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허구를 넘어 힘 있는 환상을 선사하는 속 깊은 판타지 동화
『쥐를 잡자』『나는 누구의 아바타일까』등 안정적인 문학적 기반 위 날카로운 성찰을 담은 인상적인 작품들을 선보여 온 임태희 작가의 신작 동화 『이야기 섬의 비밀』이 출간되었다. 『이야기 섬의 비밀』은 다소 색다르게 한국에 사는 열다섯 살 방글라데시 소녀 아미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아미가 이주 노동자 단속반에 쫓겨 달아나다 인천 앞바다에 빠지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치 뉴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현실적인 색채로 긴박하게 출발한 이 동화는 아미가 ‘수나롭’이라는 환상의 섬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판타지 서사로 돌입하고 나서도 내내 현실에 잇대고 있는 예리한 감각을 잃지 않는다.
기상천외한 생명체들이 있는가 하면, 노예 계급과 지배 계급으로 나뉘어 위험하고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잔뜩 벌어지는 이 외딴 섬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흥미를 자아낸다. 그리고 아미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벌이는 다양한 사건들은 속도감 있게 진행되며 독자들을 모험의 세계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판타지 특유의 상상력과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실제 현실에서 비롯된 문제의식과 성찰을 매끄럽게 담아낸 작가의 노련함이 돋보인다. 『이야기 섬의 비밀』은 일회적 소비에 그치기 일쑤인 단순한 ‘허구’를 넘어, 현실을 바꿀 만한 가능성을 지닌 ‘힘 있는 환상’을 선사하는 속 깊은 판타지 동화를 쓰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이 숨 쉬는 작품이다.
처음 보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섬, 수나롭
이야기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소녀 아미. 아미는 이주 노동자 단속반에 쫓기다 바다에 빠지고 ‘수나롭’이라는 이름의 외딴 섬에서 눈을 뜬다. 텅 빈 듯한 이 섬에서 아미는 반짝이는 돌이 피부에 박힌 특이한 모습의 ‘하눌’과 ‘코망’이라는 꼬마들을 만난다. 아미는 그들을 따라 지하로 들어가고, 거대한 지하 채석장에서 ‘놉족’이라 불리는 수많은 꼬마들이 채찍질당하며 ‘나로’라는 광물을 캐는 광경을 목격한다. 나로는 놉족이 죽어 땅에 묻히면 오랜 시간이 지나 보석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놉족이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짐승처럼 부려지는 모습은 아미에게 큰 충격을 준다. 하눌과 코망은 사실 놉족의 혁명을 준비하는 계획단으로 모종의 임무를 띠고 지상에 올라왔던 터였다. 아미는 수나롭 섬은 노예 계급인 놉족과 지배 계급인 앙바틈족으로 나뉘어 있으며, 앙바틈족 안에서도 계급이 나뉘어 옷 색깔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미는 지독한 낯섦 속에서도, 평생 느껴왔던 차별의 익숙한 냄새를 조금씩 감지하며 놉족의 혁명 계획에 점점 깊숙이 발을 들인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거대한 진실
그런 한편으로, 아미는 수나롭에 온 첫날 환상 속에서 만난 여인이 내준 세 가지 숙제를 풀어 인천으로 돌아가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고난 속에서 마침내 세 가지 명제를 모두 달성한 아미는, 마지막으로 자신과 함께 바다에 쓸려왔던 궤짝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 궤짝 안에서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나로를 발견하는데, 그 나로에는 수나롭의 거대한 역사와 비밀이 담겨져 있었다. 수나롭의 질서를 한순간에 전복시킬 수 있는 그 위험한 진실 앞에서 아미는 충격에 휩싸인다. 아미는 수나롭의 최고 계급인 하얀 계급의 학예관에게 청혼을 받은 상태였다. 하루빨리 엄마가 있는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바심, 학예관과 결혼하여 이곳에서라도 차별받지 않고 살고 싶다는 마음, 놉족의 혁명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죄책감이 뒤섞여 아미는 깊은 고민에 빠지는데…….
큰 스케일 안 곳곳에 배치해 둔 깊이 있는 질문들
『이야기 섬의 비밀』은 끊임없이 ‘바깥’과 ‘이방인’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내부’의 어두움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이득이 과연 진정한 부(富)인지, 나로를 독점하고 하위 계급을 통치하기 위해 무덤과도 같은 지하에 들어가 사는 삶이 과연 진정한 삶인지 생각해 보게끔 이끈다. 그 외에도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나 다름없는 나로를 계속해서 상납해야만 하는 놉족의 구조적 상황 등 동화가 쉬이 다루기엔 결코 만만치 않은 거대한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무엇보다 아미가 한국에서도, 수나롭에서도 홀대받고 외면받는 외부인이자 소수자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바깥’에서 온 존재가 점점 ‘내부’로 들어가 내부의 은폐된 모순을 더 예민하게 볼 수 있게 한 작가의 설정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아미는 눈을 가린 안온함보다 모험적이어도 다른 이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자유를, 익숙한 두려움 대신 낯선 희망을 택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요, 어차피 내 세계도 아닌데 어떻게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 있잖아요. 있으면서 없는 사람처럼 사는 건 이제 싫어요. 이제부턴 누가 내 세상을 구기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할 거예요. 저도 이 이야기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_본문 중에서
외부인의 상상력으로 피워 낸 무지갯빛 나라
인천의 가구 공장에서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가구를 깎는 동안 아미를 지켜준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짓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미는 놉족 혁명이 정점에 이르는 밤에, 자신이 지어낸 어리석은 거인 우화를 모든 수나롭인들에게 들려주며 섬의 운명을 뒤바꾸고자 시도한다. 자신의 이야기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해 오던 아미가 마지막 순간 큰 용기를 낸 것이다. 그리고 비루한 현실에서 직조해 낸 이야기가 지닌 힘을, 더 근본적으로는 그 이야기를 짓는 자신 내면의 힘을 확인한다. 그것은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변화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미 스스로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해 낼 수 있는 여유와 이상을 실행할 용기를 불어넣는 이야기가 지금 꼭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에 의해 그토록 견고하게만 보였던 악습이 깨지고 기어코 세상이 변한다. 규격화되고 단일화된 사회에 새로운 바람이 되어 준다. 이방인은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작품
『이야기 섬의 비밀』은 이처럼 아미와 친구들의 우정과 연대, 놉족의 혁명 과정을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리며, 다양한 존재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작가에 의해 철저히 가공된 낯선 세계의 모험담이지만 한국에 사는 방글라데시 소녀 아미의 시선으로 그림으로써 실제 우리 사회에 숨어 있는 계급과 차별, 다문화의 공존에 대해서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다. 홍정선 화가의 자유롭고 강렬한 그림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책의 흡입력을 높인다. 두 작가가 오랜 고민과 성찰 끝에 빚어낸 이 풍성한 식탁을 즐기는 동안 어린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