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이야기꾼, 언어의 마술사로 찬사 받는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 레스코프 작품집
러시아문학사에서 레스코프가 갖는 위치는 확고함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가치가 과소평가된 감이 있다. 동시대 작가들이었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늘에 가려 우리 독자에게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스코프는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대작가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레스코프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더 많이 읽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며, 후에 고리키는 젊은이들에게 레스코프의 작품으로 문장법을 배울 것을 권했고, 토마스 만과 발터 벤야민은 그를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 평가했다.
레스코프가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때는 첨예한 당파싸움의 시기였다. 진보와 보수, 두 당파의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신인작가들은 스스로를 어느 한 당파와 동일시하지 않으면 비평가들의 부분적인 인정이나마 받기 힘들었다.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은 레스코프는 비평가들의 인정이 아니라 독자들의 인기를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특이한 경우였다. 러시아 민중의 구체적인 실상을 재미있는 스토리로 구성하여 (‘스카스’ 기법이라 불리는) 구어체로 실감나게 표현한 그의 작품은 그전까지의 러시아 소설 경향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고, 일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레스코프는 1831년 러시아 중부 오룔 현 고로호보에서 평범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하고 관청의 기록원으로 근무하면서 러시아의 현실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가 후에 자신의 작품의 중요한 토대를 얻게 된 것은 이모부 스콧의 일을 돕게 되면서였다. 러시아 대부호들의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던 스콧의 요청에 따라, 레스코프는 영지들을 방문하여 실태조사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레스코프는 이 일로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각 지방의 진기한 풍습과 문물을 접했다. 그리고 이때의 소중한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녹아들어, 러시아 전국의 다양한 인간군상이 펼치는 진귀한 이야기들의 밑바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자유주의적이고 교양 있는 농노주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농민에 대한 감상적인 연민의 태도가 그의 작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농민을 이해하는 이런 실제적이고 독자적인 경험 덕분이었다. 레스코프는 농노를 소유하지 않고 현실을 이해하게 된 러시아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관찰력과 민중에 대한 지식으로 현장의 실태를 스콧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써 보내던 레스코프는 이 일을 계기로 저널리스트가 된다. 그리고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는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실제적인 지적 훈련을 거친 그는, 당시 상당히 과격하고 비실제적이었던 논쟁적 당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페테르부르크 대화재 사건’으로 그는 의도하지 않게 진보 진영의 총 공세를 받는 입장이 되었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 가짜 사회주의자들의 실체를 폭로한 그의 첫 장편소설 『막다른 골목』으로 그는 또 한 번의 대형 스캔들을 일으켰고 급기야 ‘반동’으로 낙인찍혔다. 이후 레스코프의 인기는 그 어느 비평가의 인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의 훌륭한 안목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가 작가로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1872년에 연대기 형식의 소설 『성직자들』을 발표하고 이어서 1870년대 말까지 성직자의 생활을 다룬 일련의 단편을 계속 발표하면서이다. 이들 작품으로 레스코프는 러시아정교와 보수적 이상의 옹호자로 알려졌지만, 이것은 그에 대한 오해에 불과하다. 교회에 대한 그의 태도는 뻣뻣했고, 그의 기독교 정신은 점점 전통에서 멀어져 비판적으로 되어갔다. 그는 교리와 종파를 초월해 삶의 교훈으로서 기독교를 옹호했다. 이런 그가 1880년대부터 톨스토이의 윤리 도덕적 종교 사상에 이끌린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후 레스코프는 점차 러시아정교회의 형식적이고 교조적인 면모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성직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 『어느 주교의 소소한 일상사』는 발표한 지 10년 도 더 지나서 레스코프가 자신의 전집을 발간하려 했을 때 작품의 내용이 검열에 걸려 이 작품이 실린 전집 제6권이 발간금지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레스코프는 정부의 지속적인 검열 대상이 되면서 보수진영에서 멀어졌고, 반대로 좌익 진영에서 출간을 하게 되었다. 생애 말년에 그는 주로 온건한 급진 잡지에 작품을 기고했지만, 문단은 그를 ‘병든 재능의 작가’로 부르며 비난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그는 전국에 걸쳐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단에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러시아 소설은 전통적으로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의 내면적 필요성과 인물의 성격 묘사를 중시하는 반면, 이야기의 플롯은 경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레스코프는 스토리 구성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고, 유머스럽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 화려하게 포진한 소설을 썼다. 사상과 메시지를 중시했던 ‘진지한’ 러시아 소설의 전통에 위배되는 그의 이러한 작품들을 보고 비평가들은 레스코프를 단순히 ‘농담꾼’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언어의 화려함과 빠르고 복잡한 서사는 그의 작품에 독특한 색채와 감각을 부여했고, 톨스토이는 그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의 ‘말장난’을 즐겼다.
레스코프 작품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은 ‘스카스’라 불리는 기법이다. ‘스카스’는 간단히 말해서 구어체를 재현하려는 문체양식으로서, 고골에서 시작되어 레스코프를 거쳐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러시아 특유의 장르를 일컫는다. 당시 사실주의 작가들의 고르고 매끈하고 평이한 문체에 구애받지 않고 레스코프는 속어, 각 직업 전문용어, 각 지방 방언, 익살스런 말장난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이 문체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레스코프 소설의 스카스 기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왼손잡이」이다. 레스코프의 독창적인 언어 구사는 레미조프, 조센코 등 20세기 전반기에 새로운 양식의 산문을 개척하는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레스코프는 사망하기 얼마 전에 “지금은 내가 꾸며낸 허구, 아름다움 때문에 읽히지만, 50년 후에 이 아름다움은 퇴색할 것이고 내 책들은 오직 그 안에 담긴 사상 때문에 읽힐 것이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 예언은 빗나간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예측 자체는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지방도시, 구교도, 괴짜, 촌부 등 러시아 사회와 문학에서 소외된 주변 요소들을 심층적으로 다룬 그의 작품들은 주류 문화의 해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대 문예사조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은 언어의 연금술 이전에 선량한 약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작가로서 레스코프의 진면목을 깨닫게 해준다.
러시아문학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체호프로 다 이야기될 수 없다. 레스코프는 러시아인들에게 인정받으며 실제로 러시아 민중에 대해 가장 폭넓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