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미술사, 역사의 맥락을 되찾다
오늘날 우리는 중세의 성화와 르네상스 건축, 모네의 유화와 앤디 워홀의 프린트를 통칭하여 ‘미술’이라고 부른다. 같은 의미로 수사본 채색공ㆍ화가ㆍ조각가ㆍ비디오아티스트 등을 ‘미술가’라고 한데 묶어 부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술사책은 이들을 고대ㆍ중세ㆍ근대ㆍ현대라는 ‘시대’와 고전주의ㆍ사실주의ㆍ낭만주의ㆍ인상주의 등 ‘양식’으로 분류해 설명한다. 간혹 특정 개인의 성향과 생애에 초점을 맞춰 물질화한 작품에 정신을, 몰개성화한 미술가들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노력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그러나 분류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그들은 시대와 양식과 개성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한 것인지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조짐도, 계기도, 갈등도, 중간 과정은 간데없고 오로지 결말만 있다. 마치 애초 미술의 역사와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그런데 한 번쯤 그들의 시나리오는 잊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미술’과 ‘미술가’에 대한 개념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같았을까? 수백수천 년 전 선조들도 우리와 같은 눈으로 미술가들과 그들의 창조물을 보았을까? 만약 괴짜, 천재, 독창성, 작품 등 오늘날 미술의 상투어가 된 것들이 18,19세기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전의 미술가들에겐 언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만들지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가 미켈란젤로의 역작으로 알고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만찬」이 후원자의 압력으로 억지로 그려진 데다, 외설스럽고 불결하다는 이유로 파기 위험에 처했다가 다른 화가가 그림을 수정하여 겨우 살아남은 것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대와 양식과 개성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술작품 자체도 온전히 시대의 산물이나, 미술가 개인의 발명품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미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의 부류에 치우지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연결고리들을 찾아 그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
『아틀리에의 비밀』은 미술가들의 삶의 터전이자 작품의 탄생지인 아틀리에, 즉 화가의 작업실을 들여다봄으로써 시대와 양식, 미술가 개인의 특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했는지 보여주고자 시도한 매우 특별한 책이다. 14세기부터 21세기까지 미술가들의 작업실이 변화해온 과정을 살펴보면서 미술가들이 처해 있던 환경의 변화, 그들의 생각의 전환을 읽고, 그에 따른 작품ㆍ양식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미술가와 미술의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했다. 시대와 미술가, 작품 사이의 숨은 연결고리들을 찾아내고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에 맥락을 되찾아주고자 한 것이다. 미술가들의 생생한 작업 현장을 둘러보며 독자들은 시대와 사회상을 피부로 느끼고, 시대의 영웅과 걸작이 탄생하기까지 과정을 간접 체험하면서, 역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역사 바깥에서가 아니라 ‘내부자’로서 작가와 작품을 좀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화가의 작업실로 본 역사
작업실의 형태를 보면 미술의 역사가 보인다. 중세시대 미술가들은 모두 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시대 미술가들의 유일한 평가 기준은 기술이었고, 당시 성행한 ‘보테가Bottega’ 문화에 따라 어린 미술학도들은 공방에 들어가 스승 밑에서 도제살이를 하며 그림을 배웠다. 각 공방은 작품 주문을 받아 여러 명이 함께 작업했고, 중세의 미술작품 중 작가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거나 아틀리에의 이름으로 대신한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한편 14세기부터는 왕실 귀족들의 초상화가 부쩍 늘었는데, 이는 13세기부터 왕실이 화가들을 직접 고용하기 시작하면서 미술가들이 ‘궁정 전속화가’라는 이름으로 조합에서 왕실로 작업실을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1년 혹은 그 이상 궁정과 계약을 맺고 정기적인 봉급과 함께 종신연금을 받아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대신 이들은 계약 기간 동안에는 궁정의 노예가 되어 개인 작업 활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또한 17,18세기의 미술가들은 단순한 수공업자로 만족하지 않고 지성을 갖춘 석학으로 변모하여 학자들의 모임을 연상케 하는 아카데미를 만드는 등 교양을 과시했다. 이들은 조합이나 왕실의 간섭에서 벗어나 스스로 화법과 작품 내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을 위한 전용 도서관이 만들어졌고, 세속적인 그림보다는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화가들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했다. 1648년에는 파리에 왕립 회화ㆍ조각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조합에 가입하지 않고도 작품 주문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화가들이 원근법이나 인체 해부 등에 관심을 갖고 미술에 다양하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고, 자화상이 자주 그려진 것도 미술가들이 자아를 회복하고 정체성을 획득하면서부터이다.
또 오로지 풍경화만을 그린 프랑스 최초의 유파 바르비종파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화가들이 유행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작업 터전을 마련해서일 가능성이 크고, 모네ㆍ마네ㆍ르누아르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야외 그림도 이들이 선박이나 공원, 기차역 등을 작업실로 삼은 데서 비롯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가의 작업실로 본 인물
이 책은 미술의 역사뿐 아니라, 미술가의 역사도 축약하고 있다. 시대별로 미술가의 지위와 이미지, 활동 영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함으로써 미술가들의 전혀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한다. 예를 들어 중세 미술가들은 일개 수공업자로 취급받으며 오로지 끈기와 인내, 훌륭한 기술을 요구받았고, 지적 욕구가 컸던 17,18세기의 미술가들은 힘겨운 투쟁 끝에 의뢰인의 그늘에서 벗어나 창작의 자유를 얻었으나 그 대가로 사회와 점점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갔다.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기이한 행동을 보이고 방탕하게 생활하며 스스로를 고립한 반면, 몇몇은 천재로 추앙받아 역사 속에 ‘신화’로 남았고, 다른 이들은 심한 사회 편견 속에 고독하게 살다갔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20세기의 미술가들은 사회와 융화할 것인지 더이상 갈등하지 않게 되었다. 이미 미술가라는 신분 자체가 사회에서 특별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대와 대립하며 통념과 보편화한 가치들을 부정하며 대다수가 지향하는 문화를 거부하거나, 대중문화 자체에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했다. 이렇게 이들은 주변인을 자처하며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 그들(미술가들)의 삶을 둘러싼 신화와 전설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신화와 전설의 경우 바로잡을 필요가 있거나 아예 잊는 편이 나을 때가 많았다”라고 책 앞머리에서 지은이가 밝혔듯이, 우리가 갖고 있는 미술가들의 정보는 부풀려지거나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미술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개인뿐 아니라 당시 사회상과 더불어 그들의 인맥, 거래, 권력 관계 등을 두루 살펴봐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미켈란젤로의 예에서처럼 미술가들은 때로 원하지도 않는 작품을 창조하고 뜻하지 않게 그 작품이 시대의 걸작이 된 경우도 있었으며, 실력도 특출하지 않으면서 운 좋게 후원자나 상황을 잘 만나 이름을 알린 미술가들도 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 종교 검열에 걸려 파기나 훼손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 역사에서 사라졌는가하면, 권력계층의 하수인 노릇을 훌륭히 해내 위대한 미술가로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도 있다. 역사학자들의 기록만 순진하게 믿고 그것이 진리이고 전부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화가의 작업실로 본 시장
화가의 작업실은 미술작품의 유통 구조를 파악하는 데도 유용한 수단이 된다. 중세 미술가나 궁정 소속 미술가 들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미술가들은 이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 자유를 담보해야 했고, 작품 주제와 소재는 물론 등장인물의 수ㆍ배경 요소ㆍ재료와 함께 작품 납품일ㆍ예상 비용ㆍ비용 지불 방법 등을 상세히 기록한 계약서에 서명하고 계약 조항을 그대로 따라야 했다.
자유를 찾기 위해 독립한 17,18세기 미술가들은 스스로 작품을 내다 팔기 위해 화실 밖으로 나와야 했다. 거리에 나와 좌판을 펴놓고 작품을 파는 이들도 있었고, 자택에 고상한 분위기의 ‘쇼룸’ 또는 개인 전시실을 마련해놓고 작품을 전시ㆍ판매하는 미술가들도 있었다. 미술가들은 개인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언론에 광고를 내는 등 새로운 판매 전략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관심에 목마른 미술가들 중에는 머리카락을 모아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황당한 소문을 내거나, 새로운 차원의 연필을 발명했다는 식의 허위 광고를 실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객과 미술가를 이어주는 전문 중개인 또는 미술협회가 등장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화상들이 개인 화랑을 열고 작품 판매는 물론 미술애호가와 비평가, 고객에게 미술가를 소개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술시장은 점차 체계를 갖춰나가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화가의 작업실로 본 미술의 협력자들
“과거든 현재든 미술가가 완벽하게 홀로 작업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라는 지은이의 말처럼 미술가들의 화려한 이름 뒤에는 언제나 충실한 조연들이 있었다. 위대한 미술가와 명작은 결코 혼자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 말 미술가와 인문학자 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기 쉽다. 당시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면서 의뢰인들은 미술작품에서 고대 로마 양식과 인문학적인 소재를 보길 원했는데, 이에 따라 미술가들은 인문학자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만토바 공작을 위해 일한 만테냐의 작품 「미덕의 정원에서 악덕을 쫓아내는 팔라스 아테나」(52~53쪽)나 보티첼리의 「신비한 탄생」(51쪽), 「아펠레스의 비방」(56~57쪽)을 보면 그림 곳곳에 인문학자들에게서 얻은 영감과 각종 정보가 녹아 있다.
매체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19세기부터는 미술비평이 문화예술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아 신문(『프레스』, 『주르날 데 데바』, 『콩스티튀시오넬』, 『르 나시오날』 등)과 전문 잡지(『아르티스트』, 『가제트 데 보자르』, 『릴뤼스트라시옹』 등) 들이 미술비평에 점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기 시작했다. 이런 매체들에 보들레르ㆍ고티에 같은 문필가들과 쥘 조냉ㆍ아르센 후세 같은 전문 비평가들이 글을 실어 미술가들을 화단과 대중에게 소개했다. 특히 보들레르는 당시 화가들을 억누르고 있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고, 다채로운 색 사용을 권장하는 등 근대성을 옹호하면서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힘입어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이 화단에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고, 쿠르베(「아틀리에」)와 마네(「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같은 화가들도 그림에 보들레르의 모습을 담아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등장 당시만 해도 ‘기계처럼 대상을 복제하는 수단’이라고 폄훼를 당했던 사진이 철학을 품고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된 것 역시 문필가들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헨리 피치 로빈슨이나 피터 헨리 에머슨 같은 사진작가들은 비평가들의 제안에 따라 사진술을 복제 수단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사진에 이야기와 작가의 감정을 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사진은 당시 유행하던 역사화와 경쟁하며 순수 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뜻밖의 미술 정보들, 역사를 완성하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은 본문 중간에 상자 글tip을 배치하여 기존 미술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색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미술가와 여행’(24쪽)을 보면 미술가들의 여행이 그들의 명성과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깨닫게 된다. 13세기부터 국가 정비가 강화되고 도로가 안전해지면서 미술가들은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각 시대의 미술양식이 쉽게 전파될 수 없었을 것은 물론, 그 훌륭한 고딕양식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최초의 미술 개론서’(30쪽)에서는 13세기와 15세기 사이 미술가들이 공부한 책들에 대해 배울 수 있고, ‘미술가들의 서가’(47쪽)에서는 중세 말 미술가들이 어떤 책을 소장했는지 알 수 있으며, ‘중세미술의 ‘색깔’들’(62쪽)에서는 미술가들이 사용한 안료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기업: 티치아노의 아틀리에’(88쪽)는 ‘지주회사’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미술가들의 아틀리에를 묘사했고, ‘미술가와 출판물’(358쪽)에서는 비평가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직접 글을 쓰고 매체를 창간해 자신들을 알린 미술가들을 소개했다. 독자들은 이렇게 미술사에 숨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읽으면서 흩어진 퍼즐조각을 하나씩 맞춰가며 그림을 완성하듯, 역사의 완전한 모습을 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