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소리의 백발 한 가닥이 잡힌다”
허밍하듯 입다물고 귀기울여 읽는
천수호 두번째 시집 『우울은 허밍』
천수호 시인의 두번째 시집 『우울은 허밍』.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시인은, 6년 후 첫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을 묶어 냈다. 그리고 또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시인은 두번째 시집 『우울은 허밍』을 독자들에게 ‘들려’주려 한다.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들리는 사물의 기척들을 엮”고 있다는 박형준 시인의 감상처럼 이 시집을 읽는 열쇳말은 귀, 그러니까 청각이다. 10여 년 전 시인은 “뇌에도 주름이 있듯, 언어의 주름 사이에도 비의가 있을 텐데 그걸 드러내고 싶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쉽게 드러나지 않은 언어의 은밀한 뜻, 시인은 귀로 들었음직한 그 비의를 다시 우리들의 귀로 들려주려 한다. 그러니 이 시집은 귀기울여 읽는 시집이다.
갓 결혼한 신부가 처음 여보, 라고 부르는 것처럼
길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불쑥 봉분 하나 나타난다
인기척이다
―「인기척이다」 부분
불쑥 조우한 봉분에게서 느끼는 인기척이란 무엇일까. 심지어 그 인기척에서는 갓 결혼한 신부의 부끄러운 말소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은 인기척으로 되살아나고, 그 인기척은 “새 신부”처럼 부끄럽고 또 순결하기까지 하다고 이 시는 이야기한다. 시인은 봉분이 “뒤척임도 없이 저렇게 인기척을” 낸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시인이 죽음의 인기척을 발견해낸 것이다. 청각의 섬세한 추적이 없었다면, 더군다나 시각 위주의 현대사회에서는, 좀체 일어나기 어려웠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인기척은 우리 선조들이 노상 느껴왔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감각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들려주려고 한 건 그런 상실의 회복을 담은 이야기이다.
시인이 두번째 시집 『우울은 허밍』에서 주목한 주제는 그래서 ‘소리의 세계’라 이름 붙일 만하다. 현대문명이 발전과 새로움을 좇으면서 몰개성/몰개인이 다수인 시각 위주의 사회를 만들어왔다면, 시인이 노래한 ‘소리의 세계’는 개인적 체험이 극대화된 원시의 세계 또는 이상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첫 시집에서 다각적이고 다채로운 세계를 그려낸 까닭은 (단순히 눈의 감각에 집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을 철저하게 배제한 황량한 도시에 어떤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시인이 두번째 시집에서 귀의 감각에 천착한 것은 그와 같은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의 온갖 소리에 노출된 귀는 “소통의 첫 창구”이다. 귀가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않고 또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는다면, 자연스레 소통은 왜곡되거나 막힌다. 소통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어쩌면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을지 모른다. 한국전쟁 때 포탄에 한쪽 청력을 잃은 상이군인인 아버지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면서, 사춘기를 겪는 딸이 시인과 불화하기 시작하면서, 시인은 소리와 소통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듯하다.
아버지는 귀를 먼저 지우셨다
기억과 거래하는 족족 두 귀는 몸에서 떨어져나와
기웃기웃 날아서 반백 년을 도로 넘어갔다, 가버렸다
(……)
귓바퀴만 남아 헛바퀴를 돌릴 동안
귀가 없어진 아버지의 눈은 까무룩해졌다
―「아버지의 귀 거래사」 부분
엄마와 딸의 고래고래
(……)
처음부터 미끄덩 잡히지 않는 딸과
애초에 손이 없는 돌고래 엄마
옆방 아들은 이어폰 끼고 나왔다가
고래고래를 지나
긴 바게트 하나 물고 다시 들어가고
―「그건 됐구요, 고래고래 잡으러」 부분
시인 개인의 ‘삼대’ 이야기는 사실 우리네 공통의 세대 갈등 이야기이고, 우리가 공유하는 현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자연 파괴는 자연의 소리를 지워만 가는데, 그 잃어버린 소리들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점증하는 소음들 때문에 정작 자신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어쩌면 본질적인 의미의 귀를 잃어버렸다고 선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해설자의 표현대로 “‘맑은 음색’을 골라내는 투청력”이, “무수하게 흘러가는 소리들 속에서 소리를 가려듣는 능력”이 무엇보다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한 것 아닐까. 이 지점에서 귀와 소통과 소리에 대한 시인의 고민은 보편성을 얻는다.
파도의 귓바퀴 속을 걸어들어가봐
튤립 싹이 왜 귀부터 여는지 알게 될 거야
파도와 파도 사이
그 조용한 시간을 견디는 게
튤립의 전(全), 생(生)이거든
―「파도의 귀를 달고 개화하는 튤립」 부분
파도는 큰 귀를 열고 해변으로 밀려온다. 그 모습은 세상 만물과 소통하려는 의지 같기도 하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려는 장면 같기도 하다. “튤립” “오동나무 둥치” “맨주먹의 어린 싹” “윈드서퍼” 모두가 “파도”처럼 귀부터 여는 장면은 압도적이고 또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모든 생명의 싹이 귀부터 열고 대지와 물에 귀기울이는 장면은 사실에 가깝지만 이를 우리가 다른 감각을 통해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건 전적으로 시인의 상상력 덕분이다.
튤립에게 한차례의 파도가 탄생이고 다음 한차례의 파도가 죽음이라면, “파도와 파도 사이/ 그 조용한 시간을” 튤립은 섬세하게 귀를 열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인의 두번째 시집 『우울은 허밍』을 지배하는 ‘귀의 시학’은 그렇게 우리를 ‘튤립의 세계’로 이끈다. 언어의 주름 사이에 숨어 있는 비의를 드러내고 싶다던 시인의 다짐은 시간이 흘러 ‘소리의 세계’ ‘튤립의 세계’로 구체화되었다. 상실의 회복을 염원하는 시인의 시작詩作에 우리는 계속 관심을,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