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최대의 번화가이자 이 도시의 밤을 대표하는 스스키노 거리. 높다란 빌딩 숲 사이로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골목들에 사천 개가 넘는 음식점과 술집이 빼곡히 있고, 수많은 호객꾼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기 위해 아우성치는 이곳에 마치 붙박이처럼 거리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사나이가 있다. 그는 바로 이 거리를 밤낮으로 바삐 뛰어다니는 탐정 ‘나’다.
탄생 20주년, 열두 편의 작품으로 삿포로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명물로 자리 잡은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의 백미 『사라진 소년』이 출간됐다. 『사라진 소년』은 팬들이 꼽는 이 시리즈의 최고작으로, 탄탄한 구성과 경쾌한 문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반전,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변주까지, 작가의 능숙한 필력과 재치가 돋보이는 신감각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도 탐정은 여전히 돈과 실적보다 인정과 정의감에 이끌려 차가운 거리에서 온몸을 내던지며 악에 맞서 싸운다. 사건은 한층 더 어둡고 잔혹해졌지만, 탐정의 냉소적 태도 뒤로 흘러나오는 촌철살인의 유머는 이전보다 더 강력해져 ‘유머 하드보일드’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쓴맛 나는 인생을 달콤한 한 잔 술로 달래는
안티히어로 탐정 ‘나’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투박하고 냉소적이지만 묘한 매력과 남다른 유머감각을 지닌 주인공 ‘나’는 삿포로 스스키노에 사무실도 없는 심부름센터를 차려놓고 단골 바의 성냥갑에 전화번호와 계좌번호를 적어 명함 대신 건네는, 한없이 ‘탐정’에 가까운 인물이다. 일이 없을 땐 도박으로 용돈을 벌고, 친구들과 대마를 재배해 팔기도 하며, 알코올중독에 가까울 정도의 폭음에 심한 주사까지 일삼는,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실격 사유가 한두 가지가 아닌 이른바 안티히어로다. 그에게는 셜록 홈스 같은 명석한 두뇌는 없지만, 일단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한량 같던 평소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고 책임감과 정의감으로 뭉친 아드레날린을 최대치로 뽑아 올리며 죽을 각오로 앞뒤 재지 않고 사건에 투신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가 단골 바 ‘켈러 오하타’에서 평소처럼 초저녁부터 술을 홀짝거리고 있는데, 바의 문이 열리면서 청초한 미인이 들어온다. (미인에 대한 탐정의 끝없는 사랑과 숭배는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안다.) 미인은 머뭇거리지만 곧장 탐정에게 다가와 아는 척 인사한다. 탐정은 ‘나한테 반했나?’ 하고 잠시 밑도 끝도 없는 무리한 상상을 해보지만, 중학교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는 일전에 스스키노 뒷골목에서 탐정이 구해줬던 그 여자였다. 그날 탐정은 괴한들로부터 물씬 얻어터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여자를 희롱하던 불량배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대놓고 화풀이를 했었다. 그러고는 습관대로 ‘켈러’의 성냥갑을 건네며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하는 주옥같은 대사를 던졌었다. 그녀가 오늘 밤, 자기 반 학생이 스스키노의 어느 술집에서 불량배들에게 붙들려 있다며 구출해달라고 요청한다. 가라테 유단자인 친구와 함께 뒷골목의 음침한 술집으로 곧장 쳐들어간 탐정은 보기 좋게 불량배들을 제압해 소년을 구출함으로써 미인에 대한 충성을 당당하게 증명한다.
그러나 그 일이 잊힐 즈음, 여교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소년의 친구가 참혹한 사체로 유기됐고, 소년은 행방불명됐다는 비보를 전한다. 영화광인 소년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단번에 의기투합했던 탐정은 호감을 느꼈던 소년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즉시 사건 조사에 착수한다. 불행한 가정환경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겁게 살아가려 노력했던 강단 있는 소년을 살인범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위해, 탐정은 또다시 어두운 스스키노 거리를 침식도 잊고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기 시작한다!
"누군가 날 괴롭게 만들었어. 흔들고 있어. 여기서 포기하면 난 평생 고개도 못 들고 살아갈 거야."
그날 밤 소년들이 본 어른들의 추악한 진실
“쇼이치, 살아 있냐? 제발 살아만 있어라”
압도적인 추리력은 없지만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차근차근 정황을 좇아가던 탐정은 조력자로 위장한 진범들의 방해에 어느 시점에서 수사의 초점을 잃고 그저 답답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던 중, 소년이 사는 마을에서 장애인 복지시설 건설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이 지역의 유지라 일컬어지는 왠지 수상한 교사들이 이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리고 사라진 소년이 이 반대운동에 참가한 어른들을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 직후 탐정은 사라졌던 소년이 반대자들의 모임 현장에 나타났다가 황급히 떠나는 모습을 목격하고 뒤따라가지만, 아슬아슬하게 눈앞에서 놓치고 만다. 하지만 이날 소년의 곁에는 한 여인이 보호자처럼 따라붙어 있었고, 탐정의 끈질긴 추적 끝에 이 여인이 소년과 영화 모임을 함께하며 친분을 쌓았던 전직 영화사 직원이란 사실까지 밝혀낸다. 소년을 보호하고 있는 여자의 소재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탐정과 경찰.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유일무이한 증인이 될 소년을 먼저 찾아 처치하려는 진범들. 과연 그들 중 누가 먼저 소년을 찾아낼 것인가. 소년은 과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참혹한 사체로 발견된 소년의 친구를 죽인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날 밤 소년들이 목격한 장면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눈앞에서 소년을 붙잡지 못한 회한에 눈물까지 왈칵 쏟아냈던 탐정은 전진과 후퇴를 끈질기게 반복하며 조사를 벌여나가다 결국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밤 소년들이 목격했던 것과 유사한 끔찍한 장면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만다……
무거운 삶을 유머로 눙쳐내는 이 하드보일드의 매력
“‘스스키노와 나’의 이야기는 ‘거리’의 역사와 이야기를 사랑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든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서툴고 어설픈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_아즈마 나오미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인기의 비결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개성 뚜렷한 주인공 캐릭터가 발산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탐정 ‘나’는 명석한 두뇌를 갖진 못했지만 끈기와 행동력에 있어서만큼은 따라올 자가 없다. 키 175센티미터에 몸무게 80킬로그램으로 마치 필름 누아르에 나오는 명탐정 같은 맷집을 자랑하지만 무턱대고 나대다 심심찮게 “십칠 대 일”의 상황을 만드는 시퍼런 객기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종종 그런 상황에 빠져 두들겨 맞을 때는 ‘경찰 언제 오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약함을 보이기도 한다. 12온스(355밀리리터) 텀블러에 찰랑찰랑할 정도로 위스키를 따라 마시는 못 말리는 술꾼이라 늘 위장약을 달고 살고, 여기저기서 얻어터져 제 방에 구토라도 하기 전에는 절대 집 안을 치우는 일이 없으며, 평소엔 그저 영화나 보며 빈둥거리는 위인이지만…… 그렇지만 그는 타인의 안타까운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인간적인 탐정이고, 불의와 악행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단죄하려고 덤벼대는 정의로운 탐정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늘 쫓기며 내달려야 하는 신세가 될지언정 절대 구해야 할 사람은 구하고야 마는 집념의 이 사나이에게, 우리는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이밖에도 위기의 순간이건 평화의 순간이건 주인공 옆에서 든든하게 술친구로서 동지로서 함께하는 든든한 친구 ‘다카다’나, 사건사고의 현장에서 언제나 한발 빠르게 탐정의 정보통이 되어주는 느글느글한 성격의 기자 친구 ‘마쓰오’ 역시 이 시리즈를 빛내주는 소중한 캐릭터들이다.
두번째로 들 수 있는 인기의 견인차는,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대의 풍속과 세태를 아주 촘촘하게 되살려 생생한 사실감을 준다는 데 있다. 스스키노 시리즈는 작가가 말하듯 “‘거리’의 역사와 이야기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똑같은 거리를 무대로 하지만 다양한 소재, 다양한 인물들이 매 편 색다르게 의미심장한 범죄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이 이야기들은 실제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 거리의 분위기에 녹아들어 현장감을 준다. 이밖에도 소설 곳곳에 묘사되는 긴박감 넘치는 격투 신, 아날로그적 감성이 퍼뜨리는 푸근한 향수 역시 이 시리즈의 특별한 매력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