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변용한 새로운 신화, 비극
그리스 비극의 원천은 신화이다. 신화는 그리스어로 뮈토스mythos인데, 신과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비극의 주요 소재는 『오뒷세이아』, 『일리아스』 등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 신화이다. 그러나 비극은 신화의 뼈대는 간직하되, 독자적 구성요소에 따라 신화를 변용하고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즉 창작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새로운 신화가 비극인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이다.
20세기 저명한 고전학자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는 비극이란 “영웅 신화를 소재로 극화된 독립적인 신화이고, 아테나이 시민들이 합창단으로 참여해 만든 공연예술이며, 디오뉘소스 신을 찬양하는 행사”라고 정의한다. 저자 김기영은 신화의 수용과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비극을 “전해오는 신화를 수용하여 극형식에 담아 변용한 결과”라고 새로이 정의한다.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은 피비린내 나는 아트레우스 가문 신화를 격조 높은 비극으로 승화시킨다. 저자 김기영은 삼부작의 각 작품이 전제하는 전통 신화를 밝히고, 그 신화를 근간으로 어떻게 비극의 플롯이 짜이는지 명료하게 규명한다. 기본적으로 비극은 신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이야기 유형들―갈등, 귀향, 탄원, 계략, 징벌, 복수, 발견, 희생, 구원, 추방 등―을 충격적이고 예상치 못한 극적 방식으로 결합하여 플롯을 구성한다.
전통 신화가 비극으로 변용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 행위가 비극적 사건의 중심에 놓인다는 것이다. 가령 『아가멤논』에서 인간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아가멤논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데, 아가멤논의 죽음은 또하나의 원인이 되어 또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초월적 신이 개입해 인간 행위가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인간들은 자발적으로 행위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라는 아폴론 신의 명령과 어머니를 살해할 경우 복수의 여신들에게 고통을 당하리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스스로 복수를 선택한다. 이 과정을 통해 비극 시인은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이라는 제우스의 섭리가 구현되는 모습을 관객(시민)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새로운 시민국가의 탄생: 복수의 정의에서 문명적 정의로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은 도시국가 아테나이가 해상제국으로 발돋움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하던 기원전 458년에 공연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도시국가 아테나이의 발명품인데, 그 아테나이의 정치사회적 발전상을 극화한 한 편의 정치 드라마가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이기도 하다.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비극의 무대는 아르고스에서 델포이를 거쳐 아테나이로 바뀐다. 이처럼 한 도시국가에서 다른 도시국가로 무대 배경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스 비극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아테나이로의 이동은 피의 복수로 얼룩진 신화의 세계를 떠나 문명적 가치를 수호하는 세계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리스 비극에서 아테나이는 범죄로 얼룩져 무질서한 테바이나 아르고스와 달리 이상적인 도시국가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자비로운 여신들』의 중심인 ‘오레스테스 재판’ 장면은 복수의 여신들과 아폴론이 대립하고 둘 사이를 아테나 여신이 중재하는 구도로 되어 있다.
크로노스가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하여 흘러나온 피로 가이아가 임신하여 낳은 딸들인 복수의 여신들(오래된 신)은 가문 저주에 따른 복수의 실현을 관장하며, 여성적인 것을 표상하는 신성이다. 반면 크로노스에 이어 통치자가 된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새로운 신)은 제우스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하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도를 지지하는 신성이다. 즉 복수의 여신들이 오이코스oikos(가정), 오래된 신들, 혈연관계, 여성적인 것의 영역을 상징한다면, 아폴론은 폴리스polis(국가), 새로운 신들, 결혼제도, 남성적인 것의 영역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하여 가부장제도가 흔들리자, 아폴론이 오레스테스에게 어머니를 살해하여 복수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도는 결혼제도를 기반으로 하며 이는 도시국가 형성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각각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복수의 여신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이는 바로 아테나 여신이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남성적 여신’이자 도시국가 아테나이의 수호신인 아테나는 오레스테스를 재판 절차를 통해 석방하여 복수의 여신들과 아폴론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판결에 분노한 복수의 여신들을 로고스로 설득하여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변모는 여성적인 것과 오이코스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남성적인 것과 폴리스의 하위요소로 삼아 변증법적으로 통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아테나는 오래된 신과 새로운 신의 갈등을 중재하여 두 신성이 관장하는 영역들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이러한 정신을 반영하여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기초한 시민국가를 탄생시킨다. 이는 곧 제우스 신성의 진화와 제우스 통치의 확립을 의미한다. 제우스의 정의는 『아가멤논』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잔인한 복수로 나타났으나,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재판으로 심판하는 문명적 정의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의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고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