근한 삶을 견디고, 폐기처분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들을 견딘다.(「대기 명령」 「손님」 「비」) 또한 남루하고 누추한 가난의 상처를 견딘다. 그의 시에서 맑고 빛나는 자연물들 뒤로 밤, 어둠, 가난, 삭여진 슬픔, 눈, 썩은 물 등 쓸쓸함과 추위가 배어 있는 배경이 숨어 있는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삶을 쓰다듬는 시인의 손길은 덥다. 그의 손길이 스친 사물들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난다. 견딤의 끝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소생처럼.
*2003년 4월 4일 발행
*ISBN 89-8281-649-6 02810
*시집 판형(128*280)/104쪽/값 5,000원
*담당편집: 장한맘(927-6790, 내선 202)
"기어다니는 삶들은
제 가슴 근처에 옹이를 만든다
옹이는 나무의 긴 꿈틀거림과
참을 수 없는 기다림이 진액으로 모아진 것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빛나고 있으나
가만히 쓰다듬어보면
한 덩어리 슬픔으로 저마다 옹골지게 뭉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