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빌딩의 펜트하우스에서 열리는 기묘한 이야기 집회
화려한 도쿄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빌딩숲 한가운데 우뚝 솟은 고급 빌딩의 펜트하우스. 그곳에서 ‘사고루’라는 이름의 기묘한 이야기 집회가 열린다. 사고루(沙高樓), 즉 ‘모래로 지은 높은 누각’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아득한 꼭대기이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자리를 의미한다. 이 모임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성공을 거두어 정점에 오른 사람들. 그들이 명예와 목숨을 위해 지금껏 마음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던 비밀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얼핏 보면 한여름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모여앉아 촛불을 켜놓고 귀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는 풍경. 그러나 ‘사고루’에 모인 사람들의 목적은 단순히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귀신이나 유령이 등장하는 기담(奇譚)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체험 속의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기담(綺譚) 다섯 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대장장이」 대대로 일본도 감정을 업으로 삼고 있는 유서 깊은 가마쿠라 가문의 종가에 전설로만 전해져오던 역사적인 도검들이 등장한다. 진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기술과 완성도, 그리고 진정한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그 놀라운 도검들에 감정가들은 혼란에 빠진다. 데릴사위로 들어와 대를 이은 당주 오히나다는 어느 날 우연히 술집 주방장이 쓰고 있는 식칼에서 예의 장인의 흔적을 알아보고 그를 추적한다. 우아하고 화려하며, 강인하고 기품 있는 일본도의 세계. 그 뒤에 숨겨진 가문의 비밀이 밝혀진다.
「실전화」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정신과 의사 시마. 그에게는 어렸을 때 린이라는 단짝 여자친구가 있었다. 린은 집안이 몰락해 명문 학교를 떠나게 되어 그와 헤어지지만, 그후 그는 계속해서 우연한 기회에 린과 마주친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전철역에서, 가족과 함께 피서를 간 바닷가에서, 록밴드의 공연장에서, 그리고 신혼여행지에서까지……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린과 보냈던 유년 시절에 그가 깨닫지 못했던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유년의 아름다운 기억에 사로잡힌 한 여인의 기묘한 운명.
「엑스트라 신베에」 전쟁의 상처를 씻고 영화산업이 눈부신 발전을 맞이하던 50년대의 일본. 영화판에 일생을 바칠 각오를 했으나 갑작스런 전쟁으로 인해 그 열정을 가슴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카메라맨 노부오는,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동료들과 함께 막부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영화를 촬영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 촬영을 앞둔 그의 앞에 수상쩍은 사무라이 엑스트라가 나타난다. 완벽한 분장과 의상, 실감나는 사극풍 말투, 대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다치바나 신베에’라는 이름의 배역.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명예와 부에 대한 욕심도 없이, 오직 신념을 위해 시간과 공간마저도 초월해버린 한 무사의 영혼이 스크린 뒤의 어둠에서 가만히 되살아난다.
「백 년의 정원」 우아한 영국식 정원의 주인으로 유명한 ‘가드닝(gardening)의 여왕’ 오토와 다에코. 모임에 초대받은 그녀 대신 초라한 모습의 정원지기 노파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후와 풍토가 나쁜 별장지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다는 일념을 갖고 있던 한 신사와, 그의 뜻에 따라 평생을 정원지기로 살아온 자신의 아버지. 그러나 인간의 일생은 하나의 정원을 완성할 수 있는 기한도 되지 못할 만큼 한없이 짧다. 대를 이어서 정원을 지키게 된 그녀는 어린 시절의 비밀스런 추억을 위해 누구의 눈에도 부끄럽지 않은 정원을 만들 것을 결심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정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나무와 풀과 꽃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의 종으로 살아온 그녀가 밝히는, 인간과 자연에 얽힌 섬뜩하고 슬픈 비밀.
「비 오는 밤의 자객」 야쿠자 세계에서 대(大) 오야붕으로 불리는 남자가 평생 밝히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무작정 도쿄에 상경해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엉겁결에 야쿠자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소년에게 어느 날 자신의 오야붕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남몰래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에게 이별을 고하고, 만일을 위해 죽을 각오까지 하며 밤새 총 연습을 하는 소년. 그러나 작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뒤따르는 우연과 오해와 함께 사건은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고 만다. 한 인간이 영웅이 되는 순간, 그 뒤에 숨겨진 커다란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
명주실처럼 얇고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기품 있고 매혹적인 일본 기담의 정수
각기 다른 다섯 가지의 인생이 펼치는 짧고도 강렬한 드라마. 작중 화자의 입을 빌려 하나씩 하나씩 아사다 지로의 손끝에서 살아나는 이야기들은 ‘희대의 이야기꾼’이라는 칭호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흥미롭고 탄탄하며, 무엇보다 하나같이 그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인간미가 물씬 풍겨난다. ‘사고루’에서 각계의 명사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인물의 성공담이 아니며, 전설 속의 신비로운 사건들은 더더욱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한 가지 일에 일생을 바치게 된 사람들의 아주 조금 특별한 체험담일 뿐이다. 그다지 오래지 않은 시간과 멀지 않은 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인생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섬뜩하고 무서우면서도 묘하게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신기하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보면 모두 진실한데도,
그런 진실된 인간들이 모이면 어째서 이런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는 건지.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신이 만든 가장 열등한 생물이라는 느낌도 드오.
만들어지다 만 생물이란 생각이 들지 않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