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 break - make 의 시대
감각적인 광고로 이름 높은 한 카드 회사의 최근 광고 카피 make-break-make가 화제다. 끊임없이 만들고 버리기를 강요하는 지금의 소비 행태를 이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낡고 오래된 것들을 과감히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버린다’는 것의 동기는 ‘더 나은 무엇’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또 다른 것을 소비하기 위함’에 가깝다. 새로운 것을 취하기 위해 아직 쓸모가 남은 것을 아무런 감정적 저항 없이 버릴 수 있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미덕인 것이다. ‘버리기’를 망설이는 태도는 이제 좀 촌스럽다고 할까.
이 make-break-make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단단한 고리는 바로 소비자다. 그들은 늘 비슷한 패턴을 고수한다. 어제 간절히 갖고 싶었고 오늘 드디어 손에 넣었으나 내일이면 시큰둥해지는, 그리고 또 다른 ´신상´을 찾아 기꺼이 방황하는 무한반복의 패턴. 가끔은 그들도 자책한다. 소비의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고분고분 물질에 지배당하는 스스로를 각성해본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는다. 이것은 ´된장녀´, ´고추장남´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대 보통 소비자의 일상이다. 개인의 어리석음을 나무라기에는 시대가 좀 가혹하다. 그 배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생산해내며 사람들을 추동하는 디자인 산업이 있다. 그들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로 일 년 내내 무언가를 실어 세상으로 쏟아낸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것을 낳는 것만으로 괜찮은가
이 지점에 멈춰선 디자이너가 있다. 일본의 20년차 중견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 매일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물건의 생성과 소멸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던 그는 어느 날 이렇게 자문한다. ‘디자이너는 과연 새로운 것을 낳는 것만으로 괜찮은가.’
디자이너는 트렌드의 최전방에 있는 사람들이다. 대중에게 새로운 흐름을 앞서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따라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괜찮은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제 몫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가.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물건이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소멸되는 과정 전부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몫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만의 방식으로 long life design 철학에 기반 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일본 디자인 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온다. 그의 활동은 디자인과 소비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에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며 지금도 일본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 8년간의 기록이 여기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내용 소개]
이 책은 일본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가 자신의 long life design 철학을 다양한 비즈니스로 구현하며 느낀 8년간의 감상을 담고 있다. 버려진 중고품을 발굴하여 판매하는 D&DEPARTMENT PROJECT, 도시와 지역의 디자인을 함께 성장시키는 NIPPON PROJECT, 일본의 1960년대 제품을 리브랜딩하는 60VISION, 디자인계 거장들의 육성 인터뷰를 CD로 제작하는 VISION´D VOICE 등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어느 한 분야로 묶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방대하고 전방위적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업은 한 가지 생각 위에 존재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 곁에 남아있는 디자인,
세대를 뛰어넘어 늘 유용하고 쓸모 있는 디자인,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디자인이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발견하는 D&DEPARTMENT PROJECT
D&DEPARTMENT PROJECT는 저자의 가장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사람들이 내다버린 물건들을 수집해 판매하는 비즈니스다. 말하자면 중고판매상. 물론 매장에 구비된 중고품들은 까다롭고 엄정한 저자의 디자인 철학에 준해 수집된 것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이건 디자인 프로젝트라기보다 그저 숍을 운영하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작업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발상이 깔려 있다.
- - 이후에 어떻게 버려지든 일단 만들어내기만 하면 된다는 디자이너들의 관성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
- - 쉽게 만들어진 물건을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소비 사이클 전반에 대한 비판
D&DEPARTMENT PROJECT 매장에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디자인한) 물건은 없다. 그러나 버려진 물건 중 디자인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발굴하여 숍을 운영해나가는 일련의 과정과 그 발상 자체가 또 다른 차원의 디자인 작업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물건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내는 디자인인 셈이다.
도시와 지역의 디자인이 더불어 성장하는 NIPPON PROJECT
도쿄와 오사카에서 D&DEPARTMENT PROJECT를 오픈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저자는 일본 전체의 디자인 문화를 향상시키는 NIPPON PROJECT를 도모한다. 일본의 47개 행정구역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long life design 정신에 맞는 지방 상품을 발굴하고 이를 다른 지역으로 널리 알리는 NIPPON PROJECT는 2007년, 홋카이도의 삿포로를 시작으로 현재 일본 전역으로 확대 중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의 디자인 60VISION
2000년대 불어 닥친 복고 붐으로 일본의 많은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옛날의 상품을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고민 없이 과거 제품을 마구 만들어내는 기업의 태도를 개탄하며 나가오카 겐메이가 시작한 것이 60VISION이다. 60VISION은 1960년대 만들어진 일본 제품을 복각하는 프로젝트로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여전히 가치를 간직한 과거 물건을 되살려 그 생명을 이어나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1960년대는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튼튼하고 심플하며 기본에 충실한 제품을 생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시기다). 저자는 이 활동의 가치와 성과를 인정받아 2003년에 굿디자인상 가와사키 가즈오 심사위원장 특별상을 수상했다.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그만의 방식
저자가 진행한 프로젝트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일선의 디자이너 한 명이 오로지 직업적인 사명감 하나만으로 이런 다양한 작업들을 무모하리만치 대담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을 저자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삶의 태도, 곧 ‘자신의 방식’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을 차근차근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즐기고,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소중히 여겨 그 마음을 열심히 좇으며 사는 태도가 바로 ‘그만의 방식’인 것이다. ‘손익’과 ‘효율’에 예민하여, 무엇을 시작도 하기 전에 쉽게 마음을 접는 현대인들에게 ‘나가오카 겐메이의 방식’이 던지는 메시지는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