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을 따라가는 섬세한 언어감각, 투명한 서정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는 예의 단정함과 절제, 투명함의 인상을 주는 시들로 가득하다. 시인은 높지 않고 나직하지만, 신성한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신성한 숨결"과도 같은 시어들로 살아 있는 존재의 울음소리, 그 속에 흐르는 시를 예민하게 감지해내고 있다.
『그곳이 멀지 않다』는 1997년 출간되어 1998년, "서정시의 성숙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단단한 정열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호평을 받으며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이 시집은 새로운 자서와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나름의 시론을 담은 시인의 말을 덧붙인 것이다. 마음결을 따라가는 섬세한 언어감각과 투명한 서정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다
금이 간 항아리이면서 /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 손가락으로 퉁겨보면 /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 물을 담아보아도 괜찮다 // (……) // 너무나 짜서 맑아진 /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 그의 감식안 //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 시라는 항아리
―「어떤 항아리」 중에서
나희덕 시인에게 시란 너무나 짜서 맑아지고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을 알아차리는 감식안을 가진 항아리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에 함부로 뜨거운 고통과 슬픔을, 그 뜨거운 상징을 섣불리 쏟아붓지 않는다. 절망과 슬픔을, 고통을 말하면서도 그때조차 결코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삶의 고통을 감내하는 방법, 슬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요란하지 않게 그것을 직조하는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어느 날 시인을 찾아와 무심한 표정으로 쐐기풀 한 짐 내려놓고 가는 고통. 그 고통은 시인에게 말한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고통에게 1」) "그리하여 해도 영영 비칠 것 같지 않은 작은 방에 몸을 누인다."(「만삭의 슬픔」) 이처럼 "고통에 내용과 크기를 주어 상처를 만들기보다 그에 대한 해석을 침묵으로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안아들이는 방법, 그것이 나희덕의 사랑이며, 그 시"(황현산)이다. 모든 고통을 안아들이는, 항아리, 해도 비칠 것 같지 않은 작은 방은 이제 누에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이는 슬픔과 고통을 안으로 쟁여 품었다가, 그것을 비단실 같은 시어로 뽑아내는 시인의 이미지이다.
(……)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 뽑아낸다는 누에, /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락이 풀려나온 걸까 (……)
―「누에」 중에서
글을 쓰고 싶어하셨지만 / 글자만을 한 자 한 자 철필로 새겨넣던 아버지, / 그러나 고치 속에서 뽑아낸 실로 / 세상을 향해 긴 글을 쓰고 계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후로도 오랜 뒤였다 // 오늘밤, / 내 마음의 형광등 모두 꺼지고/ 아버지가 뽑아내던 실끝이 어느새 내 입에 물려 있어 / 내 속의 아버지가 나 대신 글을 쓰는 밤 / 나는 아버지라는 생을 옮겨 쓰는 필경사가 되어 / 뜨거운 고치 속에 돌아와 앉는다 // 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할 긴 편지를 나 역시도 쓰게 되는 것이다
―「누에의 방」 중에서
그리하여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얼어붙은 호수」)고 소통되지 않음, 내 마음 가 닿지 않는 안타까움을 고백하면서도,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그곳이 멀지 않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에 그는 시를 쓴다. 그리고 야트막한 포도밭처럼 낮게 낮게 엎드려 살면서 입 속에 남은 단 한마디를 기다릴 것이다.(「포도밭처럼」) 한 알의 포도씨처럼 단단하게 영글어갈 그 한마디를.
왜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 세상의 소리들을 잘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특히 살아 있는 존재들이 내는 울음소리를 나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 싶다. 사물을 통해 누군가 얘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 사물 자체가 말하거나 울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이미 시가 흐르고 있다.―시인의 말에서
"고통에 관해 말하지 않는 사랑의 빼어난 성취"
나희덕의 시에서는 시인보다 크신 이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신성한 숨결이라 할까요. 누에의 방에서 술술 풀려나오는 능라비단 같은 연금술의 언어는, 목소리가 높지 않고 나직하지만 끝내 읽는 이의 혼(魂)을 감흥과 떨림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밝고 섬세한 시인의 감식안은 혼돈의 삶 속에 감추어진 고통과 슬픔과 어둠을 낱낱이 헤집어내는데, 그것을 드러내는 원초적 에너지는 어머니 대지에 밀착한 자비의 상상력입니다.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고 경박한 놀음이 되어 있는 시를 위한 시 속에서, 만삭의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마침내 지난한 산고(産苦) 속에 태어난 햇아기들을 세상에 선보이는 나희덕의 詩살이는 창조적 젊음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고진하(시인)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는 기다림의 미학에 바쳐진다. 밤새워 날개를 말리는 잠자리가 무엇이든 담을 수 있으나, 하필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금이 간 항아리에 앉아 있는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시집은 기다림의 완성을 노래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달여서 맑아진 간장처럼 시인의 시는 고통의 즙액에 도달하고 있지만, 시인은 그 뜨거운 상징을 섣불리 항아리에 붓지 않는다. 이슬에 젖어서 밤을 새우는 잠자리 날개의 미세한 그물 무늬들에서 비상(飛翔)을 향한 단단함의 서슬을 노래할 뿐이다. 1990년대 30대 서정시인들의 내면풍경을 집약하는 이 대표적 시집을 통해 우리는 금이 간 시라는 항아리의 운명적인 날개를 만나면서, 고통에 관해 말하지 않는 사랑의 빼어난 성취를 누릴 수 있다. 박형준(시인)
* 2004년 5월 20일 발행
* ISBN 89-8281-782-4 02810
* 116*186 / 144쪽 / 값 7,000원
* 담당편집 : 황문정(031-955-8863)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고 경박한 놀음이 되어 있는 시를 위한 시 속에서, 만삭의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마침내 지난한 산고(産苦) 속에 태어난 햇아기들을 세상에 선보이는 나희덕의 詩살이는 창조적 젊음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고진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