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현.대.음.악.이다!
클래식 음악의 종착역에서 새로운 음악 대륙으로 떠나는 40인의 여정
왜 클래식 음악은 때로 ‘바흐부터 쇼스타코비치’ 사이에서 갇혀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우리 시대에 태어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스트라빈스키부터 진은숙까지, 20세기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곡가 가운데 40명을 소개한다.
“20세기 음악이라는 화두를 꺼낼 때마 ∙아∙트∙북∙스∙∙신∙간∙다 ‘왜 지금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작곡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인터넷과 컴퓨터, 휴대전화와 자동차로부터 벗어난 전원생활을 동경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작곡가들의 심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_「책머리에」에서
현대음악이 우리 시대를 살아온 작곡가들의 치열한 고뇌의 결과이며 그들의 대답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한 번쯤 그 대답에 귀를 기울여줄 의무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9세기까지의 클래식 음악만으로도 왠지 거리감을 느끼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불쑥 우리 시대의 음악을 들어보라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겨우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초심자는 놀라 도망가버리기 십상이고, 어느 정도 애호가가 된 사람들은 듣던 음악만 계속 듣는 게 낫다는 편견의 벽을 더 높이 쌓게 될 테니 말이다.
『오늘의 클래식』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지은이이지만 현대음악이 부담스러운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2007년 여름, 뮌헨 오페라 축제에 취재차 방문했던 지은이는 세상에 발표된 적이 없던 신작 오페라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기사를 써야 하는, 신선하고도 당혹스런 경험을 한다. 마감 시간에 쫓겨서 기사를 보낸 뒤, 새로운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오늘의 클래식』은 지은이가 그 마음의 짐을 어떻게 내려놓아 할지 고민한 끝에 내놓은 대답이다. 현대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에 대한 좌표를 스스로 세운 후, 거기에 이르는 길을 독자에게 친절히 안내하는 것이다.
현대음악 역시 다른 모든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20세기에 들어서서 격심한 변화를 겪었고, 그것은 가히 혁명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기에 아무리 잘 포장해서 이야기하더라도 ‘쉽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곡가들은 멜로디와 화성이라는 안정적이고 굳건한 구조를 버리고 조성을 허물고 익숙한 리듬을 파괴했다. 낯섦과 당황이 편안한 음악 감상을 대신하게 되었다. 스트라빈스키가 처음 <봄의 제전>을 초연했을 때 관객들은 “주먹이든 지팡이든,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쥐고 옆 사람의 머리 위로 흔들”었다는데, 오늘날의 관객이라면 차마 그렇게 하지야 못할 테지만 부러 익숙한 아름다움과 조화를 버리고 새로운 음악을 듣는 모험을 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음악이라는 신대륙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지은이가 택한 방식은 현대음악의 작곡가들의 음악과 함께한 일생을 소개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일생이 현대음악을 매개 삼아 엮이고 흩어지며 각 작곡가들의 예술적 특성과 의미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스트라빈스키부터 한국의 진은숙까지, 총 40명의 작곡가들의 성장과 작품세계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지은이는 이런 구성에 대해 “말러와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즈음에서 멈춰 있는 서양 고전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 스트라빈스키에서 출발한다면, 지금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종점은 진은숙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현대음악 작곡가의 궤적을 뒤쫓는 작업 자체가 지금 여기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책에 소개된 40명의 작곡가는 공연장에서 상대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가라는 기준에서 선정되었다. 드뷔시나 엘가 등이 포함되는 등, 다소 보수적이거나 대중적인 구성으로 보일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현대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여기 40명의 작곡가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더 많은 작곡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바탕이 마련될 터이다.
>>독서 경험을 풍성하게 해주는 팁
책은 모두 14장으로 구성돼 있다. 각 장은 4장 ‘망명객’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역적인 구분에 따라 나뉘어 있으며, 1장에서 14장까지 이어질수록 느슨하게 과거에서 현재에 가까워진다. 물론 시작은 스트라빈스키가 포함된 러시아이며, 마지막은 진은숙이 포함된 아시아이다. 지은이는 현대음악사를 살피다 보니 20세기 음악의 역사는 20세기 정치사나 문화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구대륙 유럽이 두 차례 전쟁으로 힘을 잃고, 신대륙 미국이 동력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 모습이나,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이 힘을 잃고 아시아와 남미 등 다양한 지역이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까지, 아닌 게 아니라 현대음악사와 현대사가 나란히 펼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덤으로 각 글의 끝에는 해당 작곡가의 예술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추천 음반 및 DVD가 소개돼 있어 현대음악이라는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으려는 독자들에게 가이드를 제시한다. 지은이가 직접 듣고 본 후에 추천한 음반과 DVD로 더욱 풍성한 독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각 장의 내용
> 러시아
1905년 피의 일요일부터 1917년 10월 혁명까지, 20세기를 통째로 흔들어버린 사건이 러시아에서 일어났고, 음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지은이는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리고 ‘돌아온 자’라는 은유로 러시아 편에서 소개하는 세 작곡가의 음악적 성향과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각자가 취한 입장을 요약한다.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스트라빈스키는 리듬 혁명을 일으켜 음악의 향방을 영원히 돌려놓았고, 소련에 남아 ‘체제를 지킨 작곡가’라고 불리는 프로코피예프는 고전 양식의 근간을 지키면서도 그 안에서 가능성을 극한까지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돌아온 자’ 프로코피예프는 혁명 직후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1936년 돌연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음악적으로도 고전적 형식을 지키려 애썼지만 낭만주의적 이상은 철저히 지워나갔다.
> 오스트리아
어쩌면 현대음악의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쇤베르크는 그의 제자들인 베르크, 베베른과 함께 현대음악의 삼위일체라 불리며 마지막 남아 있던 고전음악의 구조인 조성마저 허물어버리는 실험을 감행했다. 쇤베르크는 “모든 작곡가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반음계와 불협화음을 사용하는 단계를 지나 아예 조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조’를 택했고,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12개의 음에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12음 기법’을 창안해냈다. 제자인 베르크와 베베른은 스승이 연 길을 따르면서도 각자의 독자적인 음악성을 획득해냈다. 베르크는 12음 기법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풍부한 화성을 결합해 서정성을 살려냈고, 베베른은 마치 법규처럼 스승의 ‘규칙’을 지키면서 완전무결함과 냉철함을 추구했다.
> 미국(3장, 9장, 11장)
미국은 역사는 짧았으되 세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했다. 분야를 막론하고, 미국은 처음에는 유럽의 거장들을 끌어들였고 나중에는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한 드보르자크부터 뉴욕으로 향했던 말러까지, 20세기 초반까지 수입국 신세를 면치 못했던 미국이었지만 코플런드, 거슈윈, 아이브스는 ‘미국 음악’의 초석을 다졌고, 20세기 후반에는 무게중심이 미국, 특히 뉴욕으로 옮겨갔다. 이런 경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전후 자본주의 소비문명과 대중문화의 역동성 속에서 아방가르드를 자처한 존 케이지는 유럽 음악계를 뒤흔들어놓았고, 필립 글래스와 스티브 라이시는 미니멀리즘을 주창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현대음악은 재즈와 뮤지컬 같은 미국 음악의 자산을 포용한 번스타인, 유럽적 모더니즘의 대의에 충실한 카터, 선배들과 차별화를 꾀한 미니멀리즘을 선보인 애덤스에까지 그 외양과 폭을 넓혀가고 있다.
> 망명객
나치의 광풍이 휘몰아친 시기에 고국을 떠나야만 했던 세 명의 작곡가 힌데미트, 바일, 아이슬러가 소개된다. 유대인 아내 때문에 이들은 이념부터 인종 문제까지 망명 사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의 정착지는 결국 신대륙 미국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을 겪었던 이 작곡가들은 각각 아마추어 연주자들을 위한 실용음악을 주장하거나(힌데미트) 전통적 오페라를 비판하고 새로운 음악극 양식을 개척하거나(바일) 음악으로 혁명을 꿈꾸는(아이슬러) 등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띠었다.
> 프랑스
러시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현대음악이 파격적이었다면, 프랑스에서는 미묘하고 은근한 방식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드뷔시와 메시앙, 불레즈까지 프랑스 작곡가들은 아시아 음악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유럽 음악의 지평을 넓혔다. 드뷔시는 인도네시아 음악에 영향받아 장.단조에 바탕을 둔 조성에서 빠져나왔고, 20세기 중반 현대음악의 산실 파리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급진적 음악세계를 펼친 메시앙은 리듬과 강세, 음색까지 음악 전반에 걸쳐 엄격한 규칙에 입각해 작곡하는 총렬주의로 나아갔다. 메시앙의 제자 불레즈는 엄격한 총렬주의에 우연성을 더해 지나치게 이성적인 음악에 숨통을 틔웠다.
> 영국
20세기 영국은 대중음악에서는 세계의 중심이었지만 클래식 음악에서만큼은 17세기 헨리 퍼셀 이래 대대로 수입국의 처지를 면치 못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영국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가톨릭교도이자 상인 계층 출신인 엘가, 불가지론자였던 본윌리엄스, 동성애자인 브리튼처럼 중심보다는 주변적 가치에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국민 작곡가’라 추앙되는 엘가의 음악은 사실 혁신적이지 않다. 하지만 전통에 대한 존중과 계승은 엘가의 음악적 자산이었고, 그렇게 영국 음악은 다시 활기를 찾아 후대의 본윌리엄스나 브리튼 같은 작곡가들이 현대로 달려 나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 독일 다름슈타트
구질서가 붕괴되어버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대들에겐 거칠 것이라곤 없었다. 슈토크하우젠, 노노 같은 급진적인 작곡가들은 미군정이 지원한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다.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는 자유를 상징하는 새로운 음악이 있었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국제주의 정신이 싹텄으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음악언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거기 모여든 젊은 작곡가들 중에는 한국에서 찾아온 윤이상도 있었다.
> 동유럽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까지 유럽 음악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나라들이 모두 강대국이었다는 점은 음악과 정치적 질서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유럽은 상대적으로 공란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공백 사이에서 헝가리의 버르토크, 체코의 야나체크는 자국의 풍부한 민족음악 유산에 주목하면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역시 헝가리 출신의 리게티는 버르토크가 다져놓은 탄탄한 토대 위에서 동시대 현대음악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한층 급진화되었다.
> 폴란드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 폴란드는 따로 떼어놓고 다룰 가치가 있다. 독일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 사이의 십자로에 위치한 덕에 대대로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그런 지리적 입지는 한편으로는 음악적 자양분이 풍성해지는 바탕이 되었다. 폴란드는 한동안 소련의 ‘철의 장막’ 아래 들어가 있었지만, 시마노프스키와 루토스와프스키, 펜데레츠키 같은 작곡가들을 배출하며 동유럽 현대음악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 전후 독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집권과 유대인 학살, 전쟁의 포화를 겪은 독일 음악계는 과거 청산과 질서 재건이라는 이중 과제에 맞닥뜨렸다. 나치 집권 기간 동안 침묵으로서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하르트만은 전후 재건의 현장에 발 벗고 뛰어들었고, 전쟁 세대의 가치를 부정하고자 했던 헨체는 체 게바라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메두사 호의 뗏목>을 작곡하는 등 1968년 학생운동의 대의에 과감하게 투신했다.
> 남미
유럽에게 정복 대상일 뿐이었던 남미는 탱고와 쇼루 같은 전통음악의 가치에 눈뜨면서 거꾸로 미국과 유럽을 매혹시켰다. 피아졸라는 프랑스 파리에서 숱한 음악가를 길러낸 교육자이자 지휘자인 나디아 불랑제를 만나 자신의 진정한 갈 길이 전통적인 클래식보다는 탱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거리의 음악 탱고를 현대화해 무대 위로 불러올렸다. 브라질의 국민음악가 빌라로부스는 대중음악 양식 ‘쇼루’를 받아들였고 브라진 전통 민요를 채집해 자신의 음악적 자신으로 삼았다. 이들을 바탕 삼아 남미는 21세기 월드뮤직의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 아시아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무력에 의해 개국을 강요당했지만, 음악에서는 유럽 음악의 문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교유의 문화적 자산이 녹아든 음악을 역수출했다. 이 장에서는 한.중.일의 작곡가들이 각각 1명씩 소개된다. 영화 「와호장룡」의 음악으로 유명한 중국의 탄둔은 동양적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현대음악을 발표하고 있으며, 전후 독학으로 음악을 익혀나갔던 일본의 다케미쓰 도루는 서양음악의 급진성과 동양음악의 전통적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음악을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작곡가는 바로 한국의 진은숙이다. 그녀는 한국 현대음악에서 윤이상, 강석희, 진은숙으로 이어지는 급진적 모더니즘 계보의 마지막 자리에 위치한다. 스승 리게티의 유지를 이어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발표한 그녀는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로서 현대음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동시에 거침없이 대작을 쏟아내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