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
두 바퀴로 1600Km, 30일 동안 만난 길 위의 건축들
건축가로서 회사에 다닌 지 10년차인 지은이에게 일상을 탈출해 보고자 하는 욕망은 6년 전 자전거로 미국 대륙을 횡단한 내용을 담은 한 권의 책을 읽은 후 싹트기 시작했다. 맞벌이 아내와 여섯 살짜리 딸이 있고, 직장에서는 중간관리자로서 충실히 생활하고 있는, 평균적인 한국인이 걸어온 길을 착실히 밟아 온 마흔 살의 한 남자. 스스로 ‘평범함의 유전자’가 핏속에 흐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할 만큼 착실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10년이지만, 누구나 그렇듯 ‘아니야, 이렇게 끝날 순 없어’ 하는 마음속 작은 외침은 점점 커져만 갔다.
평범함도 타고 나는 것일까. 가끔 내 몸 속에 평범함이라는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나이 마흔에 돌이켜보니 내 정신까지 평범함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밤마다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었고 깨어나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적어보았다. 자전거 여행은 이것들 중 하나였다. _「프롤로그」에서
지은이는 자전거로 일본을 일주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냥 일주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일본의 건축물을 보고 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주위에서 ‘또 건축이냐’며 핀잔도 들었지만 건축에 반해 진로도 바꾼 천생 건축가에게 일상을 탈출한다 해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건축만한 테마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전거’를 타고 ‘일본’의 ‘건축물’을 보고 오는 ‘일본 자전거 건축 여행’이 시작된다.
30일 동안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1,600킬로미터를 달린 지은이는 여행 중에 일어난 자잘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길 위에서 만난 건축물들을 직접 그린 스케치를 곁들여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야말로 ‘건축 읽어주는 남자’다. 건물과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대해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왜 좋아 보이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떠올리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지은이와 함께 건축에 대해 질문하고 이해하게 된다.
자전거로 하는 여행이기에 편안하고 호화로운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식사는 편의점에서 때우기 일쑤고 잠도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자거나 그마저 찾기 어려울 때는 주민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냥 텐트를 펼칠 만한 곳을 찾아 노숙도 불사한다. 해변에서 텐트 치고 잠을 청하다 극성스런 모기에게 밤새 시달리고, 동네 청소년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며, 바람과 맞서 싸우며 라이딩을 하다 바로 옆을 쌩 하니 지나가는 트럭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작은 추돌 사고로 동네 자전거포에서 자전거를 수리하고 핸드폰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는 등 아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생스러운 일들이 이어지지만, 지은이에게 길 위에서 만나는 건축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편안한 말투로 여행의 에피소드와 자연스레 섞여 들어가 건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예를 들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항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본 컨테이너를 보고 컨테이너 건축에 대해 설명한다든지, 여행 중에 만난 노숙자를 보면서 노숙자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건축을 이야기하는 식이다. 또 일본의 유명 건축가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라무센 온천’ 건축을 소개한 다음 일본의 작은 동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목욕탕의 구조를 보여주기도 한다.
자연스레 현대 건축의 쟁점이나 용어들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도 반갑다. 지은이는 마쓰야마 성의 천수각을 통해 도시의 안내자이자 상징물로서 ‘랜드마크’의 개념을 설명하고, 도시의 경관을 유지하는 장치로서 ‘전략적 뷰’를 소개한다. 또 교토의 다이도쿠지를 구경하며 일본의 전통 정원 개념을 이해하게 해준다.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설계하기도 한 I. M. 페이의 미호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건축가가 마련한 몇 가지 장치를 통해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시퀀스 건축의 개념을 이해하고, 후지 산을 지나치면서 멀리 있는 풍경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여 완성하는 ‘차경(借景)’ 개념을 소개하는 식이다.
이 책은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 탈출기이자 성장기이기도 하다. 마흔 살에 성장이라니 웬 말이냐 할지도 모르지만, 지은이의 말대로 인생은 끊임없는 성장의 과정이지 않은가. 한 달 동안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이제까지 전혀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며 보냈다고 해서 대단한 답이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여행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은 그대로 지속될 터이고 여행의 약발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다시 막연하고 답답한 질문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두 바퀴로 달리면서 얻은 “삶은 성장한다는 것,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무슨 일을 하든지 변하지 않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만큼은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갈 힘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가 30일간 여행하면서 만난 주요 건축물들은 다음과 같다.
- 에밀리오 암바스의 어크로스 후쿠오카: 지은이가 일본에서 처음 만나는 이 건물은 도심에 우뚝 솟은 초록의 제단이다. 땅값 비싼 도심에 밀림을 연상시키는 초록의 산처럼 서 있는 이 건물은 ‘효율’로 보면 아주 낮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도시의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원에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 서 있다. 한쪽에서 보면 평범한 건물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이 건물은 숲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건물은 회색 콘크리트 도시에 초록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 안도 다다오의 구마모토 현립 장식고분관: 규슈에 있는 장식고분의 70퍼센트가 모여 있는 곳에 세워진 박물관으로, 실외 전시장에서는 하늘과 콘크리트 벽과 자갈이라는 단순한 요소를 통해 시간이 멈추고,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곳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관람객은 상상의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
-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라무네 온센: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줄무늬 셔츠에 삼각 모자를 쓴 건물이다. 모자 위에는 한 가닥 머리카락처럼 나무까지 달려 있다.
- 마쓰야마 성: 도시의 강력한 상징으로서 여행자의 길 잃을 권리마저 빼앗는 랜드마크이다. 마쓰야마 성 같은 랜드마크는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지만 마치 건물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마저 전한다.
- 안도 다다오의 지중 미술관: 예술의 섬 나오시마에 위치한 건축물로 공간을 전시하는 땅속 미술관이다. 나오시마의 자연 풍광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건축가의 의도로 인해 땅속에 묻혀 있어 지상에서는 네모 세모 모양의 천창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대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지만 이 미술관의 최고 전시물은 건물이 만들어내는 공간 그 자체이다.
- I. M. 페이의 미호 미술관: 산속 깊숙이 들어앉은 미술관으로 동굴, 다리, 구부러진 길 등을 의도적으로 배치해 관객을 「도화원기」의 주인공처럼 만든다. 사람들이 미술관까지 걸어가면서 경험하는 공간을 「도화원기」처럼 연출한 시퀀스 건축이다.
- SANNA의 21세기 미술관: 납작하고 둥그런 쿠키 통에 상자들이 들어 있는 듯한 형태의 미술관으로 예술 미로 속의 자유로운 방랑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 공간 안에서 관람객은 자유로이 공간과 예술품을 만끽할 수 있다.
- 이토 도요의 마쓰모토 시민예술관: 외벽은 불규칙한 형태의 창이 점처럼 찍혀 있어 안과 밖이 소통하는 느낌을 준다. 거리의 길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고립된 내부를 밖으로 확장하고 바깥은 안으로 불러들인다.
-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다카스키안: 이것을 건축물이라 해야 할까? 나무 위에 새 둥지 같이 생긴 집이 올라앉은 이 ‘건물’은 차를 마시는 다실이다.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도록 세심히 다듬은 재료로 만들어진 다카스키안은 인공적이면서 동시에 자연스럽다.
- 폴라 미술관: 건물을 투명하게 만들어 빛과 바람 소리를 내부까지 전달한다. 인상주의 작품을 비롯한 훌륭한 컬렉션도 인상적이지만, 하코네의 아름다운 자연을 미술관의 중요 요소로 끌어들였다.
- 구마 겐고의 안도 히로시게 미술관: 안도 히로시게의 우키요에 판화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된 미술관으로, 비바람의 빗살이 그대로 지붕의 모티프가 되었다. 길은 그림을 만들었고, 그림은 집을 만들었다.
- 야마모토 리켄의 요코수카 미술관: 건물 외벽이 유리로 돼 있지만 미호 미술관, 폴라 미술관과는 달리 바깥 경관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바닷물의 소금기로 인한 금속 재질의 부식을 막기 위해 이중외피 구조로 옷을 두 겹 껴입은 건물인 것이다. 벽체나 지붕의 의무에서 자유로운 안쪽의 박스 사방에는 치즈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 FOA의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 데크 공원으로 이용되는 건물 지붕이 물결치는 형태이다. 동선을 공간으로 만든 것인데, 지붕에서 실내로, 실내에서 다시 외부로, 오르락내리락, 이리저리 사람들의 움직임을 수용하는 자연스런 경사로를 설치했다. 동선의 건축, 지구 표피의 연장으로서의 건축, 그것을 수용하는 혁신적인 구조를 목표로 성장하고 움직여 만들어진 건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