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절대로 삶 그 자체여야 하며 동시에 절대로 삶을 넘어서야 한다.”
문학이 가리켜 보이는 세계의 바깥, 이미지의 매혹 안에서
비로소 감지할 수 있는 존재의 낯섦!
그의 비평은 물로 옷감을 짜는 한낮의 빗줄기처럼 작품 밖을 서성거리는
작품의 맨얼굴, 작품 바깥의 광활을 더듬는 데 바쳐진다.
_김혜순(시인)
그는 일관성이 있고 공평한 사람이다. 그리고 매우 자주 정의롭다.
그는 너무나 많이, 정확하게 읽는다.
_서영채(문학평론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온 길 잃은 얼굴들을 대면하는 한 젊은 평론가의 자세,
권희철 첫 평론집
2008년 『문학동네』 가을호에 「방랑자를 위한 여행안내서_윤대녕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권희철은 주목받는 젊은 평론가이자 현장비평의 최전선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인 평론가이다. 현재 『문학동네』 최연소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데뷔 5년 만에 첫 평론집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를 펴냈다. 그간 쓴 글을 추려내고 정리한 첫 책임을 생각하면, 오백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은 그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방증이 될 것이다. 또한 소설 비평뿐 아니라 시,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예민한 촉수를 드리운 그의 에너지 또한 앞으로 더욱 풍성한 활동을 기대하게 한다.
“문학은 절대로 삶 그 자체여야 하며 동시에 절대로 삶을 넘어서야 한다”는 신념 아래, 삶 그것에 집중하며 동시에 세계의 ‘바깥’, 즉 “세계 너머의 또다른 세계가 아니라, 모든 현실이 부정되었을 때 드러나는 비현실성이자 불가능성의 드러남”에 천착하는 평론가 권희철. “낯선 것을 낯선 것의 낯섦, 이 해 불가능성, 계산 불가능성을 보존한 채로 우리와 접촉하게 하는” 문학만의 어법을 통해 우리 존재가 처한 위험을 감지하는 데서 그의 비평의 특색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아감벤의 문장을 빌려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얼굴’은 ‘안면’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얼굴은 안면이 아니다. “얼굴은 수시로 안면의 정체성을 지우고 미세하게 차이 나는 감각과 정서가 새로운 표정으로 돋아나오는 열림, 드러냄, 소통의 장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은 모든 양태와 성질을 탈고유화하고 탈정체화하는 문턱이다.”
우리 존재의 맨얼굴은 언제나 안면의 고정된 형태를 넘어선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꿈꾸면서 우리의 심연을 탐색하고 확장하며 강화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인간이 매 순간 자신 이상이고자 하는 가변적 존재이므로 안면의 고정된 형태가 우리의 맨얼굴을 대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를 변모시키는, 자신에 대한 꿈꾸기, 그 꿈의 무늬야말로 우리의 참다운 맨얼굴이다.(119~120쪽)
고정된 고유성과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을 넘어서’ “오로지 당신의 얼굴이” 된다는 것. 한 젊은 평론가의 넓고 깊어져가는 비평적 욕망을 따라가며 곱씹어보자.
1부 ‘밤, 바깥, 이미지’는 비현실성과 불가능성이 우글거리는, 위치지워지지 않은 채 낯섦을 유지한 존재들의 ‘불면의 밤’을 배경으로 삼는다. 신경숙, 한강, 배수아의 소설을 함께 읽으며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화’ ‘죽음의 극복’ ‘우글거림의 표현과 꿈의 존재론’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세 가지 항목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것이 결국 세계로부터의 물러남이라는 점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빠져나옴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범주 아래 놓아볼 수도 있겠다.” 자기 자신의 바깥, 시간의 바깥, 언어의 바깥, 세계의 바깥 등에 자신을 던져넣는 작품들.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에서도 역시 “가시적인 영역이 은폐하는 히스테리적인 것”을 읽을 수 있다. 김혜순 시집 『슬픔치약 거울크림』 역시 매끈한 우리 존재에 느닷없이 습격을 가해 ‘구멍’을 뚫는 ‘바깥’에 대한 시적 체험을 담았으며, ‘미로’의 생성이 돋보이는 조말선 시집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도 마찬가지다. 편혜영의 단편과 이준규의 시들도 만날 수 있다.
모든 사물들이 서둘러 극단적으로 사라지는 거기 더 한층 깊은 대홍수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것, 꿈과 비현실 속으로 침몰하게 만드는 것, 그곳에서 세계의 바깥을, 현재의 존재와는 다른 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것.(51쪽)
2부에는 “삼켜지기와 빠져나오기, 가둠과 펼쳐짐의 리듬” 속에서 ‘보이지 않는 춤’을 추는 시와 시인들이 모여 있다. 박판식, 김이강, 윤진화, 이은규, 남진우, 강정, 송찬호, 신해욱 등을 만날 수 있다. 시는 고정된 진리가 붙박인 단단한 구조물이 아니라 “밝힘과 은닉 사이의 투쟁적 운동”을 “고요히 태동시키는 어떤 것”이다. “이 리듬이 우리의 꿈을 자극할 때 우리의 꿈 또한 이 리듬에 따라 우주적 반죽을 시작”할 것이다.
시는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밝게 비춰주지만, 밤이 다가오고 그림자가 범람하는 것처럼 다시 그것을 불명료함 속으로, 대지의 품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대지의 품에서 다시 무엇인가를 꺼내서 우리 앞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이중의 운동, 그것이 시가 품고 있는 것이다.(90쪽)
3부 ‘누구도 너무 많이 슬퍼할 수는 없다’에서는 생의 먹먹함과 슬픔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를 만날 수 있다. 도처에 고인 죽음과 이별의 분위기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슬픔’을 원동력 삼아 “그러한 분리 불가능한 슬픔이라는 조건 속에서” 상실의 대상과 새롭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길들여지지 않은 슬픔을 땅에 묻다_박준론」). 또 “삶의 비극성과 거기에 따르는 곡진한 슬픔”이 “다만 슬픔 안으로 침몰하지 않도록 분투하는” 이야기는 “너무 슬퍼서 참 좋다”(「감정교육_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삶의 절박함과 서글픔, 외로움을 우리가 어떻게 서로 보듬고 감싸며 관계맺음을 향해 나아가는지는 신경숙 소설로 짚어가며, 상처와 고통, 절망과 허무주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낸다는 것”에 대해서는 천운영과 최은미의 소설로 파고들어간다.
비극이란 슬픔, 고통, 시련을 전시함으로써 눈물과 함께 삶의 우울을 일시적으로 흘려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비극은 그렇게 나약한 자들을 위한 체념의 예술이 아니다. 비극은 슬픔, 고통, 시련조차도 반복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서만 그것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한 긍정을 통해 삶을 더욱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삶의 보석함을 마침내 열어낼 수 있는지를 묻는 의욕과 의지에 대한 시험으로써의 예술, 그것이 비극이다. (…)비극을 읽는다는 것, 허무주의에 감염된 슬프고 무력한 순간들을 의욕에 찬 기쁨의 순간들로 되돌려놓으려 한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삶을 살아낸다는 것.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비극을 읽는 것입니다, (297쪽)
4부 ‘삶, 더 많은 삶’에서는 질식해가는 현실세계에 “문학이 어떻게 새로운 문제 제기의 산소를 주입할” 것인지, ‘입을 먹는 입’에 삼켜지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 고찰한다. 또한 “우리가 속물적 욕망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는지, 그것이 이제 얼마나 단단하게 제도화되었는지”, 내면의 중심부를 채우는 고귀한 가치와 신념은 사라진 자기파괴적 폭력과 “쓰레기가 되는 삶” 등 우리 삶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도 탐구한다. 황정은과 편혜영의 소설, 김사과와 박민규, 김경욱, 이경의 소설과 송경동의 시를 만날 수 있다.
문학이 정치와 분열되어 있으며 그 분열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반성은 오히려 문학 외부에 정치적 활기가 있으리라는 소망을 사실 판단인 양 착각하게 만들고 이런 착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안심시키기까지 한다. 문학이 참여하고자 하는 정치적 공간 자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오늘날 정치는 법에 의해 오염되어 스스로를 법 정립적 폭력으로 간주하거나, 단순히 살아남는 기술의 문제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정치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우리의 요점은, 질식해가는 정치에 문학이 새로운 문제 제기의 산소를 주입할 권리가 있으며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냉소주의의 시대에 ‘문학과 정치’를 논할 때,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304쪽)
5부 ‘이야기의 교차로’는 배수아와 한강 소설이 가진 ‘이야기 없는 이야기’라는 편견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시하며 시작한다. 그들 소설에는 “이야기의 은밀한 법칙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법칙은 “이야기란 하나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라는 것”, “결코 도래하지 않은 채로 언제나 여전히 도래하는 중인 그 만남을 향해”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5부에서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소설가들의 ‘이야기의 은밀한 법칙’을 길러낸다. 편혜영 장편 『서쪽 숲에 갔다』 속 자기 지시적 알레고리와 “스트레칭 서스펜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절망적인 메아리와 담지자 없는 소리”가 이루는 뫼비우스의 띠, 성석제의 중편 『호랑이를 봤다』가 그려 보이는 성석제식 인간학, 조현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와 영화 <스캔들>을 비교 대조한 비평 「절대인간의 몰락」 역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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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비평은 단정짓지 않고, 해결하지 않고, 공헌하지 않는다. 그는 한 작가가 작품의 바깥으로 내몬 얼굴의 시니피앙에 단번에 도취한다. 그는 견딜 수 없음을 견뎌내느라 주변부나 서성거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시, 소설 들에 숨은 작품 내부의 텅 빈 핵(김수영이 ‘조그만 물방울’이라 명명한 것 같은 것), 그 위태롭고 터질 듯한 불가능성에 매혹된다. 작가들이 간혹 안이라 부르고 그가 바깥이라 부르는 그 세계에. 그의 비평은 물로 옷감을 짜는 한낮의 빗줄기처럼 작품 밖을 서성거리는 작품의 맨얼굴, 작품 바깥의 광활을 더듬는 데 바쳐진다. 그러기에 그의 비평은 그림자의 텍스트, 밤의 텍스트, 소멸의 텍스트이다. 이 평론집엔 ‘아니다’와 ‘바깥’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무릇 작품이라는 것이 삶 자체의 소중한 구성 성분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늘 죽음의 익명성에 드는, 죽음에 죽는, 다른 방식으로 진동하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온 길 잃은 얼굴들을 대면하는 글쓰기를 문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작품의 내용으로부터 미끄러져 단번에 작품이 탈구축한 부재와 무한한 미궁에 자신의 글쓰기의 투명성으로 스며드는 만남의 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소리치고 흐느끼는 텍스트의 뼈가 이렇게 공기에 흔들리는 기체의 무늬처럼 투명한 갈망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있었다고 증언하는 것. 이 증언의 끝에서 그의 텍스트가 다시 언어 바깥의 그림자, 그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우글거리는 대낮과 맞서는 모습! 고독하고 단정하다!
―김혜순(시인)
그를 알고 난 후 언젠가부터 나는 그에게 의존적이 되었다. 내가 확인하지 못한 대목들에 대해서는 주로 그에게 묻는다. 그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고 별로라면 별로다. 이런 권희철 의존증은 갈수록 심해진다. 물론 함께 읽은 것들에 대해서는 가끔 부딪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짐짓 그를 무시해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는 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언제나 태연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는 일관성이 있고 공평한 사람이다. 그리고 매우 자주 정의롭다. 그는 너무나 많이, 정확하게 읽는다. 그런 그가 글까지 잘 써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가 드디어 첫 평론집을 낸다. 책을 냈으니 그도 이제는 갈데없는 나의 동업자가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버린다. 뿌듯하다. 날개옷을 감춰둔 나무꾼처럼.
―서영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