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학 논의의 오랜 침묵을 깨고 리얼리즘 문학의 현재성을 다룬 『자본주의 사회와 인간 욕망』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학제 간 연구의 전통이 깊지 않은 국내 학계에서 보기 드문 공동 연구의 결과로, 19세기 리얼리즘 문학의 고전들을 되짚으며 자본주의 시대 인간 욕망의 명암을 진단하고 있다.
19세기 리얼리즘 문학을 통해 들여다본 자본주의 시대의 만화경
책은 모두 22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사랑과 야망, 2부는 돈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욕망에 매몰된 소시민의 원형을 탐색한다. 3부에서는 엮은이 고영석이 독일 리얼리즘 문학의 정전(正典)인 슈토름, 켈러, 라베, 폰타네의 작품을 통해 리얼리즘의 현재적 독해를 시도한다. 그 밖에 각 저자들은 디킨스와 로런스, 발자크와 에밀 졸라,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까지 영미, 프랑스, 러시아 문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텍스트와 풍부한 인용문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꼼꼼히 재현해낸다.
1부는 개별 텍스트의 이해와 분석에 중점을 둔 열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일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잘리와 브렌헨, 아름다움도 구원하지 못한 엘렌과 나스타샤, 로런스의 단편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현실적 결혼관, 낭만적 사랑의 탈신화화를 이야기하는 폰타네의 작품세계, 권력싸움 속에 희생당하는 불행한 여성을 그려내는 헵벨의 드라마, 그리고 폰타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에 드러나는 신경증과 젠더정체성은 21세기의 여성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욕에 함몰되어 일생 동안 휴식을 갖지 못했던 발자크,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능성을 묻고 답하는 라베의 시적 사실주의, 주변 세계와의 끊임없는 마찰 속에 파멸하는 권력을 보여주는 하우케 하이엔, 자아를 찾으려는 개인과 사회주의 국가 이념 사이의 갈등 역시 오늘날 권력 담론의 순환적 재현이다.
2부에서는 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다섯 가지 층위에서 분석한다. 기호학으로 읽는 켈러의 「옷이 날개」, 관상학으로 읽는 근대 영국소설들,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 도박의 광증, 돈의 이미지 속에 드러나는 서구적 망탈리테의 원형, 끝없는 이야기의 범주에서 돈과 욕망의 관계를 풀어내는 작업 등을 통해 리얼리즘 문학의 파격적인 독법을 보여주고 있다.
3부에는 독일 리얼리즘 문학의 중요 작품들을 분석하고 리얼리즘의 대표적 장르인 산문 문학이 부상하는 과정을 밝힌 여섯 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아들의 일탈을 쿨파 파트리스, 즉 자신의 죄로 여기며 회한에 빠지는 아버지, 자아와 사회의 연결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생으로 일관된 하인리히의 삶, 인간적 탐욕의 각축장이자 끝없는 역사적 공간을 상징하는 오트펠트 평야, 폰타네의 소설에 나타난 여성 문제와 그의 정치적 이념을 통해 이들 작품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밝히고, 마지막으로 리얼리즘 문학을 가능케 했던 매체의 영향력 등을 살피며 오늘날 새로운 산문 문학에 대한 전망을 내놓는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돈과 사랑과 명예를 향한 집념,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배타적 이기주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와 참으로 섬뜩할 만큼 닮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리얼리즘 문학은 인간의 욕망과 한계라는 오랜 주제로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논의와 관심이 시들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리얼리즘 문학의 폐기처분을 의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인간 욕망’이라는 주제가 리얼리즘 문학의 시의성을 적절히 드러낼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 책은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별달리 주목받지 못했던 이 주제를 집중 조명하기 위해 독일 리얼리즘 문학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미, 러시아 문학작품까지 그 대상으로 삼아 서구 리얼리즘 문학작품 속의 돈, 사랑, 명예 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룬다. 문학사적 환경은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같은 시기에 등장한 서구 리얼리즘 문학을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함께 고찰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문화 분석에 응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책머리에」중에서
* 초판발행 | 2007년 10월 12일
* ISBN | 978-89-546-0376-8 03810
* 신국판 | 456쪽 | 16,000원
* 담당편집 | 유정민 (031-955-8864 coolhill@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