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꾸준한 시작활동을 해온 김근이 첫 시집 『뱀소년의 외출』을 선보인다. 감각적인 이미지의 배치와 소재에 따른 호흡의 적절한 조절로 시의 완벽성을 추구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 그로테스크하고도 서정적인 이미지들이 돋보이는 48편의 시를 담아 안정되면서도 개성적인 그만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
떠오르는 말들의 힘
이번 시집은 “결코 썩지 않는 내 영혼은 조금식 부풀어오르고 흐흐 지겹게 나는, 또, 태어”난다고(「오래된 자궁」) 이야기하며 불안을 채 떨치지 못한 모습으로 시인의 탄생과 성장을 몽환적으로 그리고 있는 제1부와, 저녁 아기들이 “가로수마다 꿰어져 지독한 비린내를 뿜어”대는(「어미들」) 비정상적인 현실을 상상으로 나타내고 비판하는 제2부, “부러진 시간의 마디마디에서/상한 눈으로 내가 보는 건/절그럭거리는 어둠뿐”(「봄밤」), “푸른 냄새를 뚫고/푸른 새들이 날았다/태어나지 못한 푸른 아기들”처럼 자유로이 떠다니는 단어들로 “미학적 판타지를 실험하는” 제3부, 그리고 “벤치에 앉아 있는 늙은이들”(「햇볕 좋은 날」)이 “흰 머리칼 산발”하고 있는(「바리데기」) 기억상실의 무기력한 모습들로 채워진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시편들에는 어미와 아이, 뱀과 허물(껍질), 죽음과 삶(물) 등의 상반된 소재들과 시인 특유의 사투리, 또렷한 의성어, 의태어들이 사용되어 이미지들의 떨림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그만의 시어가 갖는 말의 힘과 매력 때문에 김근의 시는 판타지 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 의미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범위로 좁아지고, 스스로 만든 환상으로 부풀어오르는 시는 고독한 프라이버시의 시가 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이 고독감의 표현에 의해, 김근의 판타지 시는 벌써 범주류가 된 경박한 문화적 시류를 그 시류로 전복하는 일종의 재귀적 문명비평이 된다. 그의 시에서 현실이 환상으로 변주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이 시대의 불행에 대한 불행한 의식이 있으며, 그 불행에 대한 인식의 결핍을 촉진하는 문화적 양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꿈에, 누이야, 살랑거리는 물주름도 없이, 江인데,/이따금씩 튀어오르는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없이/푸르스름한 대기 살짝 들떠, 未明인지 저녁 어스름인지,”(「江, 꿈」)라는 구절에서 보여지는 서정성이 판타지의 왜곡을 자유롭게 하고 다른 세계로 탈출하게 하기 때문에 ‘고독한 판타지’는 자폐적 세계에 머물지 않고 연대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느샌가 꾸며진 태몽과, 이제는 사라져 오직 시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새로 난 길에 뒤덮여버린 집, 어릴 적 뛰어 놀던 동네는 시인에게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 즉 시를 이끌어내는 “어미”이자 “신화”이다. 이 신화의 터전에서 뻗어나온 시는 언어의 몸을 얻어 생생하게 살아난다.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꽉 찬, 잘 여문 열매”가 되어가는 김근의 고독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시들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는지.
신화적 상상력으로 펼쳐놓은 풍성한 감각의 축제
김근은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는 듯, 풍성한 감각의 축제를 펼쳐놓고 있다. 그 빛깔은 눈부시게 선연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자극적이어서 자꾸 우리의 겨드랑이를 가렵게 만든다. 죽음이 결국은 생에 닿아 있고, 생의 입구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이 젊은 시인이 일찍 알아챘기 때문에 감각이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인가. 비슷한 또래 시인들의 자폐적 언어와 김근의 언어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데, 그것은 기억을 해석하는 그의 남다른 능력 때문이다. 그는 기억에다 구체적인 몸을 부여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얻게된 밀도 높은 언어, 거기에다가 신화적 상상력의 작용으로 이 시집은 꽉 찬, 잘 여문 열매가 되었다. 안도현(시인,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근의 언어들이 가지는 문명 직전의 힘, 씌어지지 않는 시간들을 쓰는 힘, 우리는 그 힘을 아마도 신화적인 상상력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상상력이 세속적인 시간을 그릴 때 그 힘은 어떤 역동이 되어 시의 정수리를 때려친다. 그 세속적인 시간은 “억척스럽게 꽃잎들이” 시인에게 “달라붙는” 시간이며 “눈알들이 거래되는 시간”이며 또한 “무수한 날에 바꿔 달 눈알들”을 낳는 시간이다. 나는 이 시인이 “시커멓고 무서운 몸을 빛내는 항아리들”의 언어를 자주 건져내기를, 바란다. 그의 서사적인 힘이 고대를 가로질러가면서 언젠가는 현대를 껴안는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이 시도는 한 시인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과제일 터이지만 드물게 리듬의 남성적인 위력을 가진 이 시인이 그 시도를 잘 해내리라고 믿어본다. 허수경(시인)
* 2005년 9월 28일 초판 발행
* 121*186 / 136쪽 / 7,500원
* ISBN 89-546-0040-9 02810
* 책임편집 조연주, 김반희(031-955-8865/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