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길 위의 혁명을 꿈꾼다
한국에 ‘걷기 여행’ 붐을 일으킨 도보여행가 김남희가 회사를 그만두고 전세금마저 털어 여행을 나선 지도 어느새 10년. 이번에는 매혹의 땅, 라틴아메리카로 떠났다. 배낭 무게 28킬로그램, 총 여행 기간 14개월, 왕복 두 차례, 1백 시간이 넘는 비행, 야간버스에서 보낸 수많은 밤, 한 번의 교통사고와 세 번의 소매치기 미수, 그리고 네 번의 도난 사고, 수십 번의 길 잃기. ‘여행 밥 10년차’인 그녀에게도 라틴아메리카 여행은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온 지금, 라틴아메리카는 여행작가 김남희의 여행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준 새로운 세계가 되었다.
홀로 걸으며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간의 여행법이었다면, ‘김남희가 매혹된 라틴아메리카’ 두번째 이야기 『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에서는 예고 없이 시작된 사랑이라는 모험과 함께,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쿠바, 멕시코, 브라질 등을 여행하며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과 마주한다. 여행이 주는 감정의 동요에 점점 무뎌지던 그녀에게 초보 여행자 ‘감자씨’와의 동행은 호기심 많고 열정적인 여행자였던 과거의 자신과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된다. 감자씨가 쏟아내는 에너지의 파동에 휩쓸리고, 여행이 주는 활기와 열정을 다시 한번 느끼며 여행의 맛을 되찾는다. 단순히 여행의 동행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의 변화도 조금씩 이뤄진다. 낯선 여행지가 조금씩 익숙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처럼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의 삶에 스며들어가는 과정이 전개된다.
여행은 우리를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해준다. 그 어떤 가면도 쓰지 않는 자신으로 머물게 하면서도, 어제까지 몰랐던 낯선 자신을 끝없이 발견하게 하는 것이 여행의 힘일 것이다. 그러니 육체의 나이가 늙음을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더이상 새로운 얼굴을 찾아내지 못할 때 사람은 늙는 것이 아닐까. 더는 어떤 질문을 던지지 않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으며,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 늙지 않기 위해서라도 늘 기억하고 싶다. 여행은 한 사람이 진리라고 믿는 세계에 균열을 일으켜 더 넓은 세계를 열어주는 행위라는 것을. _프롤로그에서
생동하는 삶의 방식을 깨닫다
‘김남희가 매혹된 라틴아메리카’ 1권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에서 중남미의 광활한 자연이 주는 야생성에 감동했다면, 이 책에서는 이 땅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육체성’에 매혹된다.
에콰도르 엘아이로의 커피농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난 가족들은 자신의 밭과 커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삶, 정직한 노동에 기반한 삶에서 오는 긍지는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자전거를 돌려 동력을 생산하는 세탁기, 농사나 집짓기 등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생태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일본인 아야 씨의 농장에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거리를 체감한다. 빈부격차 문제가 심각한 콜롬비아에서 만난 벤하민은 유기농 로컬 푸드 식당을 운영하며 식재료를 공급하는 농어민들의 마을에 지속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생산자의 노동을 더 가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작은 노력이 큰 빛이 되어 세상을 바꿔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나 또한 생태적인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면 두렵다.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삶과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간격은 얼마나 아득한지. 나는 지구에서 매일 잘려나가는 나무가 몇 그루인지 알면서도 종이책을 선호한다. 털을 얻기 위해 동물을 얼마나 잔혹하게 도살하는지 알면서도 오리털 잠바를 포기하지 못한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왕복하면 탄소를 얼마나 배출하는지 알면서도 여행은 포기하지 못한다. 일본과 에콰도르 사이의 거리보다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일 사이의 거리가 내게는 더 멀다. 그러니 일상의 자잘한 선택마저도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일치시키는 그녀의 일관됨이 존경스러울 수밖에. _본문에서(55쪽)
다양한 삶의 모습과 대면하면서 10년차 여행가 그녀의 사유는 더욱 발전해간다. 여행이란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며 여권에 도장 하나를 늘리는 일이 아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있음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의 성’에 균열을 만드는 일이어야 함을 다양한 여행자들의 모습을 통해 절감한다. 여행은 답을 찾기 위해 떠나는 행위가 아닌, 질문도 없이 살아온 일상을 깨워 질문을 발견하기 위한 행위임을 깨닫는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질문과 마주하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고, 미처 몰랐던 낯선 내 얼굴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한 뼘 성장하는 기회가 여행이라는 배움을 얻는다.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경이로운 것들은 어쩌면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피로 이루어진 슬픈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그 슬픈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지금껏 충분히 존중을 표해왔을까. 이 황금 마스크를 ‘갖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왔던 스페인 정복자와 이 마스크를 ‘보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탐욕스러운 열정과 호기심이라는 면에서는 마찬가지인 게 아닐까. 그 시절 백인들은 원주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믿었기에 그들의 것을 빼앗아 갖는 건 죄가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들이 칼과 총을 들고 몰려왔다면 21세기의 여행자라는 유목민은 카메라와 노트북, 아이폰과 같은 신기술로 무장했다. 그 무기들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멋대로 훔치고, 파헤치고, 찍어댄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제멋대로이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_본문에서(100~101쪽)
모든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언젠가부터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나눌 사람을,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도란도란 감정을 나눌 사람을 갈망했던 그녀에게 페루 쿠스코는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 되었다. 쿠스코에서 만나 심장의 두근거림을 애써 부인하고 흔들리지 않기로 했던 사람, 그럼에도 화석이 되어버린 연애 세포를 되살린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초보 여행자 ‘감자씨’가 쿠스코에서의 만남 이후 다시 함께 여행하기 위해 한국에서 중남미로 두 번이나 날아온 것.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인생의, 여행의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언제나 최악을 상상하고 몸을 사리는 조심스러움이 뼛속 깊이 배어 있는 저자와 여행 경력이나 외국어 구사능력,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판단력 등 모든 면에서 여행 초짜인 ‘감자씨’의 여행은 순탄치 않았다. 멕시코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다가 경찰에게 걸려 구치소에 갈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캐리어에 돈을 넣어두었다가 공항 직원이 슬쩍하는 바람에 여행 경비를 홀랑 털리기도 하며, 민박집 주인이나 택시기사에게 바가지를 쓰기도 한다. 두 사람은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주인공들처럼 서로 취향도, 식성도 달라 끊임없는 조율과정을 거친다.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고, 서로 다른 인생의 여정을 걸어온 두 사람은 그렇게 여행을 통해 어느새 자신들만의 궤도를 만들어간다. 어제까지 몰랐던 낯선 자신을 끊임없이 발견케 하는 여행의 힘, 혁명과 같이 삶을 뒤흔드는 그 힘이 『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에서 이어진다.
지금껏 내가 해온 여행은 어쩌면 안전한 골목 탐험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긴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다 해도 잃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잃고 싶지 않은 것, 여행만큼이나 간절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생겨났다. 나에게 격납고가 아니라 활주로가 되어주고 싶다는 남자. 자신의 병이 나를 가두는 덫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남자. 그래서 병이 악화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내 등을 떠밀어 이 먼 곳까지 나를 보낸 남자. 그를 두고 떠나온 지금에서야 내 진짜 여행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이제야 골목을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딘 건지도 모른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 상실을 나는 감수할 수 있을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 바깥세계는 나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_본문에서(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