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토끼 차상문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지난 몇 달 동안 한 남자와 속깊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차상문, IQ 200이 넘는 토끼인간이죠. 한국문학사에 전무후무한 캐릭터라 감히 자부하는 그, 라는 캐릭터를 만난 이후 저는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차상문의 생김새를 어떻게 그려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작가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상상이 안 되는데... 민정씨가 그냥 알아서... 허걱!
예뻐라 하는 화가 후배를 찾아갔습니다. 3월에 전시를 앞둔 그는 뭐 어렵겠어요, 하며 손쉽게 수락을 해주었습니다. 당장 소설을 보냈습니다. 오들오들 떨렸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읽을지가 제겐 이 소설의 독자층을 살피는 데 바로미터였거든요.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누나, 이거 너무너무 재밌어요. 무조건 할게요! 일년에 책 열 권도 안 읽는 녀석의 말, 그건 바로 희망!
우리들의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가 후배는 제가 밟은 것이 저라는 똥임을 몰랐을 겁니다. ㅋㅋ 토끼인간이라는 캐릭터 하나를 만들어내기까지 녀석으로부터 스무 컷 가까운 시안이 도착했습니다. 새벽 네 시에 자는 애를 깨워 정웅아, 차상문 말이다.. 은근한 목소리를 들려줬습니다. 토끼에 관련된 다양한 책을 외국에서 공수해와 메일 터지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 역시 눈 뜬 장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차상문이 어떤 모습을 했을지, 어떻게 그려내야 오버가 아닐지 가늠이 안 되었으니까요. 꼬리 달아주기를 마지막으로 캐릭터는 완성되었습니다. 제법 차상문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들여다봐서 눈이 먼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천재토끼 차상문>, 이 소설의 원제는 ´슬픈 토끼´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슬픔이 슬프다고 말하는 순간 엄살이 되는 걸 여러 번 목격한 사람입니다. 덤덤해져야 했습니다. 제목을 새로이 짓고 보니 뭔가 숨고 숨길만한 요소가 생기는 듯했습니다. 선글라스를 쓴 기분이었습니다. 그 눈으로 다시금 소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일제 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사가 고스란히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역사와 사회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소설, 참 간만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가 참 웃기면서도 슬프지 않습니까. 지금 와 보면 코미디 같은 세상사에 왜 그렇게 벌벌 떨었을까, 넙죽 엎드린 채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가계가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일 것입니다. 물론 후대의 우리들도 지금의 우리들을 그리 보겠지만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김남일 작가의 역량이었습니다. 책을 들어 읽기 시작하는데 정신 없었습니다. 저 같은 늙은 빵꾸똥꾸 변비환자에게는 그야말로 제격인 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세상에나, 간만에 웃어가며 읽은 책이었습니다. 세상에나, 간만에 웃고난 뒤 쓸쓸해지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밑줄 그은 문장들이 넘쳐나는 책이었습니다. 인간인 제가 인간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잦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인간인들 토끼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까. 작가 역시 토끼 볼 면목이 없어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한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써나갔다는데... 아무래도 이 책, 인간들에게 일침 아닌 똥침을 놓기 위해 여기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책이 나오자마다 아이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비단 이번 지진뿐이겠습니까. 어떤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닌 다른 낯선 장르 속에 꽂혀 있었겠지요. 다시 돌아와 <천재토끼 차상문>의 얘깁니다. 과거를 이렇게 겪었으니 이제 남은 미래를 어떻게 겪어야 할지 우리 인간들은 지금부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거 어디부터 잡아채서 생각을 묶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작가가 시큰둥하게 이럽니다. "제발, 무엇이든 하려고 좀 하지 마시라! 무엇을 하든 지구별은 그만큼 무너지게 마련이다." 어떤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문제로 아는 바로 그 정신을 문제 삼는 것이 소설이 아닐까요. 소설이 실용서라면 비교적 쉬울 텐데, 그렇지 아니해서 소설은 이렇게도 힘든가 봅니다. 우리들 두루두루의 인생처럼 아무런 답 없음이 답이라서요.
3.
어쩌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말만 앞세우는 이런 방식, 차상문이 옆에 있었다면 지적했을 것입니다. 피켓 들고 거리 시위는 하지 못할 성격이므로 저는 조용히 이 책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저는 학생들이 이 책을 많이들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논술선생은 아니지만 뭔가 자신의 생각을 개진시켜 나가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줄 거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작가가 듣도 보도 못한 토끼 캐릭터를 내세워 제 하고픈 말을 그것도 아주 객관적인 방식으로 풀었듯이^^ 물론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 겨울을 마음 훈훈하게 해줄 소설이라는 데 또한 확신의 한 표를 던집니다.
4.
그러나저러나 제가 만들고 제가 좋다고 뻔뻔히 그럽니다.
나이 한 살 더 먹으니 부끄러움도 모릅니다. 미친 민쟁은 ㅋㅋ
그러나 아이보다 더 아이스러운 시인이었던 퐁주 할아버지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단지 좋으니까 좋아하는 것이라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라고.
안 보이시겠지만, 저 혼자 있는 이 시간 제 양볼은 붉습니다.
저는 볼 빨개지는 민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