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소포에 들다』는 본원적인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사는 시인 천양희가 등단한 지 사십 년 만에 시에 대해 쓴 첫 산문집이다. “시는 욕망이 아니라 존재”라 말하는 그이기에, 평생을 시를 쓰며 고독하게 살아온 그이기에 한 구절 한 구절, 한마디 한마디, 책은 온통 시에 대한 순정으로 가득하다. 시를 쓰는 시인이면서도 아니 시인이기에 늘 시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에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진정성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제1부 ‘물에게 길을 묻다’에서 시인은 자신이 아끼는 시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등단 후 십팔 년 만에 첫 시집을 낼 때까지 “마음을 잃고” 방황하던 시인에게 길이 되어준 아버지의 편지와, 그 편지를 계기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만난 강원도 어딘가의 수수밭. 바람에 서걱거리는 그 수수밭에서 시인은 넋을 잃고 통곡을 하다 문득,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그후 팔 년 만에 완성한 시가 「마음의 수수밭」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떠난 여행에서 살아 돌아온 마음으로 쓴” 이 시는 아직도 시인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곤 한다. 이 외에도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극복하고 긴 투쟁의 끝에 살아남은 시 「직소포에 들다」, 어머니에 대해 쓴 유일한 시인 「그믐달」, 우물처럼 깊은 우울에서 벗어나게 해준 일우 스님을 만난 후 쓴 시 「山行」, 새로운 인생을 쓰리라는 간절함에서 나온 「아침마다 거울을」, 끊임없이 시인에게 생기를 환기시켜주는 물에서 얻은 시 「물에게 길을 묻다」, 시의 다의성(多義性)을 일깨워준 새벽시장에서 얻은 「새벽시장」 등 시인이 아끼는 일곱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의 시인을 있게 한 힘이 무엇이었는지 들려준다.
그 외에 소소한 시인의 일상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제2부 ‘혼자 살면서 시를 쓰는 여자’에서도, 침묵할 줄 모르는 시인들, “겨울도 아닌데 동면하는” 시들, “낮잠 자듯 졸린 시들”을 조용히 꾸짖으며 투철한 시인정신을 보여주는 제3부 ‘지금은 침묵할 때’에서도 시인의 이야기는 언제나 ‘시’로 이어진다. 담담하게 조용하게 낮게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는 시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으로 누구보다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누구보다 크게 분노하는 ‘시인’ 천양희가 있다.
시를 쓸 때, 쓸데없는 부분을 잘라내기 위해 가슴속에 가위 하나를 품고 다닌다는 시인, 한 편의 시를 몇 년이 걸려서야 완성시키는 시인, 피로 쓰는 시인 천양희는 여전히 시가 그립고 시가 간절하다. “수수하면서도 속이 꽉 찬 시, 읽은 뒤에 다시 곱씹게 하는 시, 읽는 순간 정신이 들게 하는 시, 울림이 크고 깊은 시, 한 번 읽어도 오래 남는 시, 여운이 여백을 채우는 시, 가슴으로 받을 수 있는 시……” 시인이 읽고 싶고 보고 싶은 시의 모습은 곧 우리 독자들이 보고 있는 그의 시요, 또 읽고 싶은 시다.
등단한 지 십팔 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는 시인이 쓴, 시에 대한 첫 산문집에서 우리는 피로 쓰는 시인, 침묵하는 시인, 적막하게 홀로 견디는 시인 천양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 초판발행 | 2004년 3월 29일
* 153*210 | 184쪽
* ISBN | 89-8281-804-9 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