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가파른 도전에 마주 선 한 세대의 다부진 지적 응전
뛰어난 현장비평가이자 『문학과지성』을 창간하고 문학과지성사를 창립했던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 김병익의 새로운 산문집 『글 뒤에 숨은 글』은 자신의 문학과 삶과 내면을 활짝 열어 보이는 고백록이다. 그의 글 속에는 언제나 자신의 인품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데, 특히 이 책은 균형 잡힌 시각을 중시하는 그의 비평의 원형을 흥미로우면서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글과 삶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김병익의 생애는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한 독재와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고종석(소설가, 한국일보 편집위원)은 이 책을 읽는 것은 "역사의 가파른 도전에 마주 선 한 세대의 다부진 지적 응전이 어떤 빛깔과 결의 시대정신으로 피어나고 여물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비평은 성민엽의 말대로 자기 세계를 드러내거나 주장하는 데 주력하는 비평이 아니라 타자의 세계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와 타자를, 그리고 그 모두가 들어 있는 이 세계를 성찰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기에 그의 비평은 늘 비판보다는 격려 쪽에 가까웠고, 관용과 포용의 미덕을 내면에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비평 세계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날카로운 비평가의 글이라기보다는 감수성 예민한 시인의 글
이 책의 첫번째 장 「생각 뒤에 숨은 생각」에 포용의 정신을 습득한 그의 성장기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이나 형과 누이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책임지거나 앞장설 것을 유보당한 입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통해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으면서도 위로 형과 누나들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는 사람들과 만나면 주로 듣는 편이었고, 그들 앞에서 자기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기를 꺼려했으며, 경쟁을 포기하고 타인들의 지식과 의견을 자신의 자리에 채우도록 노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신문사 기자 시절에는 황동규와 김현 등으로부터 배웠고, 1970년대에는 운동권 이론가들의 논리를 경청했으며, 1990년대에는 젊은 신세대 문학인들의 작품을 옹호했다. 「생각 뒤에 숨은 생각」은 바로 이런 그의 성격을 형성케 한 성장기의 기록이다. 그의 성장기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6학년에 오르면서 6·25를 겪었으며, 전후의 궁핍한 시절에 사춘기를 보냈고, 실존주의와 기독교 사상을 토대로 삼았던 대학 4학년 때에 4·19를 치렀다. 그러니까 그는 민주주의 교육의 과정 속에서 성장해온 것이었고, 그것들이 4·19 혁명으로 귀결되었으며, 4·19의 자유민주주의 의식은 김병익 문학의 근간이 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란 사회의 다양한 주장을 폭넓게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었고, 세대간의 조화로운 교체를 자연스럽게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확고하게 자리잡은 김현 김치수 김주연 김병익이라는 문지4K의 아성에 후배들을 받아들였으며, 후배들에게 무크지 『우리 시대의 문학』을 발간토록 하였으며, 1988년에는 『문학과지성』의 복간 대신 후배 평론가들이 주축이 된 『문학과사회』를 창간토록 하였고, 2000년에는 대표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었다.
「생각 뒤에 숨은 생각」이 성장기라면, 두번째 장 「말 뒤에 숨은 말」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러 이미지와 자신의 생활습관, 성격에 대한 직접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진술이다. 그의 글은 유려하면서도 분명하고, 명쾌하면서도 여운을 남긴다.
"사람은 나이 들어도 기억이란 것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50년 전 기억 속의 얼굴은 여전히 50년 전의 얼굴이어서 성장도 노화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진이 빛바래는 것처럼 그 기억들도 빛이 바랜다. 바랜 기억들은 그 앞뒤의 맥락이나 안팎의 사정도 함께 바래면서 하나의 정물화 이미지로 순화된다. 그 순화된 이미지는 아름다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그것들에 얽힌 모든 느낌들을 아우라로 변형하면서 그리움으로 덧칠한다. 기억이란 그래서, 슬픔인가 축복인가."(45쪽)
그는 담담하면서도 생생하게 지난날을 서술한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사랑, 종교적인 갈등과 젊은 날의 고뇌가 마치 나무 향기처럼 풍겨나오는 그의 글은 날카로운 비평가의 글이라기보다는 감수성 예민한 시인의 글이다. 격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그는 교회를 버리고 담배를 피우다가 애연가가 되며, 허무의 심연에 빠지면서 탐미주의에 젖어들고, 그것은 일종의 악마주의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번뇌는 젊은 시절의 누구나 갖게 되는 것이지만, 한치의 흔들림도 없을 것 같은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내면 속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자신이 전과 바뀜 없이 혹은 남과 다름없이 범상했지만, 안으로는 고통과 고뇌, 허망과 좌절에 몸과 마음을 달구고 있었고, 방황과 퇴폐의 나날 속에서 그것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반복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뇌의 날들을 지나오면서 청년 김병익은 강해졌고, 그것이 험난한 세파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
한시도 책을 놓지 않았던 이의 책으로 쓰는 자서전
김병익의 생애는 무엇보다도 책과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보문산 자락에 있었지만, 그의 집은 대전의 도심지였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논밭을 뛰어다니며 놀거나 골목길에서 놀이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텔레비전도 없었던 시절 자연스럽게 그는 책을 유일한 취미생활의 도구로 삼았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 시절에는 책을 소개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고, 이후 스스로 책을 쓰는 저자가 되었으며, 더러는 번역자가 되기도 하고, 책의 발행인이 되었으며, 책을 만드는 편집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 생애를 책과 함께 보내고 있는 그에게 이 책은 일종의 책으로 쓰는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특히 이 책의 세번째 장 「책 뒤에 숨은 책」에는 책과 함께해온 김병익의 생애가 김병익 특유의 유려한 문체 속에 담겨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형에게서 『소학생』이라는 잡지를 받으면서 김병익의 책에 대한 사랑은 시작된다. 이후 그는 어려운 책이든 쉬운 책이든 닥치는 대로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서 읽고 즐겼다. 어린 시절의 독서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잡지 『학원』을 만난 것이었다. 『학원』에는 학원문단이라는 난이 있어 학생들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었다. 그곳에 고교생 김병익이 시를 발표하고, 훗날 가까이 지내게 되는 황동규와 마종기를 비롯해서 이제하, 유경환, 문충성, 정진규, 이승훈, 박의상 등 미래의 시인들을 지면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서서히 기지개를 켰던 것이다.
이후 그는 홍성원, 황동규, 김현, 김치수, 김주연 등을 만나 본격적인 책과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1967년 『사상계』에 「문단의 세대 연대론」을 발표했고, 1968년 동인지 『68문학』에 편집동인으로 참여했고, 1970년 『문학과지성』을 창간했으며, 1975년 문학과지성사를 창립하여 대표를 맡아오다가 2000년 지금의 채호기 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한편, 수많은 비평집과 산문집, 번역서를 펴냈다.
이렇게 책과 한평생을 함께해온 이가 출판사 대표직을 떠나면서 느끼는 감회는 어떠했을까? 김병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한가한 독자, 게으른 필자일 수 있게 된 것이며 책 만들기의 크고 작은 짐들로부터 놓여나게 된 것이다. 이 즐거움 속에서 나는 책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다른 자유처럼, 책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한 것일까. 책으로 쓰는 자서전을 다 쓰고 나서도 내가 바란 자유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300∼301쪽)
김병익은 결국 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책 속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문체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이 책은 김병익의 책 중에서 아마 가장 자유스러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책인데, 그것은 어쩌면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이 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저자의 내면이 어떤 책에서보다도 더 농밀하게 나타나 있다. 함께 문지4K로 활약해온 김주연은 "이 책은 젊은 시절부터의 삶 모두를 열어 보이며 털어놓는 고백록의 짙은 숨결이다. 시대와 종교, 문학이 함께 그 속에서 숨쉬는 우리 문학의 『팡세』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 초판발행 | 2004년 1월 12일
* 사륙판 양장 / 320쪽 / 10,000원
* ISBN 89-8281-783-2 03810
* 담당편집 차창룡(031-955-8866), 조연주(031-955-8865)
뛰어난 현장비평가이자 『문학과지성』을 창간하고 문학과지성사를 창립했던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 김병익의 새로운 산문집. 자신의 문학과 삶과 내면을 활짝 열어 보이는 이 고백록은 균형 잡힌 시각을 중시하는 그의 비평의 원형을 흥미로우면서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