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이해경 장편소설
총구를 겨눈 채 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위태로웠던 젊은 날, 나쁜 피에 관한 기록.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로 장편소설에 적합한 지구력과 돌파력, 안정적인 문장력 등을 두루 인정받으며 2002년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이해경은 『머리에 꽃을』『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등을 발표하며 장편소설 작가로 그 뿌리를 내려왔다. 또한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짧게 스쳐지나가는 찰나를 포착하면서 서사적인 것과 비주얼을 동시에 표현해온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과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영화 <형사 Duelist> <M>은 작가 이해경의 특장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주는 작품들이다. 이해경은 굵은 서사의 줄기를 만들어 빠르게 밀고 나가는 대신, 얇은 미농지를 겹쳐놓듯 기억 속 장면들을 포개고 이으면서 개성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장편소설이 이토록 섬세하고 잔잔한 리듬을 유지하며 자신의 서사를 전개해나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는 1979년 10월 27일로 시작해서 1988년 11월 23일로 끝이 난다(이 날짜들은 각각 박정희가 피살당한 다음날과 전두환이 비리 문제로 추궁당하여 백담사로 떠난 날에 해당한다). 이 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열일곱 살 어린 남자아이는 박정희 정권을 가파르게 지나 꽤 긴 시간 전두환 정권을 겪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젊음을 보존하고 또 상실해간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이 소설은 젊음을 기어코 앗아가려는 세계에 맞서 이를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청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성숙을 거부하는 청춘들은 어떤 방식으로 나이들어가게 될 것인가.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는 바로 그 위태롭고 애달픈 청춘에 대한 이야기이다.
“널 못 보게 훼방놓는 인간이 있으면 죽여버리겠어!”
사랑을 방해한다면 최고 통치자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한수는 의붓아버지와 그의 딸인 누나 한숙과 함께 사는 엉뚱하고 선량한 남자아이.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독한 술을 마신 그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세찬 속도로, 이상한 피가 몸속에서 흐르기 시작한 것. 이후 한수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서울에 있음에도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의 소리를 듣고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는가 하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마치 이미 지나간 일들처럼 미리 알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살기 어려워진 “미친” 한수. 그는 전혀 엉뚱한 이유로 국가 최고 통치자 전두환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미팅에서 만나 한순간에 좋아하게 된 여자아이 소영, 그녀와의 만남을 전두환이 방해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이제 한수는 인생의 목표를 ‘전두환 제거’로 삼는다. 한수는 오로지 그놈을 없애고 말겠다는 일념하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뉴스와 신문을 통해 꼼꼼하게 살피며 매일같이 몸을 단련해나간다. 한수는 그놈을 죽이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이토록 위험하고 황당한 목표를 세우고 청춘을 살아가도 괜찮은 것일까?
그런 한수에게 잊히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다. <디어 헌터>의 사슴 사냥 장면. 곧잘 어울려 사슴 사냥을 다니면서 한 방에 잡아야 한다고 큰소리치던 청년들이지만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철저히 망가져 있다. 이제 사슴 사냥꾼은 바로 눈앞에 수사슴을 두고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채 돌아선다. 한수는 의문을 품는다. 왜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던 것일까?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한수는 그 사슴 사냥꾼처럼 청춘을 살아낸다. 청춘의 시기 내내, 무려 구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놈을 그저 노려만 본 채로.
저렇게 젊어서 어떻게 살까 싶도록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는 젊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곧 청춘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청춘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마련인 성숙의 곡선이 여기에는 없다. 이들은 성숙을 거부하며 청춘을 완강하게 움켜쥔 채 시간에 맞선다. 그 결말은 이미 청춘을 지나온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무한한 슬픔으로 열려 있지만, 감히 누가 이 안간힘에 대해 쉽게 입을 뗄 수 있겠는가.
주인공 한수와 같은 시대를 살아내고 여기까지 온 이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청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들에게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는 거울과도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청춘을 잃는 것이 곧 타락인 것만 같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우리들, 성숙하는 일이 배신인 것만 같아 애써 미래를 그려보지도 못했던 우리들이 이 속에 있다. 거울 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만날 때, 우리는 제 물리적 나이를 잊고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청춘의 기운을 더듬어보며 다시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그때 우리는 거울 속의 얼굴을 보기 전의 우리가 아닐 것이다. 저렇게 젊어 어떻게 살까 싶도록 젊었던 우리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
우리 좀 걸을까.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뱉은 말이었다. 찻길에는 여전히 사람들뿐이었다. 저렇게 젊어서 어떻게 살까 싶도록 젊은 사람들. 그들은 용산 쪽과 남대문 쪽으로 크게 갈라져 흩어졌다. 흩어지며 작은 무리들을 이루어 나아갈 때, 그들의 노래와 외침이 부딪치고 섞이며 너울너울 밤하늘로 올라갔다.(62쪽)
그 남자랑 결혼할 거예요?
형이야.
그 형이랑 결혼할 거냐구요.
너 같으면 하겠니. 나 같은 애랑.
나 같으면 해요. 누나 같은 여자 말고, 누나랑.
그러니까 니가 아직 어리다는 거야.(67쪽)
너 장준하 선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그렇게 묻는데 그 양반이 누구냐고 묻기는 쉽지 않았다.
얘네 학교 선생인가. 한수는 요행을 바라고 말했다.
고혈압?
미자는 한수가 알 만한 사람 얘기로 건너뛰었다.
박정희가 제일 잘못한 게 뭐라고 생각해.
그 문제라면 한수도 할말이 있었다.
자기 아내를 지켜주지 못하고 대신 죽게 놔뒀지.
미자는 한수를 지그시 바라본 뒤에 말했다.
넌 참 엉뚱해.
엉뚱한 건 너라고 한수가 말하려는데 미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좋아.(114쪽)
누가 우리의 평화를 해치려 하는가. 가만두면 그 훼방꾼이 또 무슨 흉계를 꾸밀지 모른다고 한수는 생각했다. 살려두면 안 돼. 그자가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인생은 계속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한수는 확신했다. 없애버려야 해. 제거하지 못하면 제거당한다. (……)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이상한 피가 심장을 거쳐 뇌혈관에 스며들었다. 그자는…… 스르르 눈 감기 직전에 한수는 상대방의 정체에 대한 심증을 굳혔다. 그것은 매우 독창적인 판단이었다. 한수에게 제거 대상으로 찍힌 그자는 통행금지를 없앤 장본인이었다.(154쪽)
*
노래가 끝난 뒤에 시인은 말했다. 숱한 언어들 속에 나의 보잘것없는 한마디가 보태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아도 시인의 말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들려와 속수무책이었다. 지긋지긋하게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음을 네가 모르지 않을진대 요구하지 마, 요구하지 마! 강요하지 말 것. 숨을 고른 뒤에 시인은 말했다. 구체적인 것이다, 산다는 건. 그 말의 뜻을 헤아리기가 너무 고통스러운 이들을 위해, 시인은 잊혀졌다._‘작가의 말’ 중에서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는 전두환에 대한 소설이 아니고, 80년대의 역사를 다루는 소설도 아니다. 이것은 ‘젊음’과 ‘순수함’의 서사화이자, 그것들에 수반되는 안타까움과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쁜 피가 나타났다 사라진 구 년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뿐이다. 그러나 이쪽의 절박함이 없다면,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80년대의 역사에 대한 평가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_권희철 해설 「부디 너의 젊음이 한시 바삐 지나가기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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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경 |2002년 장편소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로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머리에 꽃을』『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등이 있으며 이명세 감독과 함께 영화 <형사 Duelist> <M>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 초판 발행 | 2013년 9월 16일
* 145×210 | 328쪽 | 값 12,000원
* ISBN 978-89-546-2242-4 03810
* 책임편집 황예인(031-955-2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