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체험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은 그저 알츠하이머의 증상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김영하는 이것을 반야심경의 악몽으로 형상화한다. 반야심경이라니 그것은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깨달음과 평온을 선물하는 불교 가르침의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악몽이 될 수 있는가.
_권희철의 해설 「웃을 수 없는 농담, 사드-붓다의 악몽」중에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김영하다. 2013년 올해로 데뷔한 지 19년.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여온, 언제나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 그의 소설이 특별한 것은, 늘 ‘그 너머/이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은 꽃』 출간 당시, 그는 어느 영화의 카피를 빌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말은 그의 작품 모두에 해당된다. 1996년에 출간된 그의 첫 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보여준 파격과 도발을 기억하는가. ‘자살안내인’이라는 판타지와 허구는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어 우리 사회에 나타났다. 김영하 문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첫 단편집 『호출』, 진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조작되고 변형되어왔는지를 형식과 내용 면에서 동시에 보여준 『아랑은 왜』, <뉴욕 타임스 북리뷰>로부터 “한국판 『율리시스』”라는 평을 들은 『빛의 제국』, 그리고 고아 트릴로지의 완결판인『너의 목소리가 들려』(2012)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가장 새롭고 가장 스타일리시했다. 그가 통산 열한번째 소설책이자 일곱번째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 『살인자의 기억법』_메이킹 노트 1_이것은 내 소설이다
아내의 기억에 따르면 『살인자의 기억법』의 구상을 처음 들은 것은 10년 전, 우리가 마포구 성산동에 살던 시절이라고 한다. 나는 깜짝 놀라 묻는다.
“그렇게나 오래됐어?”
자신의 정확한 기억력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아내는 주저하지 않고 정확한 시점과 장소까지 특정한다.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 10년 동안 뭘 했을까? 다른 소설들을 썼다. 『검은 꽃』 『빛의 제국』 『퀴즈쇼』 그리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네 권의 장편을 쓰는 동안에도 내 무의식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에야 그 이야기가 내 의식 위로 (올비 식으로 말하자면) “튀어올랐”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시간, 방바닥에 누워 이런저런 잡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지도 않은 택배의 방문처럼, 다음에 써야 할 소설이 무엇인가를 단박에 알게 된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제사로 쓰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 소설보다는 이번 소설에 더 맞춤해 보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 떠오른다.
“오로지 태어난 것만이 죽으니, 탄생은 죽음에 진 빚이다.”
죽음의 스위치가 어찌 방사능 피폭자나 고엽제 피해자 내부에만 있겠는가. 증권거래인들의 유명한 농담처럼, 우리는 ‘장기적으로’ 모두 죽는다. 죽음은 바이러스처럼 우리 안에 잠복해 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를 쓰러뜨린다. 혼미한 정신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안에 있는 또다른 스위치를 켰을지도 모른다.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이야기가 의식 위로 튀어오르도록 말이다. 2013년 1월 12일의 일기에 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 장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올비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새 장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다.”
둘은 아마 같은 말일 것이다.
■ 『살인자의 기억법』_메이킹 노트 2_내가 써야 한다
머릿속에 인물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인물의 입으로 말을 시켜보는 것이다. 스토리 라인이나 플롯, 주제는 다음 문제다. 반드시 그 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작가와 인물이 치르는 일종의 면접 같은 것이다. 소설을 언제 구상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집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특정할 수 있다. 바로 등장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을 작가가 받아적는 순간이다.
나는 모니터의 텅 빈 공간을 바라본다. 초고를 쓸 때의 나는 ‘writeroom’이라는 프로그램을 쓴다. 이 프로그램은 모니터 화면 전체를 새카맣게 덮어버린다. 마치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의 서문에서 묘사한 막막한 우주공간을 보는 기분이다. 이번 소설은 일인칭시점 화자인 만큼 더더군다나 주인공의 말로 시작되어야 한다. 한참을 이 텅 빈 우주와 씨름한 끝에 마침내 첫 문장이 나온다. 오랫동안 내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마침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들은 언제나 경이롭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신인작가 시절에는 내가 한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르코 폴로처럼 낯선 땅을 찾아가는 여행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겨우 허락을 받고 들어간 그 도시에서 나는 인물들을 알아가고 그곳의 풍습을 익힌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다. 그러니 도시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제는 친숙해진 인물들로 가득한 그 도시를.
(…)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점 더 나는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다는 것,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함구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비밀로 하고 싶었다. 나만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밝히는 순간이 바로 내가 그 도시를 떠나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영원히 그 도시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도.
■ 『살인자의 기억법』_메이킹 노트 3_나밖에 쓸 수 없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앵무새는 다른 앵무새를 죽이지 않는다. 나무늘보도 다른 나무늘보를 죽이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아주 자주 살해한다. 일간 신문의 사회면은 언제나 살인사건으로 장식된다.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들, 구약성서와 그리스‧로마 신화, 그리스 비극 등은 살해와 관련된 이야기로 가득하다. 왜일까? 인간이 앵무새가 아니라 영장류로부터 진화해왔기 때문에? 영원한 수수께끼다.
소설을 왜 쓰느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대답이 나와 있다. 그중에서 요즘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답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한 편을 써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편을 오랫동안 써나가다보면 작가는 분명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까지 써온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살인이라는 주제와 나라는 작가를 떨어뜨려놓고 볼 수 없을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내가 결국 소설가가 되고 만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문학, 특히 소설은 기억의 예술이다. 누군가의 유명한 말마따나 소설은 황혼에 쓰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소설가들이 기억의 문제와 씨름했다는 것, 소설의 바로 그런 부분에 내가 언제나 매료된 것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개인사적 필연 속에 제목이 결정되었다 : 살인자의 기억법.
이미 정해져서일까. 아무리 봐도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다른 제목은 생각할 수 없다.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자기 가게를 준비해온 요리사가 마침내 새로운 식당을 오픈한다. 메뉴를 정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같이 일할 직원을 뽑는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바로 간판을 거는 일이다. 간판이 제대로 걸렸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나야 한다. 요리사는 그렇게 한다. 지금의 내 마음이 딱 그와 같다. 제목을 붙이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꿈에 부푼 요리사와 달리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로부터 즉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이런 직업이다.
첫 문장의 강렬함이 채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숨 가쁘게 내달린다. 그리고 문득, 눈앞을 가리는 아득한 심연!
김영하의 소설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소설을 알기 위해서는, 그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읽어보는 수밖에. 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면,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에 도달할 때까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페이지터너란 바로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일 터. 하지만, 책장을 넘기는 손이 눈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책을 읽고 나면 문득, 아득해지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폭발하는 굉음들 사이에 갑자기 찾아온 완벽한 정적, 이 낯선 기분들과 이 기분들이 서서히 공포로 바뀌는 체험”(권희철)이 압도적이다.
어떤 진실들은 사후에야 깨닫게 되듯 책장을 덮고 나면 작품 속 화자가, 또한 작가 김영하가 말하려고 했던 그것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굉장한 파괴력. 단숨에 읽히지만 긴 후유증이 남는다._이적(뮤지션)
이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이다.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두 겹의 악몽 혹은 두 겹의 감옥으로 이루어진, 웃을 수 없는 농담의 공포, 그것이『살인자의 기억법』이 우리에게 건네는 악의적인 선물이다._권희철(문학평론가)
빠르고 단단하고 날카롭고 우아하며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재미있다!
_이이언(밴드 MOT, 비디오아티스트)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또다시 낯선 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무슨 창조주가 이래? 이럴 리는 없다.
이번 소설은 유난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루에 한두 문장씩밖에는 쓰지 못한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꽤나 답답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주인공의 페이스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아닌가. 그래서 마음을 편히 먹고 천천히 받아적기로 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써나가는데 문득 어떤 깨달음이 왔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여행자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자면, 오직 나만이 그 세계에 방문했다는, 오직 나만이 그 세계에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아마 이 소설은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