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진 전집을 펴내며
『시인부락』의 시인이며, 승려이고 한학자였으며 향리의 교사였던 김달진 선생은 평생을 세간에서 멀리 떨어져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고고한 정신의 세계를 천착하였다. 영원한 세계, 절대적인 세계를 향한 동경과 세속의 명리에 대한 부정은 구도자로서 선생의 인간과 학문을 되새겨보게 만든다. 시대의 대세가 서구문화의 논리와 서구풍의 취향에 기울어져 있을 때 김달진 선생이 추구했던 세계는 매우 이채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김달진 선생의 시적 업적과 동양학으로 지칭될 불교와 한학의 섭렵은 80여 년에 걸쳐 축적된 것으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하나의 장관으로 비쳐질 것임에 틀림없다.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를 목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선생이 성취한 지혜와 학문은 그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문학의 정신이 쇠퇴하고 새로운 과학기술 문명의 탄생이 예고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깊은 삶의 예지를 머금은 선생의 저작을 하나로 묶어 뜻있는 독자들에게 제공하여 새로운 인간학의 정립에 기여하고자 한다. 절대적 진리의 도의 기준에서 볼 때 인간은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 진리를 깨닫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위대하다. 호화찬란한 과학문명 또한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학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가공할 만한 괴물로 전럭하게 될 것이다. 세기말적 해체와 혼돈의 와중에서 우리가 김달진 선생의 저작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와 슬기는 물질만능과 탐욕의 어둠을 밝혀줄 등불이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 편집위원 : 김용직(서울대 교수) 김윤식(서울대 교수) 김장호(동국대 명예교수) 김종길(고려대 명예교수) 박경훈(동국대 역경원) 신상철(경남대 교수) 유종호(연세대 석좌교수) 정한숙(고려대 명예교수) 홍기삼(동국대 교수) 최동호(고려대 교수)
고아한 삶, 청정한 시세계, 김달진詩전집 출간!
청정한 시세계와 고아한 삶 그리고 탁월한 불경 및 한문학 번역으로 우리 시대의 큰 봉우리로 자리잡은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선생의 시들이 드디어 한데 모였다. 김달진 선생이 타계한 지 꼭 8년 만에 이루어지는 의미깊은 작업인『김달진전집』중 첫째권으로서 출간되는『김달진詩전집』은 선생의 60여 년의 시작 생활에서 일관되게 구축한 소박한 자연주의와 불교에 바탕을 둔 무위자연의 시세계를 총집약한 것으로 그 문학적·역사적 의미가 실로 크다 하겠다.
『김달진詩전집』은 김달진 선생의 제1시집『청시』, 제2시집『올빼미의 노래』(이 두 시집은 1983년 시인사에서『金達鎭 詩全集』으로 출간되었다.), 禪詩集『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1990년 민음사 刊), 장편 서사시집『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1984년 시인사 刊) 의 합본이다.
한편 문학동네는『김달진 산문 전집』『손오병서』『장자』를 비롯해 全 19種 22卷에 달하는『김달진전집』을 한 달에 한 권씩 계속해서 출간할 예정이다.
월하 김달진 선생은 1907년 경남 창원군 웅동면(현재 진해시로 편입)에서 출생, 1929년『文藝公論』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詩苑』『詩人部落』『竹筍』동인으로 활약했다. 1939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 한때 입산하여 수도생활을 했으며, 일제말 북간도를 찾아가기도 했고, 해방 후 동아일보 문화부에 잠시 근무하였으나 이후 문단에서 잠적했었다. 1960년대 이후 은둔하면서 동국대학교 譯經委員으로 불경 국역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1983년에는 佛敎精神文化院에 의해 韓國高僧碩德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는 시집『청시』(1940)『올빼미의 노래』(1983), 장편 서사시집『큰 연꽃 한 송이 핏기까지』(1984)가 있으며, 그 외『莊子』『法句經』『寒山詩』『唐詩全書』등 동양의 고전과『韓國禪詩』『붓다 차리타』『普照國師全書』, 원효의『金剛三昧經論』등 다수의 책들을 한글로 번역했다. 직접 譯解한『韓國漢詩』전3권의 완간을 앞두고 1989년 6월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언어, 비범한 경지, 서정주의의진미(眞味)
김달진 선생은 일제 통치 시대부터 제도권 문단 속으로의 편입을 거부하고 학처럼 고고한 삶을 살았으며 시에 있어서도 오로지 순수성만을 지켜온 시인이다. 선생의 비범한 업적과 노작(勞作)들이 그러하듯 선생의 시세계는 결백한 시정신과 수도자적인 초월의식을 근간으로 어떤 이념이나 관념에 치우치지 않고 자연의 정취 그대로를 소박한 언어로 담아 인생에 대한 원숙한 생각과 달관의 심경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서정주의의 진미(眞味)를 보여준다. 선생의 시어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경지를 지향하고 있어 맑고 깨끗한 정신주의적 세계를 표방하는 선생 특유의 시적 상상력의 뿌리를 가늠케 한다. 그러므로 선생의 시들은 발표된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짓과 미망이 횡행하는 혼탁한 이 시대에 거짓을 부정하고 인간 본연의 순결한 본성을 일깨우는 힘을 지니고 있어 그 시사적 의의가 현대에도 새롭게 가치를 발한다.
노장적 무위자연에 근거한 시심을 지켜온 독보적인 존재!
김달진의 시의 본령은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서의 세계인식, 즉 노장적 세계관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시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에서 찾으려고 하는 도가적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의 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런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노장적 세계관을 펼쳐 보여주는 개성과 특징이 뚜렷하다.
김달진의 시가 문제적인 것은 그가 불교적이며 노장적 정신의 전통을 잇고 있기 때문이라고 문학평론가 최동호는 언급하고 있다. 김달진 선생은 대부분의 20년대 또는 30년대 시인들이 서구 시에 압도되던 시절에 평생을 동양적 정신세계, 그중에도 노장적 무위자연에 근거한 시심을 지켜온 독보적인 존재이다. 인공의 손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완결된 세계, 영원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지향하며, 천지와 만물이 나와 함께 하나라는 장자의 사상에 바탕을 둔 범아일여적(梵我一如的) 상상력이야말로 선생이 평생토록 일관한 시적 사고의 원천이며, 선생이 스스로 지켜온 은자적 삶의 표현이요, 그의 시세계를 구축해온 사상적 기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달진 시의 시사적 의의는 60여 년의 시작 생활을 일관되게 지켜준 그의 무위자연 사상이 불교사상의 터전 위에서 노장적인 동양철학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단절되었던 현대시의 정신사적 흐름을 연결시켜준다는 점에서 또한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
허정(虛靜) 또는 은일의 정신, 달관에서 우러나온 선미(禪味)
시전집의 1부 청시와 2부 올빼미의 노래에 수록된 시들은 무위자연의 노장적 세계관과 함께 맑고 고요한 몸가짐으로 천하를 바르게 한다(淸靜爲天下正)는 자세로서 허(虛)·정(靜)의 태도 또는 은일(隱逸)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즉 선생의 시는 한편으로 청허(淸虛) 또는 허정(虛靜)의 노장적 세계에 깊이 침잠해 있는 것이다. 그것에은 맑고 고요하고 텅 비어서 참된 자유의 본성 또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에 도달하고자 하는 선생의 뜻이 스며 있다. 이 점은 김달진 시의 독자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특유의 개성이며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친근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인 조정권의 지적처럼 김달진 선생은 오늘의 시인이면서 옛 시인의 품격을 겸비하고 있다. 오늘의 삶을 표백시키면서 그 위에다 향그러운 언어로 정결한 묵화를 치신 분이다. 일찌기 선생처럼 고아한 정신의 품격을 지속한 전례를 우리 시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선생의 정신적 경도를 헤아려볼 수 있는 것이 유고시집으로 출간되었던『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이 책의 4부에 해당한다.)이다. 선생은 이 시집에서 노년의 단조로운 생활에서 오는 일상 주변의 건조함을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노래하며 소실되어가는 자연의 덧없음에의 감각을 통해 대긍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또한 시들은 활기와 여유로움, 달관에서 우러나온 선미(禪味)를 담고 있어 선생의 탁월한 재능과 안목, 통찰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우리 시사에 이만큼 독보적이고 예외적인 시인이 또 있을까 싶을만치 선생의 시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시의 내면적 진실을 심화시키고 전통적인 서정의 질을 고양시켜주는 표본
김달진 선생의 시는 우리 시사의 전통을 고려해볼 때 분명 특이한 성격을 지닌다. 그의 시세계는 사회·현실과 밀착돼 있지도 않으며, 언어·현실과의 싸움을 전개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형이상학적 관념에 편향되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허정의 세계 또는 무위자연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본원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 데서 그 본령이 드러나거니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모색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삶, 정신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서 특유의 개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의 시가 보여준 선적(禪的) 감각과 허심의 세계야말로 우리 시의 내면적 진실을 심화시키고 전통적인 서정의 질을 고양시켜주는 표본이며 그것의 소중한 의미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현대시에 가장 부족한 요소의 하나라고 할 청정심의 세계 또는 선적 명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김달진 선생의 시가 가지는 의미는 실로 크고 값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