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위예술가 김정환, 인류의 역사를 무대 위에 올리다
“역사는 인간이 빚어낸 가장 위대한 예술이다!”
예술의, 예술에 의한, 예술을 위한 세계사
시인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이자 번역가, 문학 평론가이자 클래식 평론가인 김정환이 음악과 예술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새롭게 분석하고 서술한 묵직한 역사서를 내놓았다. 원고지 6천 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서 음악, 무용, 미술, 문학, 연극 등 예술이 추동하는 세계의 역사를 심원한 문제의식으로 담아냈다.
지난해 등단 30년을 맞으며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작가 김정환은 등단 이후 거의 100권에 달하는 저작들을 발표해왔다. 평균 1년에 3~4권 꼴. 웬만큼 꾸준하다는 젊은 작가들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경이로운 필력은 물론이거니와, 문학과 음악, 그림과 언어, 국사와 세계사를 넘나드는 저술 대상과 방식은 경계를 짓기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 책은 남다르다. 이 책은 저자가 지금까지 관심과 애정을 가져온 모든 분야의 예술과 역사, 인류의 문화를 총망라하고 응집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역사가 끌어안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 끌어안는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눈으로 본 예술사’가 아니라 ‘예술의 눈으로 본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세계사’라 할 수 있다.
때론 스스로 예술가이자 창작자로, 또 때론 열렬한 예술 애호가이자 냉철한 평론가로 몸을 바꾸며 오랜 시간 인류의 예술과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음미해온 작가 김정환. 그렇다면 그가 예술의 처음이자 끝이며, 예술을 포괄하면서 또한 그 자신이 예술의 한 범주라 정의한 세계사의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시인의 붓끝으로 서술한 한 편의 장구한 서사시 같은 역사
역사, 시와 음악이 되어 흐르다!
이 책에서 예술은 더 이상 역사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를 예술화하며, 나아가 역사 자체의 위대한 예술성을 드러내는 데 이른다. 저자는 예술을 역사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을 통해 역사 또한 비좁은 연대기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어쩌면 학문적 시선과 관점으로 서술한 객관적인 역사서에 길들여진 독자는 김정환의 세계사가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이 책의 목적은 예술과 관련한 정보의 제공이나 예술사 지식의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장구한 시간 동안 인간이 어떻게 예술과 몸을 포개고 살을 섞어왔는지, 그 에로틱한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져왔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음악과 무용과 미술과 문학과 연극 등의 예술이 어떻게 역사를 이해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연극은, 문학은, 미술은, 무용은, 음악은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가? 그런 질문과, 그 해답은 중요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예술 각 장르가 왜 태어났으며 왜 아직도 우리 주변에 있으며, 왜 앞으로도 존재할 것인가,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그 해답이다. 역사가 예술을 이해하지 않고 예술이 오히려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이해해야 하는 면도 있다는 점이다. 역사야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는 것을, 예술이 예술로써 밝힐 수도 있다는, 밝혀야 하는 면도 있다는 점이다. (22쪽)
여기서 그는 예술가, 음악가, 유명인 들의 인명과 작품 일람 등 숱한 고유명사를 나열하며 예술을 대상화하기를 피한다. 다만 역사 속에서 음악과 예술의 시원을 탐측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가운데 서 가장 음악적이고 예술적인 순간들을 날카롭게 포착해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음악과 예술을 이미 체화한 시인만이 서술할 수 있는 이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 같은 세계사 속에서 선후관계나 권력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와 순간의 개별성과 단독성이다.
이 책에서 역사를 분절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서술의 가치를 가진 역사의 다양한 장면들이다. 그 장면은 하나의 문명일 수도 있고 한 인물일 수도 있다. 물론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한 편의 오페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조각조각의 존재들이 모여 거대한 모자이크와도 같은 역사를 이루어간다. 또한 이 책의 마디마디를 이루는 장면들은 서로 엇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은 ‘잉카 문명’의 역사와 맞먹는 존재이며, 단테의 『신곡』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필적하는 사건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해석과 서술이야말로 이 책이 다른 역사서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책에서 역사는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전쟁터가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예술의 풍경화이다. 책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왜 하필 ‘음악의’ 세계사인가? 음악은 물처럼 흐르고 역사는 음악처럼 흐른다. 그러므로 ‘음악의’ 세계사는 말 그대로 ‘음악의’ 세계사이기도 하지만 ‘음악 같은’ ‘음악처럼 흐르는’ 세계사이기도 하다. 즉 음악은 예술을 달리 부르는 상징적인 이름이며,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스스로가 곧 예술인 역사, 인간의 가장 위대한 예술품으로서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역사를 반영하면서 예술은 어디까지 왔는가? 예술로 집약되고 열리면서 현실은 어디까지 왔는가? ‘음악의 세계’사를 살피면 인간 역사와 우리 마음에 ‘아름다운 시간의 형식’을 부여할 수 있을까? 다른 예술장르는? 이 책은 그 무엇의 과거에서 현재까지 경위를 주제 삼은 ‘교과서풍’ 역사책은 아니다. 무엇보다 예술, 특히 음악이 흐르듯 오늘날 역사가 흐르고, 오늘날 흐르는 역사가 가장 위대한 예술이기를 바라는 모종의, 음미다. (23쪽)
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처음에는 수없이 많은 접속사와 쉼표(,)의 돌부리에 시도 때도 없이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호흡 곤란의 진정제일 때가 많지만, 이 책에서 문장과 문장을 잇는 접속사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쉼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유의 신중한 숨 고르기처럼 읽힌다. 역사를 마주하는 저자의 시선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사유의 무늬는 영락없는 시인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술(가)의 시선과 사유이기도 하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역사서에서 만나는 일은 흔치 않은 체험일 것이다.
모든 음악은 우주의 배꼽을 품고 있으며, 참혹조차 명징하게 만들고, 인간의 마음속을 가장 아름다운 우주의 시간과 공간으로 펼쳐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음악은 죽음이 액화한 시간이고, 아름다움이야말로 죽음의 배꼽이다. (107쪽)
귀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음악의 귀는 들리는 것 너머를 듣는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고, 진리의 아름다움이며, 동시에, 제 마음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귀는 소리를 들을 뿐만이 아니다. 귀는 모든 것을 소리로 이해한(듣는)다. 음악은 음표와 음표를 모두며, 스스로 더 우월한 존재를 향해 흐른다. 때론 흐느낌으로 때론 기쁨의 급류로. 그러나 동시에, 음악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아니 들을 수 있는, 아니 소리로 이해할 수 있는 죽음의 아름다운 육체다. 때론 웃음으로, 때론 비명소리로, 그리고 진혼곡으로. 그러므로 음악은 흐른다. 음악이 흐른다. (232쪽)
이 책은 서술의 관점과 형식 면에서 분명 낯선 세계사이다. 1천 쪽이 넘는 분량 또한 선뜻 펼쳐 보기에는 만만찮은 장벽이다. 그러나 이 낯설고 두꺼운 음악의 세계사는 역사를 읽는 행위가 얼마나 예술적인 일인지 새롭게 일깨워준다. 이 책은 역사를 일러 인간이 빚어낸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역사를 읽는 것은, 또 언제 어느 때고 늘 엄혹하고 고통스러웠던 현실을 오롯이 살아내고 관찰하는 일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에 기꺼이 동참하는 일인 셈이다.
혹시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왔다면, 역사를 과거 속에 갇힌 정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공부해왔기’ 때문은 아닐까. 전방위예술가 김정환이 서술한 이 개성 넘치는 세계사의 책장을 넘기다보면, 인류의 역사 속에, 또 오늘날 우리 주위 곳곳에서 힘차게 약동하는 음악과 예술의 뿌리를 직접 발견하고 온몸으로 음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