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386개의 시작메모이고, 386개의 산문시이며, 386개의 에세이다!
권혁웅의 감성사전, 그 세번째 이야기 <사물>
『생각하는 연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문단 안팎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권혁웅의 산문집 『생각하는 연필』을 펴낸다. 책에 붙은 시리즈 이름이 ´시인의 감성사전´인 데서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듯 이 기획은 사전의 방대함과 감성의 세세함과 그림의 상징함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다시 말해 책을 읽는 맛과 책을 쓰는 맛과 책을 보는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쓰이고 그려지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세번째 주제를 ‘사물’로 삼아 여기 460페이지의 두툼한 사전 형식의 책 한 권으로 빚어냈다.
책의 무시무시한 두께에 입이 떡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다. 술술 읽혀나가기 때문이다. 일단은 재미나다.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유연성과 탄력이 그 속도를 좌우한다면 권혁웅은 타고난 단거리 주자다. 한달음에 치고 나가는 근육의 힘이 여간 아니라서 아무리 복잡하고 아무리 어려운 사유가 뻗어나간다 해도 읽는 우리들로 하여금 금세 만만하게 따라잡게 만든다. 무엇보다 정확한 문장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다. 아무렴, 유머와 위트는 기본이다. 다독과 다작이 절묘하게 균형감을 이뤘을 때 선보일 수 있는 글쓰기의 전형적인 스타일, 그 선례이다.
이 글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계간 『풋,』, 월간 『문장 웹진』과 『현대시』에 연재되었던 원고에 보태기를 하여 ‘사물’에 관한 그의 사유들을 완성해낸 것이다. 단추, 빵, 클립, 하나(1), 그릇, 시소, 등, 숟가락, 뚜껑&마개, 도넛, 연필, 꼬리, 글자, 지도, 거울, 가면, 이불, 정원, 무덤, 그물, 인형, 이렇게 총 21개의 사물들이 지극히 건강하게 수다스러운 저자 권혁웅의 입을 빌려 챕터마다 자유자재로 ‘놀고’ 있는데, 그 가짓수가 386개에 이른다. ‘몸’과 ‘동물’에 이어 세번째 감성사전의 테마로 ‘사물’을 선택하게 된 시인만의 남다른 이유라도 있을까.
이 책은 ‘사물들’을 호명한 글이며, 사물들에 관한 특별한 종류의 사전이다. 각 장의 표제로 올라 있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 사람, 세상과 어떻게 연계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한 사물과 다른 존재자들과의 연대를 밝힌다는 점에서 이 글은 유비의 지평을 품고 있으며, 이 지평선 너머에서 아마도 시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시작메모이고 어떻게 보면 산문시이며 다시 보면 그냥 에세이다. (p4 「자서」중에서)
각 사물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이야기들에 있어 묘한 지점이라고 하면 글마다 그 스타일이라는 게 무대 뒤에서 디자이너의 스케치에 따라 훌렁훌렁 옷을 잘도 갈아입는 모델처럼 변신을 잘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서노트였다가 일기였다가 시작메모였다가 산문시였다가 글의 섭동에서 오는 스타일의 자유로움을 자랑하며 우리 몸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를 구하는 이 책은 그러므로 전방위 글쓰기 교본이라 해도 무리이지는 않을 것만 같다. 그 다양성을 다음의 예시를 통해 증명해보자면 이렇다.
여기 이런 시작메모가 있다.
삼겹살, 오겹살은 무슨 서책 같아. 어디에 클립을 꽂아야 할까? 우리집 가장도 두툼한 한 권의 책이 되어가고 있네. 사서史書와 가계부를 합본한, 그런 책이라네. (p55 「합본한 책」전문)
무한대 기호∞는 누운 팔8자 모양이기도 하다. 당신이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다면, 이런 말도 하는 것이겠지. 우리의 멀어짐은 어쩌면 팔자라고. (p69 「∞=8」전문)
컵에 달린 손잡이는 뜨거운 잔을 만질 때 데지 말라고 달아놓은 겁니다. 그것참, 그럴듯해요. 거 왜, 처음 애인 사귈 때 손부터 잡잖아요? 입술부터 대면 데고 말기 때문이지요. (p83 「초보자용 컵」전문)
공동묘지가 망자들의 아파트라면 선산은 망자들의 집성촌이죠. 어느 쪽이나 죽음이 우리에게 빌려주는 영구임대주택이에요. (p394 「죽어서 가는 주거 공간 1」전문)
더불어 이런 산문시들이 있다.
벙어리장갑을 끼면, 하나에도 큰 하나가 있고 작은 하나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엄지가 작은 하나고 나머지 부분이 큰 하나라고요? 그 반대죠. 엄지를 치켜세우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저 착한 나머지들을 보세요. 당신이 최고라고 말하는 저 예쁜 하나를 떠받치는 다른 하나 속에 든 넷을요. (p60 「1+4=2」전문)
경남 창녕의 송현동 고분에서 발견된 순장은 참 아프다. 아리따운 소녀도 아프지만, 아이를 억지로 데리고 들어간 주인 때문에 더 아프다. 자기 혼자는 억울하니, 시종들을 다 데리고 가겠다는 심보 말이다. 밥 한 그릇으로 만족할 수 있겠냐고, 국그릇도 있고 반찬 그릇도 옹기종기 좀 모여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만찬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참, 그 주인도 밥을 먹는 자가 아니라 밥그릇 하나에 불과했던 것을. (p78 「가야식 만찬」전문)
바바리맨이 바바리를 열어 제 몸을 공개할 때, 어쩌면 그는 알몸이라는 유니폼을 입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당황한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를 때, 아이들은 그가 알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쓴 가면이 너무 그럴듯해서 소리를 지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바리맨은 그러니까 시선에 노출됨으로써 시선 바깥으로 무한히 도망가는 거지. 자기 얼굴을 인쇄한 쫄쫄이 가면을 쓰고. 자기 몸피에 딱 맞는 투명 옷을 입고. (p336 「연소자관람불가면을 쓰다」전문)
그리고 이런 에세이들이 있다.
단추가 부와 권력의 상징이라는 건 커프스버튼을 보면 안다. 소매의 두 쪽을 나란히 포개는 일반 단추와 달리, 커프스버튼은 안에서 밖으로 걸어서, 소매 두 쪽의 모양을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오게 만든다. 남자의 겉옷 장식이 변해서 된 게 커프스버튼이다. 단추 하나에도 부와 권력을 과시하다니, 남자들이란 참. 단추 하나에 흠뻑 빠지는 여자들은 또 어떻고. 소매 벌어지지 말라고 다는 게 단추 아닌가 말이다. 부와 명예에 그렇게 사로잡혀서 어쩌겠는가 이 말이다. 커프cuff를 복수로 쓰면 쇠고랑handcuffs이란 뜻이다. (p25 「소맷부리버튼」 전문)
젊은 사람도 몸속에 지팡이 하나를 넣어두고 다닌다. 꼿꼿하게 선 사람이 바로 1이다. 나이가 들어 등이 굽으면 그러니까 2가 되면 비로소 지팡이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12는 완전수다. 무엇보다도 연륜이 거듭된 숫자이기 때문이다. (p66 「젊으면 1, 늙으면 12」전문)
카뮈는 늘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처음 문장과 두번째 문장은 아무 관련이 없지만, 우리는 둘을 원인과 결과로 묶어서 말하곤 하지. 그가 부조리 문학의 원조가 된 건 이 때문일 거야. (p321 「가장 허무한 가면」전문)
글만큼 맛깔 나는 삽화는 서양화가 변웅필이 맡아주었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세계를 엿보는 거시적인 무게감도 큰 의의가 있겠지만 한 챕터의 글로 한 세계를 엿본다 할 때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 바로 이 『생각하는 연필』이다. 변웅필의 컬러풀한 그림은 글과 나란히 놓였을 때와 글 없이 홀로 놓였을 때 그 뉘앙스를 매우 다르게 풍긴다. 그 차이를 감안해서 책장을 넘겨봐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을 ‘사물에 대한 한 권의 백과전서’라 부를 수 있는 데는 아시다시피 보시다시피 읽으면서 찾고 또 보면서 찾으라는 시인과 화가의 친절한 배려가 합작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전은 브리태니커도 위키피디아도 아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고 또 없을 내가 만든 나만의 사전! 우리 모두 저마다의 관심사로 저마다의 사전을 편찬해보자는 야심한 포부 아래 이 책은 그저 소박한 샘플이라 여겨주시길.