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계 문화 같은 기묘한 서브컬처를 끌어안게 된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지적한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이라는 개념을 들고 온다. “근대는 커다란 이야기가 지배한 시대였다. 그에 비해 포스트모던에서는 커다란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기능부전을 일으키고 사회 전체의 결속이 급속히 약화된다. 일본에서 그 약화는 고도경제성장과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석유 파동과 연합적군사건을 거친 70년대에 가속화되었다. 오타쿠들이 출현한 것은 바로 그 시기이다.”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커다란 이야기’, 즉 ‘세계관’과 ‘사회적 가치규범’이 상실된 후 사람들은 한동안 그것을 날조하는 ‘이야기 소비’를 해왔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그마저도 더이상 욕망하지 않고 잘게 나눈 ‘데이터베이스’만을 소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오타쿠들의 소비행태는 코제브가 전후의 미국형 소비사회를 지칭한 ‘동물적’이라는 표현과 상통하며, 욕구충족과 닫힌 사회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성의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동물화’의 방향과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현대사회는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다소 까다롭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이나, <기동전사 건담> <에반겔리온> <디지캐럿> 등 대중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을 예로 들어 이론과 실제 사례를 번갈아가며 논리정연하게 풀어나가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오타쿠 문화뿐만 아니라 일본 현대사회의 굴절되고 왜곡된 이면이 보여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브컬처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시사적 문제에 대한 명석한 분석을 경유하여 기존의 서사를 베껴 쓰는 2차창작, 아바타와 같은 캐릭터적 인간형, 동물화하는 욕망 등,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의 창출, 주체와 타자, 욕망과 소통에 대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정식화시킨다. 보드리야르, 들뢰즈, 지젝, 라캉, 데리다와 같은 저자들의 저서를 창조적으로 독해하는 솜씨는 지적 호기심을 지닌 독자들의 욕구를 크게 자극할 만하다.
정보화하는 일본사회에 대한 실제적인 문명사적 비평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2001년 일본에서 간행된 이후 각종 서브컬처 이론의 바탕이 되었으며, 특히 오타쿠 문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책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철학이나 사회학, 오타쿠 문화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선행되지 않은 독자들에게서도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대중적인 가치를 얻는 데 성공했다. 풍부한 도판과 도표 설명은 본문의 내용 이해에 친절한 도움을 주고 있으며, 각 장과 단락은 짧게 나뉘어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요컨대 이 책은 한국이라는 담론 공간, 문화와 문학장을 밀도 있게 성찰할 계기를 줄 저서이며, 아울러 새로운 사회학적, 철학적 담론 분석에 흥미를 가진 독자로부터 애니메이션과 오타쿠 문화를 애호하는 독자에 이르기까지 두루 호기심을 충족시킬 책이다.
지극히 일본적인 문화이지만 이젠 결코 우리 사회와도 동떨어진 존재는 아닌 ‘오타쿠 문화’, 저자의 통찰력과 비판적 성찰은 일본과 유사한 담론공간으로 이행하고 있는 한국의 정보사회와 새로운 유형의 문화를 분석하고 예견할 만한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독자를 전제로 하여 일본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오타쿠’의 표현은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으며, 또 원래 일본과 한국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부터 소비사회의 성질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만화나 게임 같은 역사가 짧은 ‘탈사회적’인 서브컬처의 변천으로부터 현대사회의 정신구조를 탐색하려는 이 책의 의도는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유효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간행이 기점이 되어 한국의 독자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 되돌아올 것을 마음속 깊이 기대하고 있다.
_서문 중에서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년 도쿄 출생. 도쿄 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 수료. 국제대학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센터(GLOCOM) 교수를 거쳐 현재 도쿄 공업대학 세계문명센터 인문학원 특임교수 및 디렉터로 재직중. 1993년 「솔제니친 시론」으로 데뷔하여 이후 다수의 인문과학 계열 잡지에 평론을 게재했다. 1998년 『존재론적, 우편적─자크 데리다에 관하여』로 제21회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 미시마 유키오 상 후보에 올랐다. 포스트모던에서 오타쿠 문화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상에 대한 폭넓은 발언과 논고를 전개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 외의 저서로 『우편적 불안들』 『불과시(不過視)적인 것의 세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 『문학환경론집 아즈마 히로키 컬렉션L』, 공저로 『동물화하는 세계 속에서』 『자유를 생각하다』 『도쿄에서 생각하다』 등이 있다.
옮긴이 이은미
1960년 전북 고창 출생.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졸업. 일본 도쿄 대학 종합문화연구과 지역문화 전공 석사 학위 취득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동신대학교 언어치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연구 분야는 의미론, 신경언어학이다. 주요 저서로 『일본어 한자정복』 『일본어의 문형』 『스크린 속의 영어』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인지언어학 키워드 사전』 『젠더/섹슈얼리티』 『소리와 의미의 에크리튀르』 『황홀한 사람』 『프로이트의 실어증』 등이 있다.
감수 선정우
만화 칼럼니스트, 출판기획사 코믹팝엔터테인먼트 대표. 1995년부터 조선일보, 『문예연감 2005』 등에 만화·애니메이션 칼럼을 연재했고, 2002년부터는 요미우리 신문, 『키노』 등 일본의 신문과 잡지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기고를 지속해왔다. 200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 일본관 초대 작가로서 참가하여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전시작품을 발표했다. 2002년 대한민국만화대상과 2004년 오늘의우리만화상을 비롯해 다수의 만화 관련 사업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저서로 『슈퍼 로봇의 혼』, 일본에서의 공저 『오타쿠:인격=공간=도시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관 카탈로그』 등이 있다.
* 2007년 6월 29일 발행
* ISBN 978-89-546-0325-6 03300
* 153*210 | 240쪽 | 8,800원
* 담당편집 : 양수현(031-955-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