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 고흐를 무명의 암흑에서 건져낸 비평가 오리에
1890년, 젊고 야심찬 평론가 오리에는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한 장문의 비평문을 썼다. 고흐의 작품이 평론가의 비평 대상이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1888년에 고흐의 그림을 짧게 언급한 글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고흐에 대한 무관심만을 드러낼 뿐이다). 또한 그것은 고흐가 직접 읽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평문이었다. 그가 그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후 30년 동안 반 고흐에 관한 비평문은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그가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하며 그림도 단 한 점만을, 그것도 헐값에 팔 수 있었다는 사실과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던 화가가 어떻게 ‘천재’로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반 고흐를 다룬 최초의 평론가 오리에는 그를 다른 화가들과 차별화하여 특별하게 취급함으로써 자기 자신 또한 다른 평론가들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주류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는 고흐에게서 ‘일탈’과 ‘혁신’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는 시대적 흐름과도 상통했다. 전통적으로 아카데믹한 도제 수업을 거쳐 나온 ‘상대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평가하던 분위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절대적’ 탁월성을 높이 평가하는 가치 체계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의 사랑을 얻은 상태는 아니었다.
▶ ‘인간’ 반 고흐, 대중의 사랑을 얻다
반 고흐가 오늘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전문가 집단의 인정만이 아니라 대중의 폭넓은 사랑 또한 필요했다. 대중은 ‘인간’ 반 고흐에 대해 알 기회가 주어진 후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고흐를 직접 알고 있던 사람들, 대표적으로는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 등의 증언, 그리고 무엇보다 반 고흐가 직접 남긴 서신이 존재했고 그것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자신을 후원해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는 대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인간’ 반 고흐에 대한 사랑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반 고흐의 사례에 있어 특이한 점은, 작품과 작가, 그러니까 그의 예술세계와 인간 그 자체를 사람들이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예술성을 갖추었는가의 평가 대상에 그치지 않고 빈센트 반 고흐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독특한 그의 붓질 덕분에 사람들의 그의 그림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고, 그가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사실 또한 사람들이 작품과 반 고흐를 직접 연결시키게 했다.
▶ 그의 예술은 지고한 희생 행위였다!
저자 나탈리 에니히는 이렇게 반 고흐가 예술계의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성인전(聖人典)의 서술 방식에 비교한다. 반 고흐의 전기들은 13세기에 야코부스가 쓴 『황금 전설』에 수록된 성인들의 삶이 지닌 특징들을 고스란히 취하고 있다. 소명, 비범성, 고립, 사회에 순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성, 금욕과 가난, 재화를 초월한 지고한 정신, 몰이해로 괴로워하는 순교자, 후대에 거둬들인 성공 등 성인들의 생애를 기술하는 데 쓰이는 모티프들 전부는 반 고흐의 전기에 적용할 수 있다. 수많은 전기가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같은 정보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을 따름으로, 이같은 전기의 과잉 생산 자체가 숭배 활동이자 숭배의 열렬함을 방증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에니히는 “고흐의 전기는 역사적 연구라기보다는 그를 기념하는 사업, 전시회, 순례 같은 집단적 축성에 속한다”라고 지적한다. 심지어 그가 귓불을 자른 사건이나 자살은 일종의 ‘희생’ 혹은 ‘순교’로 받아들여지고, 그를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던 과거는 사회가 집단으로 저지른 죄가 되어 큰 죄의식을 남긴다.
▶ 가장 비싼 그림 값으로 속죄하라
미술시장에서 반 고흐의 작품 거래는 유명인 혹은 위대한 인물의 ‘유품’ 거래와 비슷한 성격을 띤다. 그저 훌륭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바로 ‘그’가 남긴 존재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치 성유물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반 고흐 작품의 가격은 마치 그가 받았던 부당한 대우의 보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작품 구매의 인플레이션은 부당함에 대한 ‘속죄’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반 고흐 작품이 도달한 판매금액 기록들과 끊임없는 시세의 인플레이션을 이해할 수 있다. 매번 인상되는 가격의 폭은 빚의 증가를 산정하고, 화가 생전에 가치 없게 여겨지던 작품이 오늘날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수록 점점 더 가격도 높아진다. 여기에서 이 빚을 갚기 위해 작품을 구매함으로써 속죄해야 할 필요성이 나온다. 점점 더 늘어만 가는 빚을 변제하기 위해서는 항상 더 많은 것은 내어주어야 하므로, 그 구매가격도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구매는 무분별한 집단에게 현대에 와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201쪽)
그리고 이는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찬미 행위가 명성을 만들고, 명성은 다시 찬미 행위를 촉발하는 것이다.
▶ 순례, 성스러운 예술가의 흔적을 따라
“1890년 7월 29일에 있었던 화가의 장례식에 마을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일요일에 마을은 미사와 경건한 행진을 마련하여 그 무관심을 속죄했다. 500명이 넘는 이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공식적인 장례」, 『르몽드』, 1990년 7월 31일자 )
반 고흐를 기념하는 행위의 절정은 10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행사에서 볼 수 있었다. 1990년 7월 29일. 이 날은 화가가 죽은 지 정확히 100년째 되는 날이며 <100주년 기념전>이 막을 내리는 날이기도 했다. 고흐가 생을 마감한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는 그 전날부터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반 고흐를 위한 축연을 벌이는 전야제로 시작한 이 행사는 다음날, 엄숙하게 거행된 또 한 번의 장례식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기념이라기보다는 순례 행위이며, 단순한 심취가 아니라 숭배이다. 순례 참가자들은 고립되고 순교당한 이가 마지막을 보낸 장소에 직접 감으로써 그가 당한 부당함을 보상했다는 일종의 도덕적 만족감을 느낀다.
“이제 예술가는 작품에 의해서 위대해지듯
그가 살아온 생애를 통해서도 위대해질 수 있다.”
‘반 고흐 효과’란?
반 고흐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사회에 ‘증여’했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에게 빚을 진 셈이 된다. 작품을 감상하며 즐거움을 얻을 때마다 당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희생을 감내한 한 개인에 대한 부채감은 늘어만 간다. 이를 갚기 위해 작품을 구매하고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보고 심지어 그가 살고 죽었던 장소로 순례하러 가는 것이다. 시선과 참석과 시간과 돈을 선사하여 학자와 대중은 고인―반 고흐―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하고, 이 ‘증여’와 ‘빚’이 오가면서 ‘반 고흐 효과’가 나타난다. 반 고흐 효과는 바로 이 채무와 증여의 순환적인 교환을 나타낸다. 이렇게 한 화가에 대한 기념은 지수함수적 순환논리를 갖게 된다. 찬미자들의 찬미 행위로 인해 한 무명의 화가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웅이 되고 그의 그림은 국제적인 보물이 된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번 찬미 행위를 강화하는 바탕이 된다.
반 고흐 사례는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이기도 했다. 반 고흐는 그저 자신의 생을 살았을 뿐이지만 반 고흐 ‘이후’에는 어떤 예술가도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실패가 순교의 한 형태, 즉 아직 인정받지 못한 위대한 예술과 고유한 신념을 입증하는 영광스런 증거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